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경력1896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와 도쿄부기학교를 마쳤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 고등통역관으로 종군한 뒤 농상공부 주사,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를 지내며 1906년 정부 허가 없이 대구읍성을 철거했다. 평안남도·경상북도 관찰사를 거쳐 국권 피탈 뒤 충청남도 도장관, 황해도지사, 충청북도지사를 지냈고, 1919년 3·1운동 진압을 위한 대구 자제단을 조직했다. 중추원 참의·고문을 거쳐 1943년 중추원 부의장, 1945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올랐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보석으로 풀려났고 처벌받지 않았다.
핵심 역할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1906), 충청남도 도장관(1910~1915), 충청북도지사(1923~1925),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1943~1945),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1945)
소속조선총독부 중추원, 자제단,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정신총력연맹,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독립협회
업적회고록 『술회』, 『박중양 일기』
대표 업적대구읍성 철거(1906)
대표 저서술회
수상일본 정부 서보장 훈6등(1906)·훈5등(1908)·훈3등(1919)·훈4등(1923)·훈2등(1931), 훈1등(1943),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대례기념장(1915), 쇼와대례기념장(1928),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1935)
소개박중양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한 대한제국·일제강점기 관료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가 되어 1906년 대구읍성을 허물었고, 이후 여러 도의 관찰사와 도지사를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대구에서 자제단을 조직했고, 1943년 조선인 최고위직인 중추원 부의장, 1945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올랐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풀려났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