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3일 화요일
김옥균 : 2026년 10월 13일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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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02월 23일, 0세 때, 김옥균은 충청도 공주/아산에서 생부 김병태와 은진 송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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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경 · 4세 무렵, 김옥균은 가족을 따라 천안으로 옮겨 생부가 운영하던 서당에서 글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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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경 · 6세 무렵, 김옥균은 아들을 잃은 5촌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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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00월 00일, 10세 때, 김옥균은 양부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부임하자 함께 강릉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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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경 · 10세 무렵, 김옥균은 강릉의 송담서원 등에서 율곡 이이의 학풍을 접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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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경 · 15세 무렵, 김옥균은 양부가 중앙 관직을 맡게 되면서 함께 한성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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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00월 00일, 19세 때, 김옥균은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 개화사상에 눈뜬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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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00월 00일, 21세 때, 김옥균은 알성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며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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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김옥균은 급제 뒤 성균관 전적에 임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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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00월 00일, 25세 때, 김옥균은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뒤 개화 성향의 젊은 관료들과 비밀 결사 충의계를 꾸리는 일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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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김옥균은 홍영식·서광범·박영효 등과 손잡고 개화당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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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00월 00일, 28세 때, 김옥균은 승려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그곳의 근대화 실태를 살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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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12월 00일, 30세 때, 김옥균은 자금을 직접 마련해 일본 시찰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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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03월 00일, 31세 때, 김옥균은 도쿄에 닿아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서 넉 달가량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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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07월 00일, 31세 때, 김옥균은 시모노세키에서 임오군란 발발 소식을 듣고 급히 조선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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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김옥균은 승정원 우부승지, 이조참의, 외아문 협판 등의 관직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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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07월 00일, 31세 때, 김옥균은 첫 일본 방문에서 보고 들은 바를 정리해 『기화근사』를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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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10월 00일, 31세 때, 김옥균은 수신사 박영효 일행에 합류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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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03월 00일, 32세 때, 김옥균은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에 임명돼 사실상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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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06월 00일, 32세 때, 김옥균은 고종의 위임장을 들고 일본으로 가 이노우에 가오루를 상대로 300만 원 차관 도입을 교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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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00월 00일, 33세 때, 김옥균은 차관 교섭이 끝내 무산되자 성과 없이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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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00월 00일, 33세 때, 김옥균은 서광범·박영효·서재필 등과 정변을 모의하기 시작했으나, 청군 철수 조짐을 보고 당장 일어서자는 주장에는 박영효와 함께 시기를 더 보자며 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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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0월 30일, 33세 때, 김옥균은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서울로 귀임해 개화파에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상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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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1월 04일, 33세 때, 김옥균은 박영효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서 일본공사관 시마무라 서기관으로부터 일본군 1개 중대 150명이면 청군을 쫓아내기 어렵지 않다는 말을 서광범과 함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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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1월 16일, 33세 때, 김옥균은 다케조에 공사가 정변이 일어나면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뜻을 일본 본국에 보고하는 상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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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1월 29일, 33세 때, 김옥균은 거사를 닷새 앞두고 고종과 단독으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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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3일, 33세 때, 김옥균은 동지들과 거사 계획을 다시 확인하고 연회장 좌석 배치를 점검했으며, 출입구 앞뒤에 개화파 병력을 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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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4일, 33세 때, 김옥균은 홍영식이 총판을 맡은 우정총국의 개국 축하연에 참석했고, 연회는 저녁 7시에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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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4일, 33세 때, 김옥균은 우정총국 낙성 축하연을 틈타 개화파 동지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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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4일, 33세 때, 김옥균은 밤 10시께 일어난 화재 소동을 신호로 거사에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서재창이 지휘한 병사들이 민영익의 얼굴과 목에 칼을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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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4일, 33세 때, 김옥균은 궐 안 곳곳에서 화약이 터지는 가운데 청군이 쳐들어왔다고 고종에게 거짓으로 아뢰고 왕을 경우궁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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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4일, 33세 때, 김옥균은 고종에게 일본공사의 호위를 청하는 친서를 요구해 흰 천에 쓴 친서를 받아냈고, 이에 따라 출동한 다케조에 공사의 일본군이 경우궁을 둘러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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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4일, 33세 때, 김옥균은 개화파를 꾸짖던 내시 유재현을 수하 장정을 시켜 때려 숨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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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4일, 33세 때, 김옥균은 밤 11시께 동지들과 왕명을 내세워 대신들을 불러들였고, 입시한 윤태준·한규직·이조연에 이어 민영목·민태호·조영하가 창덕궁 궐문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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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5일, 33세 때, 김옥균은 자정 무렵 동지들과 종친 이재선을 궁으로 불러 연합 정부를 꾸리자고 제안하고, 각국 공사관에 정변을 알리며 지지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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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5일, 33세 때, 김옥균은 청군에 도움을 청한 왕비가 창덕궁 환궁을 요구하자 궁이 넓어 적은 병력으로는 지켜 내기 어렵다며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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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5일, 33세 때, 김옥균은 고종 내외가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으로 옮긴 뒤에도 환궁 요구가 이어지고 다케조에 공사가 청군도 막아 낼 수 있다고 장담하자 결국 오후 5시 창덕궁 환궁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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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5일, 33세 때, 김옥균은 저녁 진선문 안에 승정원을 차리고 비상회의를 이끌며 개혁안을 최종 조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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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5일, 33세 때, 김옥균은 새로 꾸린 정부에서 호조참판을 맡아 나라 재정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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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6일, 33세 때, 김옥균은 새벽에 동지들과 청에 대한 종속 청산, 문벌 폐지, 지조법 개혁, 탐관오리 처벌, 재정의 호조 일원화 등을 담은 14개조 정강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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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김옥균은 정변의 경과와 14개조 정강을 담은 『갑신일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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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6일, 33세 때, 김옥균은 오후 3시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 1,500명이 창덕궁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정변이 사흘 만에 무너지는 상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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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6일, 33세 때, 김옥균은 정변을 함께 이끈 홍영식과 박영교가 청군과 맞서다 목숨을 잃는 상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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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6일, 33세 때, 김옥균은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공사관을 거쳐 인천으로 빠져나가 일본 배 지토세마루에 올라 망명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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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06일, 33세 때, 김옥균은 지토세마루 선원 쓰지 도주로가 지어 준 이와타 슈사쿠라는 일본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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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김옥균은 정변 실패의 연좌로 생부 김병태가 천안 감영에서, 동생 김각균이 대구 감영에서 옥사하고, 생모와 누이는 독약을 마셔 숨지고, 아내 유씨는 딸과 함께 옥천의 관노로 끌려가는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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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13일, 33세 때,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해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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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13일, 33세 때, 김옥균은 나가사키에 이어 도쿄로 옮겨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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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김옥균은 망명지 일본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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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06월 00일, 34세 때, 김옥균은 자신을 노리는 자객 장은규가 일본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하는 상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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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00월 00일, 35세 때, 김옥균은 일본에 건너온 지운영이 자신을 해치려는 자객임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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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08월 00일, 35세 때,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조치로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에 유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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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08월 00일, 37세 때, 김옥균은 홋카이도로 옮겨져 삿포로 등지에서 연금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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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04월 00일, 39세 때, 김옥균은 연금에서 풀려나 도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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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00월 00일, 42세 때, 김옥균은 자신과 박영효를 제거하려는 홍종우가 일본에 건너오는 상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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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03월 00일, 43세 때, 김옥균은 리훙장·리징팡 부자를 만나자는 초청에 응해 상하이로 향했고, 떠나기에 앞서 자신의 일기를 고야마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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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03월 28일, 43세 때, 김옥균은 상하이의 호텔 동화양행에서 함께 간 홍종우가 쏜 권총에 맞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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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04월 12일, 사후, 김옥균은 청 정부가 군함 함정호에 실어 보낸 시신으로 인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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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04월 12일, 사후, 김옥균은 고종의 명으로 양화진 백사장에서 시신이 능지처참되고, 머리는 죽산에, 손발은 경상도와 함경도에 내걸리는 등 역적의 본보기로 전국에 효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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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사후, 김옥균은 시신 처리 방식을 두고 일본 정부가 공식 항의하는 대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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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사후, 김옥균은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추도 행사를 열고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묘비가 세워지면서 기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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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사후, 김옥균은 도쿄 신조지에 유발과 옷가지 일부를 모신 묘비를 하나 더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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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00월 00일, 사후, 김옥균은 갑오개혁으로 들어선 개화파 정부에서 서광범과 김홍집의 상소에 따라 사면되고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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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00월 00일, 사후, 김옥균은 충달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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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0월 00일, 사후, 김옥균은 도쿄도가 아오야마 묘지의 묘에 철거 통고를 하자 주일 한국대사관이 관리료를 대신 내 묘를 지키는 상황을 맞았다.

김옥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