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5일 일요일

도조 히데키 : 2026년 10월 26일 업데이트

1
1884년 12월 30일, 0세 때, 도조 히데키는 도쿄에서 육군 장교 도조 히데노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두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 집안의 맏이로 자랐다.
2
1899년 00월 00일, 14세 때, 도조 히데키는 도쿄 육군지방유년학교에 3기생으로 들어가 직업 군인의 길에 올랐다.
3
1905년 03월 30일, 2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사관학교를 17기로 마쳤다. 졸업 석차는 363명 가운데 10등이었다.
4
1905년 04월 21일, 20세 때, 도조 히데키는 보병 소위로 임관해 근위 보병 제3연대에 배속됐다.
5
1905년 09월 00일, 20세 때, 도조 히데키는 러일전쟁을 마무리한 포츠머스 조약을 굴욕으로 보는 여론에 동조했고, 이를 계기로 미국에 대한 반감을 평생 간직했다.
6
1907년 12월 21일, 22세 때, 도조 히데키는 보병 중위로 승진했다.
7
1909년 00월 00일, 24세 때, 도조 히데키는 이토 가쓰코와 혼인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3남 4녀가 났다.
8
1911년 00월 00일, 26세 때, 도조 히데키는 1910년에 이어 육군대학교 입학시험에서 다시 낙방했고, 나가타 데쓰잔·오카무라 야스지 등이 그를 위한 공부 모임을 열었다.
9
1911년 00월 00일, 26세 때, 도조 히데키는 맏아들 도조 히데타카를 얻었다.
10
1912년 00월 00일, 27세 때, 도조 히데키는 세 번째 도전 끝에 육군대학교에 입학했다.
11
1913년 00월 00일, 28세 때, 도조 히데키는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를 여의었다.
12
1914년 00월 00일, 29세 때, 도조 히데키는 훗날 항공기 설계자이자 미쓰비시 계열 경영인이 되는 둘째 아들 도조 데루오를 얻었다.
13
1915년 12월 11일, 3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대학교를 27기 11등으로 졸업하고 보병 대위로 올라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을 맡았다.
14
1916년 00월 00일, 31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병기본창 소속과 육군성 부관을 함께 맡았다.
15
1918년 00월 00일, 33세 때, 도조 히데키는 러시아 내전에 개입한 일본군 원정대의 일원으로 시베리아에서 잠시 복무했다.
16
1919년 08월 00일, 34세 때, 도조 히데키는 주재 무관으로 발령받아 가족을 두고 홀로 스위스에 부임했다.
17
1920년 08월 10일, 35세 때, 도조 히데키는 보병 소좌로 승진했다.
18
1921년 07월 00일, 36세 때, 도조 히데키는 주재 무관 자격으로 독일로 옮겨 근무했다.
19
1921년 10월 27일, 36세 때, 도조 히데키는 바덴바덴에서 나가타 데쓰잔·오바타 도시로·오카무라 야스지가 육군 개혁을 다짐한 이른바 바덴바덴 밀약에 가담했다.
20
1922년 00월 00일, 37세 때, 도조 히데키는 귀국하면서 기차로 미국 대륙을 가로질렀는데, 이것이 그가 북미 땅을 밟은 유일한 여정이었다.
21
1922년 11월 28일, 37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대학교 병학 교관으로 임명됐다.
22
1924년 00월 00일, 39세 때, 도조 히데키는 아시아계 이민을 막은 미국 이민법에 분개해 일본도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글을 남겼다.
23
1924년 00월 00일, 39세 때, 도조 히데키는 보병 중좌로 승진했다.
24
1926년 03월 23일, 41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 고급과원으로 옮기면서 육군대학교 교관을 겸했다.
25
1928년 03월 01일, 43세 때, 도조 히데키는 소장파 장교 모임인 목요회에서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고 만주·몽골에 일본의 확고한 정치 세력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6
1928년 03월 08일, 43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성 정비국 동원과장에 올랐다.
27
1928년 08월 10일, 43세 때, 도조 히데키는 보병 대좌로 승진했다.
28
1929년 05월 00일, 44세 때, 도조 히데키는 후타바카이와 목요회가 합쳐 결성된 잇세키카이에서 이타가키 세이시로·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29
1929년 08월 01일, 44세 때, 도조 히데키는 보병 제1연대장을 맡아 병사들의 가정 형편까지 챙기면서 인정 연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30
1931년 08월 01일, 46세 때, 도조 히데키는 참모본부 총무부 제1과장(편성동원과장)에 취임했다.
31
1933년 03월 18일, 48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32
1933년 11월 22일, 48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성 군사조사부장이 됐다.
33
1934년 03월 00일, 49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성이 펴낸 논집 『비상시 국민전집』에 국가가 정치·사회·경제 전반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국방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글을 실었다.
34
1934년 03월 05일, 49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사관학교 간사로 부임했다.
35
1934년 08월 01일, 49세 때, 도조 히데키는 구루메에 주둔한 보병 제24여단의 여단장이 됐다.
36
1935년 09월 21일, 50세 때, 도조 히데키는 만주로 건너가 관동헌병대 사령관과 관동국 경무부장을 겸했다.
37
1936년 02월 26일, 51세 때, 도조 히데키는 도쿄에서 2·26 사건이 일어나자 관동군 안에서 반란에 동조한 혐의를 받은 황도파 계열 장교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38
1936년 12월 01일, 51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39
1937년 03월 01일, 52세 때, 도조 히데키는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뒤를 이어 관동군 참모장에 올랐다.
40
1937년 07월 00일, 52세 때, 도조 히데키는 루거우차오 사건 뒤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며 허베이성을 비롯한 화북 지역 공격을 지시해 중일 전쟁 확대를 이끌었다.
41
1937년 07월 00일, 52세 때, 도조 히데키는 참모장 신분으로 차하르 파견 병단을 직접 이끌고 내몽골 방면 작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그의 사실상 유일한 실전 지휘였다.
42
1938년 05월 30일, 53세 때, 도조 히데키는 도쿄로 불려 와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대신 아래에서 육군차관을 맡았다.
43
1938년 06월 18일, 53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항공본부장을 겸했다.
44
1938년 11월 28일, 53세 때, 도조 히데키는 군인회관 간담회에서 중일 전쟁을 끝내려면 북쪽으로 소련, 남쪽으로 영국·미국과의 전쟁을 각오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45
1938년 12월 10일, 53세 때, 도조 히데키는 참모차장 다다 하야오와의 대립 끝에 차관에서 물러나 새로 만들어진 육군항공총감 자리에 앉았다.
46
1940년 07월 22일, 55세 때, 도조 히데키는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육군대신에 취임했다.
47
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대신으로서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 손잡고 일본·독일·이탈리아 삼국 동맹 체결을 밀어붙였다.
48
1941년 01월 08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말라는 내용을 담은 전진훈을 육군대신 명의로 전군에 내렸다.
49
1941년 07월 18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육군대신 자리를 지켰다.
50
1941년 08월 27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총력전연구소가 연 모의 도상연습에 육군대신으로 참석해 미국과 싸우면 일본이 반드시 진다는 결론을 보고받았다.
51
1941년 10월 14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마지막 고노에 내각 각의에서 중국·인도차이나 철병 요구를 받아들이면 중일 전쟁의 성과가 무너진다며 미국과의 타협에 강하게 반대했다.
52
1941년 10월 18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제40대 내각총리대신에 올라 현역 군인 신분으로 육군대신과 내무대신을 함께 쥐었고, 같은 날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53
1941년 10월 18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총리 임명 자리에서 히로히토 천황으로부터 앞선 어전회의의 개전 방침을 다시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따르겠다고 답했다.
54
1941년 11월 27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미국의 헐 노트를 각의에 최후통첩이라고 보고해 개전 명분으로 삼았다.
55
1941년 12월 01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어전회의에서 미국·영국·네덜란드와의 전쟁 결정을 이끌어 냈고, 그 직후 해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처음 전달받았다.
56
1941년 12월 08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진주만 공격 성공을 보고받은 뒤 라디오에 나가 일본이 미국·영국·네덜란드와 전쟁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57
1941년 12월 09일, 56세 때, 도조 히데키는 내무대신으로서 개전 이튿날 새벽 반전 혐의자 등 396명을 한꺼번에 검거·구금하게 했다.
58
1942년 04월 18일, 57세 때, 도조 히데키는 둘리틀 공습 뒤 붙잡힌 미군 조종사 8명을 처형하자는 참모본부 주장에 일본군 포로가 보복당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
59
1942년 09월 01일, 57세 때, 도조 히데키는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의 반발을 무릅쓰고 대동아성 설치를 밀어붙였고, 도고가 사임하자 외무대신을 겸했다.
60
1942년 11월 00일, 57세 때, 도조 히데키는 육군대신으로서 중국·일본·만주국에서 남방 점령지로 보내는 위안부의 서류 요건을 정하는 규정 작성에 관여했다.
61
1942년 12월 00일, 57세 때, 도조 히데키는 과달카날 전투 지속을 놓고 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와 맞선 끝에 철수에 반대한 참모들을 경질하고 섬 포기를 명령했다.
62
1943년 03월 00일, 58세 때, 도조 히데키는 만주국과 왕징웨이 정부를 시작으로 5월 필리핀, 6~7월 태국·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를 차례로 방문했다.
63
1943년 04월 20일, 58세 때, 도조 히데키는 사흘 동안 문부대신을 겸임했다.
64
1943년 10월 08일, 58세 때, 도조 히데키는 상공대신을 겸했다.
65
1943년 11월 00일, 58세 때, 도조 히데키는 도쿄에서 대동아회의를 열어 점령지와 동맹국 지도자들을 모으고 대동아공동선언을 내놓았다.
66
1943년 11월 01일, 58세 때, 도조 히데키는 새로 생긴 군수성의 초대 군수대신을 겸했다.
67
1944년 01월 00일, 59세 때, 도조 히데키는 대본영의 인도 침공 명령을 승인해 임팔 작전의 길을 열었다.
68
1944년 02월 21일, 59세 때, 도조 히데키는 트루크 공습 직후 관례를 깨고 육군 참모총장까지 겸해 총리·육군대신·참모총장을 한 손에 쥐었다.
69
1944년 06월 24일, 59세 때, 도조 히데키는 마리아나 해전 참패 뒤 군령부총장 시마다 시게타로와 함께 천황에게 사이판 탈환 포기를 보고했다.
70
1944년 06월 27일, 59세 때, 도조 히데키는 내각 비판을 자제하라며 오카다 게이스케 전 총리를 관저로 불렀으나 격한 언쟁만 벌였다.
71
1944년 07월 05일, 59세 때, 도조 히데키는 인도 침공 중단을 건의했고, 천황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일본군 약 7만 2천 명이 전사했다.
72
1944년 07월 18일, 59세 때, 도조 히데키는 사이판 함락 뒤 중신과 천황의 지지를 잃고 참모총장에서 물러나며 내각 총사직을 결정했다.
73
1944년 07월 22일, 59세 때, 도조 히데키는 총리·육군대신·군수대신에서 공식 퇴임하고 예비역으로 편입됐다.
74
1944년 09월 00일, 59세 때, 도조 히데키는 쓰노다 도모시게 소좌와 유도가 우시지마 다쓰쿠마가 꾸민 암살 계획의 표적이 됐으나 두 사람이 헌병대에 붙잡히면서 화를 면했다.
75
1945년 02월 26일, 6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천황에게 패전 불가피론을 물리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상주했다.
76
1945년 04월 00일, 6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중신회의에서 다수가 민 스즈키 간타로 대신 하타 슌로쿠 원수를 총리로 추천했다.
77
1945년 08월 13일, 6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일기에 천황이 내린 항복 결정을 침묵으로 따르겠지만 생각은 다르다는 심경을 적었다.
78
1945년 08월 14일, 6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옛 부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헛된 죽음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죽음으로 사죄하겠다고 밝혔다.
79
1945년 09월 10일, 6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시모무라 사다무의 부름으로 육군성에 나가 법정에 서서 소신을 밝혀 달라는 설득을 받았다.
80
1945년 09월 11일, 6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연합군총사령부의 체포 명령으로 미군 헌병이 집을 에워싸자 권총으로 가슴을 쏘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심장을 비껴가 목숨을 건졌다.
81
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도조 히데키는 총상에서 회복한 뒤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됐다.
82
1946년 04월 29일, 61세 때, 도조 히데키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 전쟁 수행과 포로 학대 허용 등의 혐의로 A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83
1946년 05월 03일, 61세 때, 도조 히데키는 다른 피고 27명과 함께 도쿄재판 법정에 섰다.
84
1947년 12월 31일, 62세 때, 도조 히데키는 법정 증언에서 천황의 궁극적 권한을 언급했으나, 천황을 보호하려던 미국 검찰 측이 다나카 류키치를 통해 그에게 증언을 바꾸도록 비밀리에 설득했다.
85
1948년 11월 12일, 63세 때, 도조 히데키는 평화에 대한 죄 등이 인정돼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86
1948년 12월 23일, 63세 때, 도조 히데키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87
1948년 12월 23일, 63세 때, 도조 히데키는 시신이 요코하마에서 화장된 뒤 미군 루서 프리어슨 소령이 탄 항공기에서 요코하마 동쪽 약 48km 태평양에 유골이 뿌려졌다.
88
1948년 12월 26일, 사후, 도조 히데키는 화장장에 버려진 일곱 사형수 몫의 잔회가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인 산몬지 쇼헤이 등에 의해 몰래 수습돼 아타미의 고아관음에 숨겨졌다.
89
1960년 08월 00일, 사후, 도조 히데키는 수습된 유골이 아이치현 산가네산 정상으로 옮겨져 순국칠사묘에 안치됐다.
90
1978년 00월 00일, 사후, 도조 히데키는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91
2008년 08월 12일, 사후, 도조 히데키는 종전 직전 며칠간 쓴 약 20쪽 분량의 일기가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자료로 처음 공개됐다.
92
2021년 06월 00일, 사후, 도조 히데키는 니혼대학 다카자와 히로아키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기밀 해제 문서를 공개하면서 유골이 바다에 뿌려진 경위가 공식 기록으로 확인됐다.

도조 히데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