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5일 일요일

공병우 : 2026년 10월 25일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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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1월 24일, 0세 때, 공병우는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 남성동에서 아버지 공정규와 어머니 김택규의 8남매 가운데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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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00월 00일, 11세 때, 공병우는 전통 교육을 받다가 소학교에 들어가 성남면·벽단·벽동읍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5학년 과정까지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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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00월 00일, 15세 때, 공병우는 소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대신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입시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시험 없이 들어갈 수 있는 3년제 의주농림학교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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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00월 00일, 16세 때, 공병우는 의주농림학교 2학년 2학기 작문 과제로 학교 시설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글을 냈고, 이를 눈여겨본 고마츠 교장에게서 경성치과의학교 추천 입학을 제안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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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04월 01일, 17세 때, 공병우는 치과의사보다 의사가 되기를 원해 교장 몰래 도립평양의학강습소 입학시험을 치렀고, 신입생 6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최종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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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04월 00일, 18세 때, 공병우는 의사검정시험 제1부에 합격했다. 강습소 동기 약 40명이 응시해 합격자는 공병우를 포함한 3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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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0월 00일, 19세 때, 공병우는 조선총독부 의사검정시험 제3부까지 2년 반 동안 세 차례 응시해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모두 통과하며 의사 면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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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경 · 20세 무렵, 공병우는 새로 문을 연 신의주도립의원에 의원으로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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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00월 00일, 22세 때, 공병우는 신의주도립의원 동료 조진석의 소개로 백인제를 만나 서울로 옮겼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조수로 일하며 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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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09월 00일, 23세 때, 공병우는 조선의학회 제18회 총회에서 건강한 눈을 가진 조선인 62명 105안의 결막낭 세균을 조사한 연구를 경성의학전문학교 안과학교실 소속으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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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1월 10일, 23세 때, 공병우는 조진석의 중매로 이용희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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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00월 00일, 25세 때, 공병우는 3년 기한의 조수 생활을 마치고 시골 개업을 고민하다가, 사타케 슈이치 교수의 권유와 추천으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도쿠미츠 요시토미 교수의 병리학교실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박사학위 연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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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1월 00일, 25세 때, 공병우는 중심성 맥락망막염의 본태를 다룬 첫 실험 논문을 경성의학전문학교기요에 발표했고, 1935년까지 같은 주제의 논문 네 편을 이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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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04월 05일, 28세 때, 공병우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안과학교실 강사로 짧게 임용된 뒤 학교를 떠나, 도립해주의원 안과 주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월급은 12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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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04월 23일, 29세 때, 공병우는 그달 초 도쿄 게이오대학에서 열린 일본안과학회 총회 발표가 주목받자, 중심성 맥락망막염 실험 연구를 나고야제국대학에 의학박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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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07월 04일, 29세 때, 공병우는 학위논문이 나고야제국대학 교수회의 심사를 통과하면서 조선에서 처음 나오는 안과 박사라는 신문 보도의 주인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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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09월 02일, 29세 때, 공병우는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임상 안과를 전공한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됐다. 2년제 강습소 출신으로는 유일한 나고야제국대학 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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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09월 15일, 30세 때, 공병우는 도립해주의원 안과 주임 자리를 그만두고 서울 재동 사거리 벽돌집 2층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첫 안과 전문 병원인 공안과의원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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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00월 00일, 31세 때, 공병우는 눈병 치료를 받으러 공안과를 찾은 한글학자 이극로와 가까워지면서 한글의 가치에 눈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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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00월 00일, 32세 때, 공병우는 유한양행 학술부를 통해 한국인 최초의 안과 교과서로 꼽히는 『신소안과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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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00월 00일, 36세 때, 공병우는 안과 교과서 『소안과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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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경 · 38세 무렵, 공병우는 광복 직후 백인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울의과대학 안과 주임교수를 잠시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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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00월 00일, 39세 때, 공병우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재판부의 초빙으로 백인제와 함께 피고인들을 검진했고, 피고인 송언필의 실명이 고문 때문이 아니라 지병인 당뇨 때문이라고 판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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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00월 00일, 40세 때, 공병우는 일본어로 낸 안과 교과서를 한글로 옮기다 손글씨 원고가 느리고 제각각인 문제에 부딪히자, 자택에 작업실을 차리고 진료 시간을 줄여 한글 타자기 개발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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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02월 00일, 41세 때, 공병우는 받침 전용 글쇠를 더한 세벌식 쌍초점 타자기로 특허를 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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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0월 00일, 42세 때, 공병우는 한글 타자기로는 처음으로 세벌식 타자기 특허를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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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0월 00일, 42세 때, 공병우는 조선발명장려회의 한글 타자기 현상 공모에서 1등 없는 2등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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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00일, 42세 때, 공병우는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전국과학전람회에 내놓아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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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경 · 43세 무렵, 공병우는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빠른 문서 작성을 위해 공병우 타자기 구입을 지시하면서 자신의 타자기가 육해공 3군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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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00월 00일, 43세 때, 공병우는 자신의 한글 타자기를 미국에 특허 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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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06월 00일, 43세 때, 공병우는 미국 언더우드사에 제작을 맡긴 자신의 타자기 시제품 3대를 6·25 전쟁 직전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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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경 · 43세 무렵, 공병우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1946년 정판사 사건 감정을 문제 삼은 심리 끝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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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09월 00일, 43세 때, 공병우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타자기 설계도를 넘기면 살려 주겠다는 회유를 받고 설계 작업으로 시간을 끌다가, 인민군이 물러날 때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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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00월 00일, 46세 때, 공병우는 미국 특허를 받아 한국 국적자로서 처음 미국 특허를 얻은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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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00월 00일, 46세 때, 공병우는 자신의 타자기가 휴전회담 회의록 작성에 쓰이면서, 남측 대표가 참석하지 않은 회담에서도 한글본 회의록이 가장 먼저 완성돼 결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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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00월 00일, 51세 때, 공병우는 국내에 처음으로 콘택트렌즈를 들여와 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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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0월 00일, 51세 때, 공병우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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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02월 00일, 52세 때, 공병우는 한글학회 이사가 됐고, 이후 20여 년 동안 학회 이사로 활동하며 한글 운동 단체를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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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1월 01일, 52세 때, 공병우는 눈의 날 기념 지방 순회 무료 개안수술에 공안과 수술반을 꾸려 서울대·연세대·이화대·국립중앙의료원 수술반과 나란히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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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경 · 53세 무렵, 공병우는 실명자 재활기관 설립과 수화학교 지원 같은 장애인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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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08월 00일, 55세 때, 공병우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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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04월 11일, 58세 때, 공병우는 한국일보 연재 「한국의 유아독존」에 최현배·이병도에 이어 여섯 번째 인물로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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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00월 00일, 61세 때, 공병우는 기계식 한영 겸용 타자기를 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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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00일, 61세 때, 공병우는 한글 전용에 이바지한 공로로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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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경 · 62세 무렵, 공병우는 박정희 정부가 네벌식 글자판을 타자기 표준으로 정하자 이에 맞서 세벌식을 지키는 운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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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00월 00일, 63세 때, 공병우는 납세 실적 개인 의사 부문 2위에 올랐고, 이듬해에도 같은 순위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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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00월 00일, 64세 때, 공병우는 기계식 한글 점자 타자기를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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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03월 00일, 67세 때, 공병우는 외솔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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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00월 00일, 73세 때, 공병우는 신군부가 권력을 잡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민주화운동을 돕는 한편 컴퓨터용 한글 문서편집기 연구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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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00월 00일, 73세 때, 공병우는 처음으로 세벌식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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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경 · 73세 무렵, 공병우는 미국 교포 사회에 세벌식 글자판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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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04월 00일, 74세 때, 공병우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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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01월 00일, 79~80세 때, 공병우는 제1회 서재필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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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0월 00일, 81세 때, 공병우는 귀국해 세벌식 자판 표준화와 남북한 글자판 통일을 내걸고 한글문화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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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0월 00일, 82세 때, 공병우는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를 대원사에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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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0월 00일, 82세 때, 공병우는 강태진·정내권·이찬진·안대혁 등 젊은 프로그래머들에게 한글문화원 사무실과 연구 여건을 내주었고, 이들은 그곳에서 '한글 1.0'을 개발한 뒤 이듬해 한글과컴퓨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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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0월 00일, 83세 때, 공병우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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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경 · 83세 무렵, 공병우는 PC 통신 하이텔에 세벌식 자판의 장점을 알리는 글을 올리고, 키보드에 붙이는 세벌식 자판 딱지를 원하는 사람에게 무료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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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3월 07일, 88세 때, 공병우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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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3월 07일, 88세 때, 공병우는 죽음을 알리지 말고 장례를 치르지 말며, 시신과 장기를 기증하고 유산은 맹인 복지에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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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3월 07일, 사후, 공병우는 유언에 따라 시신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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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3월 07일, 사후, 공병우는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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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0월 00일, 사후, 공병우는 특허청이 꼽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 7인에 세종대왕·장영실·이순신·정약용·지석영·우장춘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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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0월 00일, 사후, 공병우는 자신이 만든 공병우 타자기가 국립한글박물관의 한글 100대 문화유산에 100번째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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