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1398년(태조 7) 음력 6월 13일 전 좌사의대부로서 고향 진주목 강성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태조실록 졸기, 향년 70세·세는나이). 양력으로는 1398년 7월 26일이다. 증손 문치창의 기록을 근거로 한 1400년 사망설도 있다.
국적한국(고려)
출생지경상남도 산청군
직업문신·학자
주요 경력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해 김해부 사록으로 관직을 시작했고 순유박사·사간원 좌정언을 지냈다. 1363년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 옹립 사건에 연루돼 관직을 잃었고, 귀국길에 목화씨를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해 전국에 퍼뜨렸다. 1375년(우왕 1) 목면 보급의 공으로 전의주부에 기용됐고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등을 지냈으나, 1389년 이성계 세력의 전제 개혁에 반대하다 조준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조선 건국 뒤에는 출사하지 않고 산청에서 지내다 1398년 세상을 떠났다.
수상참지의정부사·강성군 추증(태종 때, 사후), 영의정부사 추증·부민후 추봉(1440, 사후), 시호 충선(忠宣)
소개문익점은 고려 말 경상도 진주목 강성현(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나 이곡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360년 문과에 급제했다. 1363년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목화씨를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했고, 정천익이 원나라 승려 홍원에게서 실 뽑기·베 짜기 기술을 익히면서 무명이 10년이 안 돼 전국으로 퍼졌다. 우왕 때 그 공으로 다시 기용돼 좌사의대부에 이르렀으나 이성계 세력의 전제 개혁에 반대하다 탄핵을 받아 물러났고, 조선 건국 뒤에는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출사하지 않았다. 1440년 부민후에 추봉되고 충선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산청 목면시배 유지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