라이프10

K피아니스트의 연대기

대한민국 피아노는 백건우가 열한 살에 그리그를 협연한 뒤 70년 동안 임동혁의 롱 티보, 김선욱의 리즈, 선우예권과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문지영과 박재홍의 부조니 그리고 2015년 조성진의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 우승까지 이어졌고, 지금은 이혁과 이효 형제가 앉아있습니다.

백건우임동혁김선욱손열음문지영조성진선우예권박재홍

바르샤바의 중간 정산

2015년 10월 21일,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협회가 제17회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의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녹음 심사에 450명이 몰렸다. 예선에는 27개국 160명이, 본선에는 20개국 77명이 올랐다. 결선 무대에 남은 것은 8개국 10명이었다. 그중 9명이 같은 곡,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골랐다. 같은 곡을 친 아홉 명 가운데 1위로 호명된 이름은 21세의 조성진이었다. 폴로네즈 최고 연주상까지 그의 몫이었다.

1927년 시작된 대회에서 한국인이 1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10년 전인 2005년까지 한국인 최고 기록은 형제가 나눠 가진 공동 3위였다. 그해 결선에는 임동민, 임동혁, 그리고 손열음이 있었다.

그날의 발표는 한 사람의 우승이 아니었다. 한 계보의 중간 정산이었다. 정산서에는 앞선 세대의 이름과 뒤따를 세대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백건우

백건우 : 콩쿠르 이전의 구도자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건우는 열한 살에 국립교향악단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했다.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에서 로지나 레빈을 사사했고, 나움버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80년 이후에는 파리에 터를 잡았다.

그의 무기는 순위가 아니라 전곡이었다. 라벨의 피아노곡 전곡을 녹음했고, 2007년 12월 8일부터 15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이어 연주했다. 2026년 데뷔 70주년을 맞은 그는 4월 10일 춘천에서 슈베르트를 들고 다시 무대에 섰다.

한국 피아노가 콩쿠르 성적표로 이름을 알리기 전, 한 사람은 레퍼토리 전체로 이름을 남겼다. 다음 세대는 다른 문을 두드렸다.

임동혁

임동혁 : 거부된 3위

1984년생 임동혁은 2001년 5월 EMI와 녹음 계약을 맺으며 이 레이블의 최연소 피아니스트가 됐다. 그해 12월에는 프랑스 롱 티보 콩쿠르에서 1위에 올랐다.

2003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에게 3위를 지명했다. 임동혁은 심사에 만족하지 못해 상을 받지 않았다. 2005년 10월 쇼팽 콩쿠르에서는 형 임동민과 공동 3위에 올랐고, 2007년 5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는 공동 4위를 기록했다.

세계 3대 콩쿠르를 모두 거쳤지만 1위는 없었다. 그래도 그는 한국 피아노 스타 시대를 연 연주자로 꼽힌다. 롱 티보의 1위 명단에는 2022년 또 한 명의 한국인이 이름을 올린다.

김선욱

김선욱 : 40년 만의 최연소

1988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선욱은 2006년 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8세였다. 40년 만의 최연소 우승자이자 이 대회의 첫 아시아인 우승자였다. 결선에서 그는 마크 엘더가 지휘하는 할레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건반 위에서 증명을 마친 그는 지휘봉을 들었다. 2013년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지휘 석사를 받았고, 2024년 1월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예술감독에 취임했다. 임기 연장은 없었다. 2025년 12월 2년 임기를 마쳤고, 2026년 1월 10일 신년음악회에서 경기필 지휘자로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피아니스트가 지휘대에 오르는 길은 열렸다. 다만 그 길에도 임기는 있었다.

손열음

손열음 : 두 번의 2위

1986년 원주에서 태어난 손열음은 2005년 쇼팽 콩쿠르에서 임동민·임동혁 형제와 함께 결선 무대에 섰다. 이어 2009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와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연달아 2위에 올랐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최고연주상을 함께 받았다.

1위는 끝내 그의 이력서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대를 직접 설계하는 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2016년 평창대관령음악제 부예술감독으로 위촉됐고, 이후 예술감독으로 음악제를 이끌었다.

연주와 기획을 한 몸에 담은 이력이었다. 한국 피아노의 다음 1위 소식은 이탈리아에서 날아왔다.

문지영

문지영 : 비어 있던 왕좌

1995년 여수에서 태어난 문지영은 2014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듬해인 2015년에는 이탈리아 부조니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 1위에 올랐다. 이 대회가 15년 만에 배출한 우승자였고, 아시아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15년 동안 비어 있던 자리를 스무 살의 한국인이 채운 것이다. 2017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슈만 피아노 소나타 1번을 담은 데뷔 앨범을 냈고, 2019년 10월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문지영이 볼차노의 빈자리를 채운 그해 10월, 바르샤바에서도 또 하나의 빈자리가 채워졌다.

조성진

조성진 : 아홉 명 중 한 명

1994년 서울에서 태어난 조성진은 15세이던 2009년 하마마쓰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아시아인 첫 우승을 차지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는 3위에 올랐다.

2015년 10월 바르샤바에서 그는 결선 진출자 10명 중 9명이 고른 쇼팽 협주곡 1번으로 1위를 가져갔다. 같은 곡을 친 아홉 명 사이에서 증명한 차이였다. 이듬해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후 그는 콩쿠르 우승자에서 세계 정상급 악단의 파트너로 자리를 옮겼다. 2024-25 시즌 베를린 필하모닉 상주음악가로 활동했고, 2025년 1월 라벨 피아노 독주곡 전곡 앨범을 냈다. 같은 해 오푸스 클라식 올해의 기악 연주자상을 받았다.

전곡이라는 단어는 한때 백건우의 것이었다.

선우예권

선우예권 : 적립식 우승

1989년 안양에서 태어난 선우예권은 15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했다. 이후 줄리어드와 매네스를 거쳤다.

그의 이력은 1위의 적립이었다. 2008년 플로리다, 2009년 인터라켄, 2012년 윌리엄 카펠과 피아노 캠퍼스, 2013년 센다이, 2014년 베르비에 방돔 프라이즈, 2015년 독일 피아노 어워드에서 1위를 받았다. 그리고 2017년 6월 10일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제15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 금메달을 받았다. 28세, 한국인 최초였다.

한 번의 도약이 아니라 하나씩 쌓은 계단이었다. 포트워스의 금메달은 5년 뒤 다시 한국인에게 돌아간다. 그 사이 볼차노에서는 문지영의 계보가 이어졌다.

박재홍

박재홍 : 5관왕의 해석자

1999년생 박재홍은 2021년 9월 3일 이탈리아 볼차노에서 막을 내린 제63회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에 올랐다. 2015년 문지영 이후 한국인 두 번째 우승이었다. 2위는 김도현으로, 한국인이 1·2위를 나란히 차지했다.

그는 부조니 작품 최고연주상과 실내악 최고연주상 등 특별상 4개를 함께 받아 5관왕에 올랐다. 결선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2017년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최연소 파이널리스트로 연주한 곡도 같은 곡이었다.

2026년 9월 6일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24곡을 한자리에서 연주한 그는 "좋은 해석자"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라흐마니노프 3번은 이듬해 여름 포트워스에서 다시 울린다.

임윤찬

임윤찬 : 열여덟 살의 라흐마니노프 3번

2004년 3월 20일에 태어난 임윤찬은 2022년 6월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8세, 대회 역대 최연소였다. 결선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고, 현대음악상과 청중상도 함께 받았다. 선우예권 이후 5년 만의 한국인 우승이었다.

2023년 10월 19일 영국 데카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2024년 4월 19일 첫 음반 쇼팽 에튀드를 냈다. 그해 10월 2일 런던에서 그라모폰상 피아노 부문과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한국 피아니스트로는 처음이었다.

그는 한예종 영재교육원 시절부터 손민수를 사사했다. 국내에서 배운 피아니스트가 그라모폰상에 닿았다. 그러나 쇼팽 콩쿠르의 두 번째 한국인 우승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혁

이혁 : 형제의 바르샤바

이혁은 2012년 모스크바 국제 청소년 쇼팽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했다. 2016년 파데레프스키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했고, 2018년 하마마쓰 콩쿠르에서는 3위에 올랐다. 2021년 쇼팽 콩쿠르에서는 한국인 참가자 가운데 유일하게 결선에 올랐다.

2022년 11월 13일 파리에서 폐막한 롱 티보 국제 콩쿠르에서 그는 일본의 마사야 카메이와 공동 1위를 차지했다. 2001년 임동혁이 올랐던 자리였다.

2025년 10월, 그는 동생 이효와 함께 다시 바르샤바에 섰다. 형제는 본선 3차 경연까지 마쳤지만 결선에는 오르지 못했다. 20년 전 임동민·임동혁 형제가 공동 3위를 나눠 가졌던 무대였다.

바르샤바를 향한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건우에게 피아노는 70년 동안 전곡으로 쌓아 올린 순례다. 임동혁과 손열음에게 콩쿠르는 1위 문턱에서 멈췄지만, 한국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세계 무대에 새긴 통로였다. 김선욱, 문지영, 선우예권, 박재홍에게 콩쿠르는 리즈와 부조니와 포트워스에서 한국인 최초와 아시아인 최초를 하나씩 채워 넣는 장부였다. 조성진과 임윤찬에게 우승은 끝이 아니라 데카·DG·베를린 필로 이어지는 입구였다. 그리고 이혁에게 바르샤바는 여전히 진행 중인 질문이다.

열 명은 서로 다른 대회를 거쳐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우승이 쌓일수록 1위라는 단어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이제 질문은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누가 오래 남느냐로 옮겨 갔다.

바르샤바의 두 번째 한국인 1위 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