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3일 화요일

이토 히로부미 : 2026년 10월 14일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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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10월 16일, 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스오국 구마게군 쓰카리촌(현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에서 농민 하야시 주조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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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00월 00일, 4~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파산한 아버지 하야시 주조가 홀로 하기로 옮겨 가 일하게 되는 상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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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00월 00일, 7~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하기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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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00월 00일, 12~13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아버지가 하급 무사 미즈이 부헤에의 양자로 들어가 이토 집안의 아시가루가 되면서 함께 아시가루 신분이 됐고 이토라는 성을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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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00월 00일, 14~1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사가미국 해안 경비 임무에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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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00월 00일, 15~1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구루하라 료조의 소개를 받아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던 사숙 쇼카손주쿠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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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경, 15~1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스승 요시다 쇼인에게서 '俊' 자를 받아 이름을 슌스케(俊輔)로 바꿨고, 이후 같은 음의 슌스케(春輔)로 다시 표기를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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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00월 00일, 16~1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요시다 쇼인의 추천으로 조슈번의 교토 파견단에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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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00월 00일, 17~1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나가사키 해군전습소에서 수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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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00월 00일, 17~1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가쓰라 고고로를 수행하는 종자로 에도의 조슈번 저택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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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00월 00일, 17~1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안세이 대옥으로 처형된 스승 요시다 쇼인의 시신을 거두는 일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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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01월 17일, 1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구루하라 료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 유학을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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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00월 00일, 20~21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나가이 우타를 암살하려는 계획에 가담했으나 계획은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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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00월 00일, 20~21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양이파 동지들과 함께 에도의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는 습격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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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00월 00일, 21~2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야마오 요조와 함께 국학자 하나와 다다토미 암살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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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06월 27일, 21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번이 비밀리에 영국으로 보낸 유학생 다섯 명(조슈 파이브) 가운데 한 명으로 일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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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1월 04일, 2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런던에 도착해 앨릭잰더 윌리엄슨 교수의 집에 머물며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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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00월 00일, 2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 4개국 연합함대가 조슈번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학 약 6개월 만에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서둘러 귀국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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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00월 00일, 22~23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조슈번이 패한 뒤 열린 강화 협상에서 다카스기 신사쿠의 통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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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00월 00일, 22~23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다카스기 신사쿠가 고잔지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가장 먼저 달려가 합류한 인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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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07월 00일, 2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요코하마로 돌아와 일본 땅을 다시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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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00월 00일, 23~2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가쓰라 고고로의 요청을 받아 사쓰마번 및 외국 상인과 무기 구입을 협상하는 일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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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00월 00일, 24~2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우메코와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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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00월 00일, 26~2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히가시쿠제 미치토미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고베 사건과 사카이 사건을 수습하는 데 뛰어들었고, 이를 계기로 메이지 신정부에 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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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경, 26~2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이름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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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02월 00일, 2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신정부에서 외국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직책에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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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07월 12일, 2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효고현 지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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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02월 00일, 2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국가 운영의 기본 방침을 담은 의견서 「국시강목」(효고론)을 정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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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05월 21일, 2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효고현 지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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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00일, 2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재정·화폐 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 금융 기관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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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00월 00일, 29~3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 시찰에 나선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사로 임명돼 미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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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06월 00일, 2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 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일본을 금본위제로 옮기는 신화조례 제정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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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01월 23일, 3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문명개화 의지를 일장기에 빗댄 이른바 '일장기 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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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03월 00일, 31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베를린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알현하고 비스마르크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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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09월 00일, 31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이와쿠라 사절단 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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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10월 25일, 3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참의 겸 공부경에 취임해 산업·공공사업 행정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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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11월 00일, 3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입헌 정체 도입을 위한 조사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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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08월 02일, 3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내무경을 겸임했고 같은 해 11월 28일 그 자리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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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01월 00일, 33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오사카 회의를 주선했고, 이 회의는 점진적 입헌 정치를 약속하는 조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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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11월 02일, 3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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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05월 15일, 3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세상을 떠난 뒤 그 뒤를 이어 내무경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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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09월 00일, 3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 방침에 관한 「교육의」를 천황에게 올렸고, 이는 교육령 공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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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00월 00일, 38~3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앞으로 만들 헌법에 관한 의견서를 메이지 천황에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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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10월 14일, 3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마 시게노부를 정부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메이지 14년 정변을 마무리했고, 헌법 기초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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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00월 00일, 4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베를린에서 법학자 루돌프 폰 그나이스트의 강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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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03월 03일, 4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에 다녀오라는 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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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03월 14일, 4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약 1년 반에 걸친 유럽 헌법 조사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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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08월 00일, 4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빈으로 옮겨 정치경제학자 로렌츠 폰 슈타인에게서 국가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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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09월 29일, 4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으로부터 백색매 대십자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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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08월 00일, 41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 조사를 마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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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00월 00일, 42~43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궁중에 제도취조국을 만들고 그 장관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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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07월 07일, 4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화족령에 따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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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02월 00일, 43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갑신정변의 뒷수습을 위해 청나라에 파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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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04월 18일, 43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청의 리훙장과 톈진 조약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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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12월 22일, 4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 제도가 새로 생기면서 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올랐고 궁내대신을 함께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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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03월 00일, 4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대학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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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06월 00일, 4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가나가와현 나쓰시마에서 헌법 초안 검토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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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09월 17일, 4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외무대신을 임시로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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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04월 30일, 4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에서 물러나 새로 만들어진 추밀원의 초대 의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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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02월 11일, 4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이 기초를 이끈 대일본제국 헌법이 공포되는 식전에서 헌법 문서를 메이지 천황에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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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02월 11일, 4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공포에 맞춰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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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06월 00일, 4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조문 해설서 『헌법의해』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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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10월 30일, 4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 의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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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11월 01일, 4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을 보좌하는 원로 대우를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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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10월 24일, 4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의회 개설과 함께 초대 귀족원 의장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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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06월 01일, 4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 의장에 다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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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07월 21일, 4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귀족원 의장과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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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08월 08일, 5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두 번째 내각을 꾸려 다시 총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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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08월 00일, 5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로서 청일전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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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04월 00일, 53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무쓰 무네미쓰와 함께 청과의 시모노세키 조약에 서명해 청일전쟁을 매듭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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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08월 05일, 53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후작으로 올라 세습 귀족원 의원이 됐고, 같은 날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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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08월 31일, 5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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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01월 12일, 5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세 번째 내각을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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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06월 30일, 5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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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08월 00일, 56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과 청나라를 돌아보는 여정에 나서 11월까지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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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00월 00일, 57~5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제실제도조사국 총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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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00월 00일, 57~5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반포 10주년을 맞아 각지를 돌며 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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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09월 15일, 5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초대 총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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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0월 19일, 5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네 번째 내각을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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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00월 00일, 59~60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의 협상 길을 찾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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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05월 10일, 59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네 번째 총리 임기를 끝내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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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07월 12일, 61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영일동맹을 둘러싼 실망 속에 입헌정우회 총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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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07월 13일, 61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 의장에 다시 임명돼 원로의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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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04월 18일, 62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으로부터 금척대수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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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09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서울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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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0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만나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전하며 압박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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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1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들과 원로대신 심상훈을 자신의 숙소로 불러 조약에 찬성하라고 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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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5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다시 내밀며 체결을 강하게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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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헌병을 거느리고 어전회의장에 들어가 대신들에게 한 명씩 찬반을 따져 물었고, 참정대신 한규설의 반대를 위협으로 누른 뒤 찬성 다섯 명만으로 조약안이 통과됐다고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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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8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새벽에 서명하면서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상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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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22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이동하던 중 원태우가 던진 돌에 기차 유리창이 깨지면서 얼굴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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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2월 21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으로 설치된 한국통감부의 초대 통감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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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01월 09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 고문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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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02월 00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의 일본 공사관을 통감부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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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03월 00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에 부임해 통감 업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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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04월 01일, 64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최고 훈장인 대훈위 국화장경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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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4월 14일, 6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 부임하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지켜야 할 바를 훈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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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6월 00일, 6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는 사태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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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7월 00일, 6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에서 한 연설에서 한국을 병합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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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7월 03일, 6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밀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을 직접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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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7월 20일, 6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물러난 뒤 덕수궁 중화전에서 양위식이 강행되는 국면을 통감으로서 맞았다.
102
1907년 07월 24일, 6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 관저에서 대한제국 측 이완용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었다.
103
1907년 09월 00일, 6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군령 제1호가 공포되면서 내각이 군을 통제하게 하려던 구상이 일부 꺾이는 상황을 맞았다.
104
1907년 09월 21일, 65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공작 작위를 받았다.
105
1908년 00월 00일, 66~6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반포 20주년 연설에서 입헌 정치가 국체를 바꿀 수는 없다고 말했다.
106
1909년 04월 00일, 6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내놓은 한국 병합 방침에 이의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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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04월 18일, 6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황태자 한국 방문 기념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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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06월 14일, 67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통감에서 물러나 다시 추밀원 의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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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6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와 한국 문제를 비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가서, 오전 9시 10분쯤 하얼빈역에 도착한 열차 안에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20분가량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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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6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러시아 의장대 쪽으로 걸어가던 중 대한제국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쏜 총탄 세 발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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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6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총에 맞은 지 약 30분 뒤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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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68세 때,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한 날짜로 종1위에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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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1월 04일, 사후, 이토 히로부미는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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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사후, 이토 히로부미는 도쿄 시나가와구 니시오이의 이토 집안 묘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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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00월 00일, 사후,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 남산 북쪽 기슭에 자신을 기리는 사찰 박문사가 세워지는 대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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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00월 00일, 사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1000엔권 지폐의 초상 인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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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0월 00일, 사후, 이토 히로부미는 생전에 빌려 간 규장각 도서 1,205권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반환되는 대상이 됐다.

이토 히로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