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시 노부스케
프로필로 돌아가기 →전갈자리원숭이띠庚 경금금(金)
전통 명리·점성술의 일반 설명
경금(庚金) · 원석·바위·무쇠다듬어지기 전의 무쇠와 바위에 비유된다.
전갈자리 · 10.23~11.21강한 집중력과 집요함, 본질을 파고드는 통찰이 흔히 언급되는 특징이다.
원숭이띠재치와 영리함, 손재주와 문제 해결력이 흔히 언급되는 특징이다.
금(金) · 쇠·결실가르고 마무리하는 힘, 결단과 원칙, 의(義)의 기운으로 설명된다.
아래 설명은 전통 명리학·점성술에서 각 기호에 흔히 붙는 일반적 설명입니다. 개인의 성격이나 미래를 판정하는 근거가 아니며, 라이프러리는 이를 사실 데이터와 분리해 "해석"으로만 다룹니다.
丙申
연주
己亥
월주
庚午
일주
—
시주 (미계산)
대운(大運) · 순행
庚子
9세~
辛丑
19세~
壬寅
29세~
癸卯
39세~
甲辰
49세~
乙巳
59세~
丙午
69세~
丁未
79세~
戊申
89세~
대운(大運)은 명리학에서 10년 단위로 바뀌는 흐름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라이프러리는 이를 예측이 아니라 "그 10년을 전통 명리학이 어떤 시기로 설명하는가"와 "실제 라이프 카운트에 무엇이 기록돼 있는가"를 나란히 놓는 용도로만 씁니다.
출생시각 미확인 — 시주(時柱)는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삼주 기준입니다.
40대
1939己卯
- 1939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상공차관으로 임명되었다.
- 1939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상공대신 코바야시 이치조와 갈등을 빚었다.
- 1939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기획원 사건의 책임을 지고 상공차관직에서 물러났다.
1941辛巳
- 1941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으로 취임했다.
1942壬午
- 1942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중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했다.
1943癸未
- 1943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도조 히데키가 상공성을 폐지하고 군수성을 신설하며 자신이 군수대신이 되고 기시를 군수차관으로 임명하자 이에 불만을 품으며 도조 히데키와 관계가 틀어졌다.
1944甲申
- 1944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사이판 함락 후 내각 개편을 추진하던 도조 히데키에게 "짜르려면 너도 같이 물러나야지"라며 물귀신 작전을 펼쳐 결국 내각 총사퇴를 이끌어냈다.
50대
1952壬辰
- 1952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공직추방 조치가 풀리자 정계로 복귀하여 자주헌법 제정, 자주군비 확립, 자주외교 전개를 슬로건으로 일본재건연합을 결성했다.
1953癸巳
- 1953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중의원 선거에 임했으나 일본재건연합이 대패하는 실패를 겪었다.
- 1953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사회당에 입당하려 했으나, 사회당으로부터 보수주의자라는 이유로 입당을 거부당했다.
- 1953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사회당의 거절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자유당 후보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1954甲午
- 1954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경무장 및 대미협조 정책이 자신의 의사와 맞지 않자 이에 반발했다.
- 1954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요시다 총리와의 갈등으로 인해 자유당에서 출당되었다.
- 1954년 11월,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하토야마 이치로와 함께 일본 민주당을 조직했다.
60대
1956丙申
- 1956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했으나 이시바시 단잔에게 7표 차이로 패배했다.
- 1956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이시바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1958戊戌
- 1958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287석을 확보하며 과반 의석을 달성하게 했다.
- 1958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 과정에서 주일미군 재판권 포기 밀약 사건이 터지며 자신의 자주외교 노선과 모순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 1958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미국의 공식적인 재판권 포기 천명 요구를 국내 여론 악화를 이유로 거절했다.
- 1958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한국에 야츠기 가즈오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과오에 대한 유감과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1960庚子
- 1960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미일 안보신조약을 체결했다.
- 1960년 5월 29일,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사회당 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한 채로 국회 본회의장에서 미일 안보신조약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 1960년 6월,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경호를 명분으로 극우 행동대와 야쿠자들을 동원해 반정부 투쟁을 제압하려 했다.
- 1960년 6월 15일,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가 동원한 야쿠자가 시위대를 공격해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국회 내 충돌 과정에서 도쿄대생 간바 미치코가 압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1960년 6월,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시위대가 자택을 포위하자 "나에게는 소리없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발언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시도했다.
1963癸卯
- 1963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자신의 지역구인 야마구치 제1구를 사위 아베 신타로에게 넘겨주었으나 아베 신타로가 낙선하는 결과를 맞았다.
70대
1967丁未
- 1967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동생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후지모토 만지로를 영입해 아베 신타로의 후원회장을 맡게 함으로써 아베 신타로를 당선시켰다.
1969己酉
- 1969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측근 비서(훗날의 모리 요시로)의 지원 요청에 응답하여 당선을 도왔다.
1970庚戌
- 1970년 6월 18일,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한일 수교의 공로를 인정받아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수교훈장 1등급인 '광화대장'을 수여받았다.
1972壬子
- 1972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사토 에이사쿠 총리 퇴임 후 헌법 개정을 목표로 총리 복귀를 노렸다.
80대
1979己未
- 1979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중의원 해산을 계기로 정계를 은퇴하고 보수 논객으로 활동했다.
1984甲子
- 1984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통일교 회의장에 나타나 통일교의 교세 확장을 지원했다.
90대
1987丁卯
- 1987년, [나이불명] 때, 기시 노부스케는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