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5일 목요일

박중양 : 2026년 10월 15일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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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05월 03일, 0세 때, 박중양은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아버지 박정호와 어머니 전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박원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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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00월 00일, 20세 때, 박중양은 청일전쟁 무렵 서울에 머물던 일본인들과 교류하며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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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07월 00일, 22세 때, 박중양은 한성부에서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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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0월 11일, 22세 때, 박중양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에 도착했고, 이튿날 도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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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박중양은 일본 유학 기간에 야마모토 노보루라는 일본식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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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박중양은 일본 유학 시절 박원근이라는 이름으로 붓글씨를 써서 팔아 학비를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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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00월 00일, 26세 때, 박중양은 도쿄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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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00월 00일, 26세 때, 박중양은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 제도와 감옥 제도를 실습하며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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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00월 00일, 29세 때, 박중양은 도쿄부기학교를 마치며 은행 실무를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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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06월 16일, 29세 때, 박중양은 대한제국 관리서 주사로 임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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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02월 00일, 29세 때, 박중양은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본군 고등통역관 대우를 받으며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둥현 등지의 전장에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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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1월 00일, 30세 때, 박중양은 농상공부 주사가 돼 대구로 파견됐고, 1년 동안 머물며 일본인과 관찰사 사이의 마찰을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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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02월 10일, 30세 때, 박중양은 진주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를 맡아 같은 달 20일까지 근무하며 진주성 일부를 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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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01월 00일, 31세 때, 박중양은 대구판관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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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04월 00일, 31세 때, 박중양은 군부 기사 자격으로 일본 관병식 시찰단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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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06월 00일, 32세 때, 박중양은 의친왕 이강의 일본 방문에 통역관으로 동행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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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07월 19일, 32세 때, 박중양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 아래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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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0월 00일, 32세 때, 박중양은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 없이 일본인 거류민단과 일진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구읍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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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0월 00일, 32세 때, 박중양은 대구읍성 철거로 대한제국 내부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비판을 받았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로 징계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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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5월 00일, 33세 때, 박중양은 대구 약령시를 읍성 남문 바깥의 약전골목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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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5월 20일, 33세 때, 박중양은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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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6월 07일, 33세 때, 박중양은 가선대부로 승진해 평안남도 관찰사에 부임했고, 평안남도 재판소 판사와 관립 일어학교 교장, 세무감을 함께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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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7월 00일, 33세 때, 박중양은 고종의 퇴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냈으나 고종은 결국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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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8월 00일, 33세 때, 박중양은 평안남도에서 일어난 의병을 폭도로 규정해 상부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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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00월 00일, 34세 때, 박중양은 본적을 대구 달성군 북면 침산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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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02월 00일, 33세 때, 박중양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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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06월 11일, 34세 때, 박중양은 경상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로 대구에 돌아왔고, 부임 당일 대구객사를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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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08월 00일, 36세 때, 박중양은 충청남도 관찰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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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0월 00일, 36세 때, 박중양은 국권 피탈 뒤에도 자리를 지켜 조선총독부 체제의 충청남도 도장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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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00월 00일, 38세 때, 박중양은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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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00월 00일, 40세 때, 박중양은 충청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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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00월 00일, 41세 때, 박중양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돼 1921년까지 재직했고, 같은 해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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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03월 00일, 40세 때, 박중양은 사생활 문제로 충청남도 도장관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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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05월 00일, 44세 때, 박중양은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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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00월 00일, 45세 때, 박중양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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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04월 06일, 44세 때, 박중양은 3·1운동을 가라앉히려는 목적으로 대구에서 자제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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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04월 20일, 44세 때, 박중양은 대구 지역 3,787가구를 자제단에 가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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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02월 12일, 46세 때, 박중양은 황해도지사에 임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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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00월 00일, 49세 때, 박중양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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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02월 24일, 48세 때, 박중양은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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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03월 07일, 50세 때, 박중양은 1924년 10월 26일 보은 속리사에서 열린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의 술자리에서 여승을 폭행했고 그 여승이 닷새 뒤 숨진 채 발견됐다는 의혹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보도로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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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03월 31일, 50세 때, 박중양은 충청북도지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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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00월 00일, 53세 때, 박중양은 중추원 참의로 다시 임명돼 1939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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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00월 00일, 54세 때, 박중양은 황해도지사에 다시 임명됐고,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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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00월 00일, 57세 때, 박중양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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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00월 00일, 58세 때, 박중양은 서예가 김태석으로부터 두인 문구를 새긴 인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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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00월 00일, 61세 때, 박중양은 조선공로자명감에 식민통치 25년의 최고 공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실렸고,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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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00월 00일, 64세 때, 박중양은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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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1월 00일, 65세 때, 박중양은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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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00월 00일, 66세 때, 박중양은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박충중양으로 이름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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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00월 00일, 67세 때, 박중양은 부여신궁 건립 공사 근로봉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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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00월 00일, 67세 때, 박중양은 중추원 고문에 올라 1943년까지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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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22일, 67세 때, 박중양은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으로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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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00월 00일, 69세 때, 박중양은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연설대에 합류해 경상남도 지역을 맡았고, 싱가포르를 찾아 일본군을 위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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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00월 00일, 69세 때, 박중양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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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01월 00일, 68세 때, 박중양은 국민정신총력연맹 활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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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0월 20일, 69세 때, 박중양은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인 중추원 부의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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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04월 03일, 70세 때, 박중양은 박상준 등과 함께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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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09월 21일, 71세 때, 박중양은 미군정 진주 이후 중추원 부의장 자리에서 파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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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1월 00일, 74세 때, 박중양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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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1월 23일, 74세 때, 박중양은 일제 치하에서 동족을 위해 한 일을 처벌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취지로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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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2월 02일, 74세 때, 박중양은 반민특위 조사를 받은 뒤 일본어로 옛 시절이 그립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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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2월 12일, 74세 때, 박중양은 폐렴 치료를 이유로 보석이 허가돼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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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박중양은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아무런 처벌 없이 최종적으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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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박중양은 대구 오봉산 인근에서 은거하며 이완용을 감싸고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한다고 공공연히 말했고, 회고 글 술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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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0월 00일, 83세 때, 박중양은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의 젊은 시절을 깎아내리는 책자를 보낸 일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검찰은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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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04월 23일, 84세 때, 박중양은 대구 침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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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0월 00일, 사후, 박중양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 명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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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0월 00일, 사후, 박중양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돼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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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0월 00일, 사후, 박중양은 한인 박원근 서명이 든 자신의 유묵 일반시국은이 미술품 경매에 출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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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01일, 사후, 박중양은 유묵 일반시국은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에서 독립운동가 박원근의 작품으로 잘못 소개돼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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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12일, 사후, 박중양은 유묵의 작자를 바로잡는 제보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이 해당 작품을 철수하고 유홍준 관장 명의의 사과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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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9월 07일, 사후, 박중양은 전문가 조사에서 인장 문구와 유학 시기 한인 표기, 이력 기록이 맞아떨어져 문제의 유묵이 자신의 글씨로 판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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