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프로필로 돌아가기 →사수자리뱀띠辛 신금금(金)
전통 명리·점성술의 일반 설명
신금(辛金) · 보석·바늘·다듬어진 금속세공을 마친 보석과 날카로운 바늘에 비유된다.
사수자리 · 11.22~12.21모험심과 낙관적인 태도, 먼 곳과 큰 뜻을 향한 갈망이 흔히 언급되는 특징이다.
뱀띠지혜와 통찰, 조용히 때를 살피는 인내가 흔히 언급되는 특징이다.
금(金) · 쇠·결실가르고 마무리하는 힘, 결단과 원칙, 의(義)의 기운으로 설명된다.
아래 설명은 전통 명리학·점성술에서 각 기호에 흔히 붙는 일반적 설명입니다. 개인의 성격이나 미래를 판정하는 근거가 아니며, 라이프러리는 이를 사실 데이터와 분리해 "해석"으로만 다룹니다.
辛巳
연주
庚子
월주
辛丑
일주
—
시주 (미계산)
대운(大運) · 역행
己亥
5세~
戊戌
15세~
丁酉
25세~
丙申
35세~
乙未
45세~
甲午
55세~
癸巳
65세~
壬辰
75세~
辛卯
85세~
대운(大運)은 명리학에서 10년 단위로 바뀌는 흐름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라이프러리는 이를 예측이 아니라 "그 10년을 전통 명리학이 어떤 시기로 설명하는가"와 "실제 라이프 카운트에 무엇이 기록돼 있는가"를 나란히 놓는 용도로만 씁니다.
출생시각 미확인 — 시주(時柱)는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삼주 기준입니다.
10대
1935乙亥
- 1935년, [날짜불명], 이명박의 아버지 이충우(李忠雨)는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9己卯
- 1939년, [날짜불명], 이명박의 아버지 이충우(李忠雨)는 본명이었던 이덕쇠를 이충우로 개명하였다.
1940庚辰
- 1940년, [날짜불명], 이명박의 조부 이종한(李鐘漢)이 쓰키야마 씨(月山氏)로 창씨하여 이명박의 창씨개명 이름은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가 되었다.
1941辛巳
- 1941년 12월 19일, 0세 때, 이명박은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이충우(李忠雨)와 채태원 사이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 1941년 12월 19일, 0세 때, 이명박은 흥해 덕실마을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이충우와 대구 반야월 출신 어머니 채태원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오사카시 히라노구의 조선인 빈민촌에서 태어났다.
- 1941년 12월 19일, 0세 때, 이명박은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뒤 형제들의 돌림자 '상(相)' 대신 '명박(明博)'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족보에는 돌림자에 맞춘 이상정(李相定)으로 올랐다.
1945乙酉
- 1945년, 4세 때, 이명박은 광복과 함께 가족과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읍 덕성리 덕실마을에 정착했다.
- 1945년 11월 00일, 3세 때, 이명박은 광복 후 시모노세키항에서 정원을 훨씬 넘긴 목조 귀국선에 가족과 함께 올랐다가 대마도 앞바다에서 배가 좌초해 가라앉는 사고를 겪었고, 가족은 모두 살아남았으나 일본에서 10여 년간 모은 재산을 모두 잃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7丁亥
- 1947년경, 6세 때, 이명박은 가족과 함께 약 2년 거주 후 포항읍내로 이사했다.
- 1947년 00월 00일, 5세 때, 이명박은 가족과 함께 포항읍내로 옮겨 살았고, 이 시기 아버지는 목장 일을, 어머니는 과일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1950庚寅
- 1950년경, 9세 때, 이명박은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한국 전쟁이 터져 미군의 폭격으로 바로 위의 누나와 귀국후 태어난 막내 남동생을 잃었다.
- 1950년9세 때, 대, 10대 전반, 이명박은 전쟁통에 단칸방에서 모든 식구가 자며 하루 두 끼를 술지게미로 때우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 1950년9세 때, 대, 10대 전반, 이명박은 친구들에게 술 냄새를 풍긴다며 구박받는 경험을 했다.
- 1950년9세 때, 대, 10대 전반, 이명박은 어렸지만 성냥, 김밥, 밀가루떡을 팔아 살림을 도왔다.
- 1950년9세 때, 대 중반, 10대 중반, 이명박은 포항중학교 시절에 전교 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수재 소리를 들었다.
1957丁酉
- 1957년 00월 00일, 15세 때, 이명박은 포항중학교를 전교 2등으로 마쳤지만 형의 학비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국화빵을 팔던 중,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 여러 차례 어머니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낮에는 일하고 수석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들어갔다.
1960庚子
- 1960년, 19세 때, 이명박은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합숙소에 들어가 일당노동자 생활을 했다.
- 1960년, 19세 때, 이명박은 대학중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대입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 1960년, 19세 때, 이명박은 낮에는 일당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합숙소에서 '불 좀 끄라'는 원성을 들으며 공부했다.
- 1960년 00월 00일, 18세 때, 이명박은 동지상고를 1등으로 마친 뒤 부모의 부름을 받고 상경해 이태원 빈민촌 벌집의 방 한 칸에서 가족과 지내며 청계천 6가 인력시장을 오가는 일용직 노동을 시작했다.
20대
1961辛丑
- 1961년, 20세 때, 이명박은 고려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 1961년, 20세 때, 이명박은 이웃들의 도움으로 이태원 시장에서 환경미화원 자리를 구해 학비를 벌면서 학교를 다녔다.
- 1961년 03월 00일, 19세 때, 이명박은 시험 사흘 전 앓아누운 몸으로 치른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 입시에 합격했고, 함께 응시해 떨어진 친구 김창대에게서 합격 소식을 들었다.
- 1961년 03월 00일, 19세 때, 이명박은 한 학기 이상 다녀야 학적이 생긴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등록금 마련에 막막해하던 중, 어머니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입학금을 모아 주고 새벽 4시부터 시장 청소 일을 맡겨 주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1962壬寅
- 1962년, 21세 때, 이명박은 새벽 4시면 이태원 시장에 나가 쓰레기를 모아 리어카에 싣고 서너 번씩 반포대교 인근까지 오가는 힘든 생활을 반복했다.
1963癸卯
- 1963년, 22세 때, 이명박은 힘겨운 현실을 탈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2학년 1학기 때 군 입대를 결심했다.
- 1963년, 22세 때, 이명박은 논산훈련소 건강검진에서 기관지확장증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아 쫓겨나왔다.
- 1963년 00월 00일, 21세 때, 이명박은 3학년 때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려고 상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나서 물량 공세를 펴던 유력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 1963년 00월 00일, 21세 때, 이명박은 3학년 여름 잦은 기침과 열병을 치료받을 길이 없자 군 병원 치료를 기대하며 자원입대했으나, 논산훈련소에서 기관지 확장증과 악성 축농증 진단을 받고 불합격 처리돼 돌아왔다.
1964甲辰
-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복학 후 3학년 때 상과대 학생회장에 선출됐다.
-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졸업을 앞두고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였다.
-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강행되자 6.3 시위 중 수배돼 계엄령 하에 도피 생활로 들어갔다.
-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수배 당시 이명백으로 잘못 필기한 오타로 순간 위기를 모면하였다.
-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신문에 수배 공고가 나고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자수하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나기까지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했다.
1965乙巳
-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은 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박정희에게 부당한 취직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은 이낙선 청와대 민정담당 비서관의 조치로 현대건설에 이명박의 과거를 문제 삼지 말도록 하는 도움을 받았다.
-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면접에서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답했다.
-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경리과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이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의 주요 내용은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될 것이다."였다.
1967丁未
- 1967년, 26세 때, 이명박은 입사 2년 차에 대리로 승진했다.
1968戊申
- 1968년 03월 00일, 26세 때, 이명박은 태국에서 귀국한 뒤 대졸 직원들이 기피하던 서빙고동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발령받았고, 최신 장비 경험이 있는 자신을 경부고속도로 장비 관리의 적임자로 본 정주영 사장의 의도였음을 나중에 알게 됐다.
1969己酉
- 1969년 00월 00일, 27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부장으로 승진했다.
1970庚戌
- 1970년, 29세 때, 이명박은 이사로 승진했다.
- 1970년 12월 19일, 29세 때, 이명박은 6살 연하의 김윤옥과 결혼했다.
- 1970년 00월 00일, 28세 때, 이명박은 중매 제안이 쏟아지던 가운데 고교 시절 영어 선생님의 소개로 청렴한 공직자 집안의 딸 김윤옥을 만났다.
- 1970년 07월 07일, 28세 때, 이명박은 자신이 장비 정비를 맡았던 경부고속도로가 대전-대구 구간 개통으로 완공되는 결과를 맞았다.
- 1970년 12월 19일, 29세 때, 이명박은 결혼을 결심한 뒤 밤늦게 김윤옥과 퇴계원 교회 묘지에 임시로 모신 어머니 묘를 찾아 막내며느리 될 사람을 데려왔다고 고했고, 세례를 받은 김윤옥과 자신의 생일에 결혼했다.
30대
1971辛亥
- 1971년 00월 00일, 29세 때, 이명박은 입사 5년 만에 현대건설 이사로 승진해 기사 딸린 승용차를 배정받았다.
1972壬子
- 1972년 00월 00일, 30세 때, 이명박은 상무로 있던 중 중기사업소 관리부장 시절 지은 트럭 조립용 차고 7개 동이 무허가였다는 혐의로 검찰 소환장을 받았고, 정주영 회장이 보낸 링컨 콘티넨털을 타고 몇 달간 몸을 피했다.
- 1972년 06월 19일, 30세 때, 이명박은 본사 연락을 받고 검찰에 출석해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고, 이후 자동차사업부 책임자들이 나서면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 1972년 08월 03일, 30세 때, 이명박은 박정희 대통령의 8·3 사채동결 조치로 고리 사채에 짓눌리던 현대건설의 자금 위기가 풀리는 상황을 맞았다.
1973癸丑
- 1973년 00월 00일, 31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전무로 올라섰다.
1974甲寅
- 1974년 00월 00일, 32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부사장에 올랐다.
- 1974년 00월 00일, 32세 때, 이명박은 오일쇼크로 건설업계가 흔들리자 정주영 회장과 함께 오일달러가 몰린 중동 진출을 택했고, 현대건설은 800만 달러 규모의 이란 반다르 아바스 조선소 훈련원 공사를 따내 첫 교두보를 마련했다.
1975乙卯
- 1975년 00월 00일, 33세 때, 이명박은 1억5000만 달러 규모의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 입찰을 두고 정인영 해외담당 사장이 극력 반대하는 자리에서 정주영의 질문을 받자, 중동이 낯선 것은 서구 경쟁사도 마찬가지이고 울산 조선소 경험이 있다며 진출에 찬성했다.
- 1975년 10월 00일, 33세 때, 이명박은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 착공을 맞았다.
1976丙辰
- 1976년 00월 00일, 34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이 다른 업체 최저가의 절반인 10억 달러로 당시 단일 토목공사 세계 최대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고 선수금 3억 달러를 받는 결과를 함께 이끌었다.
- 1976년 00월 00일, 34세 때, 이명박은 정인영 사장과 그를 따르는 인사들이 현대건설을 떠나고 외부 영입 사장 조성근도 물러나면서 경영진 공백이 생기는 상황을 맞았다.
1977丁巳
- 1977년, 36세 때, 이명박은 입사 12년 만에 37세 나이로 현대건설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 1977년, 36세 때,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나이가 35세일 때 현대건설 사장이 되었다는 점으로 수정되었다.
- 1977년 01월 00일, 35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 회장의 사장 제의에 선배 이춘림 부사장을 추천했으나 거듭된 요청에 공동대표를 조건으로 받아들여, 정초 이사회에서 입사 12년 만에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고 이춘림이 중동 주재로 나가면서 회사 관리·운영을 맡았다.
- 1977년 10월 00일, 35세 때, 이명박은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를 공기보다 앞당겨 완공했다.
1979己未
- 1979년 03월 11일, 37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이 지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개통식을 맞았다.
- 1979년 10월 00일, 37세 때, 이명박은 청와대 경호실 호출로 세종문화회관에 갔다가 6·3 시위 주동자 자격으로 부마사태 학생들을 깎아내리는 원고를 받았고,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는 답을 들은 채 청와대에 들어갔다.
- 1979년 10월 26일, 37세 때, 이명박은 며칠 전 만났던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숨지는 상황을 맞았다.
1980庚申
- 1980년 00월 00일, 38세 때, 이명박은 신군부가 현대자동차를 대우자동차에 넘기는 통폐합 서류에 날인하라고 요구하자 정주영 회장에게서 인감도장을 넘겨받아 국보위 취조실에 들어갔고, 이틀 밤낮 통폐합의 부당함을 따지며 버티다 도장을 서류 위에 올려놓고 직접은 못 찍겠으니 당신들이 찍으라고 밀어 상급 장교가 날인을 막는 상황을 만들어 도장을 찍지 않고 돌아왔다.
- 1980년 11월 00일, 38세 때, 이명박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 준공식에 참석했다.
40대
1981辛酉
- 1981년 00월 00일, 39세 때, 이명박은 아버지 이충우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 곁에 안장하는 일을 겪었고, 추도 예배는 아버지의 말년 친구였던 개척교회 젊은 목사에게 맡겼다.
1982壬戌
- 1982년 04월 12일, 40세 때, 이명박은 페낭대교 기공식을 이틀 앞두고 말레이시아 총리실이 귀빈석 천막만 걷어 달라고 요구하자 일반석까지 모두 천막을 치기로 하고, 행사장을 네 구역으로 나눠 업체들을 동시에 투입해 기한 안에 설치를 마쳤다.
1985乙丑
- 1985년 00월 00일, 43세 때, 이명박은 완공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다리였던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건설을 마무리했다.
1988戊辰
- 1988년, 47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회장에 올랐다.
- 1988년 00월 00일, 46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이 겸하던 현대건설 회장 자리를 넘겨받아 회장에 올랐다.
- 1988년 00월 00일, 46세 때, 이명박은 회장 승진 직후 기업인으로서 마지막 과제로 북방 진출을 택해 일본 닛쇼이와이 관계자를 통해 소련 초청을 주선한 뒤, 망설이던 정주영에게 한소 수교까지 앞당길 수 있다며 소련 방문을 설득했다.
1989己巳
- 1989년, 48세 때,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KBS 2TV에서 《야망의 세월》이란 제목으로 드라마화 되었다.
- 1989년 01월 07일, 47세 때, 이명박은 안기부 반공 교육과 경제 활동만 하겠다는 서약을 거쳐 정주영과 함께 도쿄를 경유해 모스크바에 도착하며 한국 기업인 최초로 소련을 공식 방문했다.
- 1989년 01월 11일, 47세 때, 이명박은 소련 상공회의소와 한소경제협력위원회 설치 합의서에 서명해 한국과 소련 사이의 첫 공식 문서를 만들었다.
1990庚午
- 1990년, 49세 때, 이명박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라크에서 건설공사를 대거 수주해놓았던 현대건설의 위기 상황에서 정주영의 지시로 유럽 각지로 자금 확보에 나섰다.
- 1990년, 49세 때, 이명박은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빈 모하맛 총리, 중국의 장쩌민 주석, 구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CEO로서 국제적인 감각을 폭 넓게 익혔다.
- 1990년, 49세 때, 이명박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페낭대교(연륙교)를 건설했다.
- 1990년, 49세 때, 이명박은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투혼을 보였다.
- 1990년 00월 00일, 48세 때, 이명박은 나연숙 작가와 배우 유인촌, KBS PD가 회장실로 찾아와 샐러리맨 출신인 자신을 주인공으로 현대를 다룬 드라마를 만들겠다며 자료를 요청하자 총수가 있는데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며 거절했다.
50대
1991辛未
- 1991년 09월 26일, 49세 때, 이명박은 방송위원회가 특정 기업인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며 '야망의 세월'을 방영한 KBS에 시청자 사과 명령을 통보하는 상황을 맞았다.
- 1991년 10월 20일, 49세 때, 이명박은 '야망의 세월'이 종영하는 것을 지켜봤고, 종영 뒤 나연숙 작가에게서 원래는 주인공이 여의도 광장의 100만 군중 앞에서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는 결말을 구상했다는 말을 들었다.
- 1991년 11월 00일, 49세 때, 이명박은 1361억 원 세금 추징에 격분한 정주영 회장에게서 세금 대신 그 돈으로 정치를 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받고, 재벌 총수의 정치 참여가 온당한지 모르겠다며 신중히 생각해 달라고 만류했다.
- 1991년 12월 00일, 49~50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 회장에게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이명박은 국무총리를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재벌 총수가 정치를 하면 정치와 경제가 한 몸이 되고 정치는 5년이지만 경제 공헌은 평생 할 수 있다며 정면으로 반대했다.
- 1991년 12월 00일, 49~50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 회장에게서 연말까지 함께 정치를 할지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이유는 재벌 총수가 정치 권력을 쥐면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해 신당에 합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2壬申
- 1992년 초, 51세 때, 이명박이 현대를 그만둔 후 현대건설은 1차 부도 위기에 몰렸다.
- 1992년 1월, 50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현대를 떠났다.
- 1992년 3월 24일, 50세 때, 이명박은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 1992년 01월 01일, 50세 때, 이명박은 서귀포 바닷가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본 뒤 가족에게 회사를 떠나겠다고 알렸고, 아내에게서 그 결정을 믿고 따르겠다는 답을 들었다.
- 1992년 01월 03일, 50세 때, 이명박은 현대그룹 사장단 신년 하례식에 마지막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정주영 회장이 자신과 이명박 회장, 이내흔 부사장이 정치에 참여하며 퇴사한다고 선언하는 상황을 맞았고, 이후 홀로 정주영의 사무실을 찾아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인사한 뒤 현대를 떠났다.
1993癸酉
- 1993년 00월 00일, 51세 때, 이명박은 대선 패배와 검찰 수사 끝에 몸져누운 정주영을 청운동 자택으로 찾아갔고, 소련에 한 번 더 가자는 그의 말에 건강을 되찾으면 모시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 1993년 00월 00일, 51세 때, 이명박은 SBS 주병진쇼에 출연해 북한을 거쳐 야쿠티아 가스를 들여오는 구상을 설명했다.
1994甲戌
- 1994년 07월 06일, 52세 때, 이명박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정경유착의 원인은 전경련이 아니라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며 전경련 해체에 반대하고, 대기업 계열사들이 개별 기업 단위로 경쟁하게 하는 해법과 중소기업의 공정 경쟁 여건 마련을 주장했다.
- 1994년 07월 06일, 52세 때, 이명박은 같은 대정부질문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경쟁력을 잃은 중소기업 500여 곳을 북한에 진출시키고 남북공동국토개발위원회를 설치하자는 남북경협 방안을 제안했다.
1995乙亥
- 1995년, 54세 때, 이명박은 대정부질문에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미국 로스앤젤레스 간의 해상운송비보다 비싸다고 지적하며 500km 길이의 경부운하 건설을 정부에 제안했다.
- 1995년, 54세 때, 이명박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경선에 나왔지만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했다.
- 1995년 00월 00일, 53세 때, 이명박은 이종찬의 탈당으로 비어 있던 민자당 종로 지구당위원장을 전국구 의원 관례에 따라 맡았다.
- 1995년 00월 00일, 53세 때, 이명박은 첫 민선 서울시장 후보 경선 공고에 홀로 지원했고, 김영삼 대통령이 정원식 전 총리를 내정했다며 이원종 정무수석과 이세기 서울시지부 위원장이 사퇴를 요구하자 경선을 취소하든지 치르든지 하라며 거부했다.
- 1995년 00월 00일, 53세 때, 이명박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청와대 조찬 독대에서 경선을 접으면 정부에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대통령 임기 중에는 공직을 맡지 않겠다며 거절했고, 민주화 운동을 이끈 대통령답게 경선을 치르게 해 달라고 요구해 결국 경선을 관철했다.
1996丙子
- 1996년, 55세 때, 이명박 진영의 6급비서였던 김유찬이 기자회견을 열어 이명박 캠프의 선거비용이 법정비용을 초과했다고 폭로했다.
- 1996년, 55세 때, 이명박은 김유찬이 말을 바꿔 폭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서신을 쓰고 해외로 도피하는 상황을 경험했다.
- 1996년 4월 11일, 54세 때, 이명박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역구에 출마해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통합민주당 노무현, 자유민주연합 김을동 등을 제치고 당선됐다.
- 1996년 02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직후 김영삼 대통령에게서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여당 체면은 세울 수 있으니 종로에 출마하라는 말을 듣고, 연고도 승산도 없다고 여기면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 1996년 03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자신의 선거운동원들이 상대인 이종찬 후보에게 몰려가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300여 명을 모두 불러 다음은 없으니 이번 당선을 위해 뛸 생각이 없으면 떠나라고 못 박은 뒤, 핵심 운동원 10명으로 별도 조직을 꾸렸다.
1997丁丑
- 1997년 9월, 55세 때, 이명박은 1심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 1997년 09월 00일, 55세 때, 이명박은 선거법 위반 1심에서 벌금 700만 원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1998戊寅
- 1998년, 57세 때, 이명박은 정치공세로 서울특별시장 경선출마를 포기하고 조지워싱턴 대학의 객원연구원으로 떠났다.
- 1998년 2월, 56세 때, 이명박은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한나라당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 1998년 4월, 56세 때, 이명박은 항소심에서 벌금 400만원 형이 선고되어 대법원에 상고했다.
- 1998년 00월 00일, 56세 때, 이명박은 한 신문사의 '대한민국 50년의 50대 인물' 조사에서 경제 분야 10인 가운데 유일한 전문경영인으로 꼽혔다.
- 1998년 02월 21일, 56세 때, 이명박은 다가오는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기 위해 국회의장에게 종로 지역구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1999己卯
- 1999년 4월, 57세 때, 이명박은 대법원에서 벌금형이 확정되어 피선거권이 박탈됐다.
- 1999년 00월 00일, 57세 때, 이명박은 미국 상원의 빌 클린턴 대통령 탄핵 심리를 방청하다 비속어를 쓴 의원이 의장의 5분 퇴장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모습을 보고, 다시 기회가 오면 정치 선진화에 힘쓰겠다고 마음먹었다.
- 1999년 04월 00일, 57세 때, 이명박은 대법원에서 벌금형이 확정돼 피선거권을 잃었다.
- 1999년 05월 00일, 57세 때, 이명박은 선거법 사건 변론을 맡았던 홍준표가 의원직을 잃고 미국에 오자 아내와 함께 덜레스 공항에 마중 나갔고, 이후 운전면허와 집, 차를 구하는 일을 도우며 가까워졌다.
2000庚辰
- 2000년 8월 15일, 58세 때, 이명박은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되면서 공직 선거 피선거권을 되찾았다.
- 2000년 02월 00일, 58세 때, 이명박은 지인이 소개한 노부부의 부탁으로 그 아들인 와튼스쿨 MBA 출신 김경준을 만난 뒤, 그와 함께 전산 개발을 맡을 LKe뱅크를 세워 공동대표가 됐고 인터넷 종합금융 포털 e-BANK 코리아의 회장을 맡았다.
- 2000년 08월 15일, 58세 때, 이명박은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됐다.
- 2000년 10월 00일, 58세 때, 이명박은 광운대 최고경영자 과정 특강에서 새 인터넷 금융 사업을 소개하던 중 자신이 세운 LKe뱅크를 김경준의 투자자문사 BBK로 잘못 말했다.
60대
2001辛巳
- 2001년 00월 00일, 59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이 85세로 세상을 떠나 그와의 소련 동행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
- 2001년 03월 00일, 59세 때, 이명박은 금융감독원이 BBK 조사에 들어가자 찾아온 김경준에게서 사태를 수습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 2001년 04월 18일, 59세 때, 이명박은 e-BANK 코리아 회장과 LKe뱅크 대표에서 물러나며 김경준과의 동업을 모두 정리했다.
- 2001년 05월 10일, 59세 때, 이명박은 이회창 총재의 요청으로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 분과위원장을 맡아 처음 당직에 올랐다.
- 2001년 10월 00일, 59세 때, 이명박은 동대문구 을 재보궐선거에 나선 홍준표의 유세차에 올라 지원 연설을 했고, 홍준표는 당선됐다.
2002壬午
- 2002년, 61세 때, 이명박은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해 새천년민주당 김민석 의원을 제치고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 됐다.
- 2002년 00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젊은 시절 함께 일했던 이태원 시장 환경미화원 출신 원로들이 서울 각 구청 미화원들을 설득하며 자신을 지지하는 도움을 받았다.
- 2002년 01월 29일, 60세 때, 이명박은 63빌딩에서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출판기념회를 열어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 2002년 03월 08일, 60세 때, 이명박은 중앙일보의 대의원 여론조사에서 53.1%로 홍사덕(36.5%)을 앞섰고, 홍사덕이 잠적한 끝에 후보 등록을 하지 않으면서 경쟁자가 사라졌다.
- 2002년 04월 04일, 60세 때, 이명박은 한나라당 서울시지부 대회에서 단독 출마해 만장일치로 서울시장 후보에 추대됐고, '서울의 신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2003癸未
- 2003년 00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시장 취임 1년 무렵 WCG 2003 우승자 이용범과 스타크래프트 대결을 벌였으나 5분 만에 졌다.
- 2003년 00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버스 개혁에 앞서 업계와 얽혀 있던 서울시 교통국 공무원을 전원 교체하고 버스 회사 관계자를 혼자 만나지 못하게 했으며, 중앙일보 교통 전문기자 출신 음성직을 교통관리실장에 앉혔다.
- 2003년 01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버스를 지하철처럼 운영하는 브라질 쿠리치바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도로 한가운데를 버스에 내주는 중앙버스전용차로 도입을 결심했다.
- 2003년 05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대통령과 문희상 비서실장, 유인태 정무수석에게 청계천 공사에 필요한 경찰 교통 통제 협조를 거듭 요청해 한 달 뒤 국무회의에서 공개 토론을 하자는 답을 받았다.
- 2003년 06월 04일, 61세 때, 이명박은 국무회의에 홀로 참석해 국무위원 대부분의 반대와 청계천 공사는 역대 왕이 했으니 중앙정부가 결정해야 한다는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의 주장에 맞서 실무는 한성판윤이 했어도 역사에는 임금의 업적으로 남는다고 반박했고,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한번 해보라는 결정과 경찰 협조 지시를 끌어냈다.
2004甲申
- 2004년 00월 00일, 62세 때, 이명박은 서울 시내에 이베코-이리스버스의 시티클래스 굴절버스를 대량 도입했다.
- 2004년 01월 16일, 62세 때, 이명박은 비어 있던 동대문운동장을 구획해 만든 동대문 풍물시장으로 청계천 노점상들을 옮겼고, 공구상가 상인들을 위해서는 문정동 가든파이브 조성을 추진했다.
- 2004년 03월 02일, 62세 때, 이명박은 서울광장 조성 공사를 시작했다.
- 2004년 04월 06일, 62세 때, 이명박은 서울숲 조성 공사를 시작했고, 부지에서 떨어진 뚝섬 자투리 땅을 고밀도 개발 용지로 2998억 원에 팔아 조성비 2325억 원을 마련했다.
- 2004년 04월 20일, 62세 때, 이명박은 광장이 시위대에 독점되지 않도록 사용 60일 전부터 7일 전까지 허가를 받게 하는 서울광장 조례안을 시의회에 냈다.
2005乙酉
- 2005년 10월 1일, 63세 때, 이명박은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청계천 복원공사를 완료했다.
- 2005년 10월 1일, 63세 때, 이명박은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청계천 복원공사를 완료했고,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업적을 남겼다.
- 2005년 10월 26일, 63세 때, 이명박은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한 고대 동문 김정배 위원장의 권유에 따라 호를 원래 일송(一松)에서 청계(淸溪)로 바꿨다.
- 2005년 00월 00일, 63세 때, 이명박은 버스 개혁으로 메트로폴리스 상을 시작으로 국제 교통 관련 상을 잇따라 받았다.
- 2005년 01월 00일, 63세 때, 이명박은 금속노조에 가입한 단원들의 반발 속에 서울시향을 세종문화회관에서 떼어 재단법인으로 새로 출범시켰고, 단원 선발 전권과 외부 청탁 차단을 약속해 영입한 정명훈이 블라인드 오디션으로 단원을 뽑았다.
2006丙戌
- 2006년 2월 21일, 64세 때, 이명박은 제33회 초교파 전국 목회자 부부 영성 세미나에서 "가난한 집안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을 통해 성공했다"고 간증했다.
- 2006년 00월 00일, 64세 때, 이명박은 시장에서 물러난 뒤 한동안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다.
- 2006년 00월 00일, 64세 때, 이명박은 주민 반발을 설득해 망우동에 첫 노인 전문병원인 서울시립 북부노인병원을 열었다.
- 2006년 05월 00일, 64세 때, 이명박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청계천 복원 등 서울시 환경정책을 '그린 드림' 커버스토리로 다루는 평가를 받았다.
- 2006년 06월 26일, 64세 때, 이명박은 퇴임을 며칠 앞두고 입주 기업과 북한 당국의 초청 형식으로 개성공단을 4시간가량 둘러본 것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방북이 됐고, 신원 등 공장 세 곳을 돌며 동행한 조동찬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총국장 등 북측 인사들이 『신화는 없다』의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07丁亥
- 2007년 12월 19일, 66세 때, 이명박은 제17대 대선에서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2위인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역대 최대 표차인 531만 여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 2007년 01월 02일, 65세 때, 이명박은 유력 대선주자로서 상도동 자택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 인사했다.
- 2007년 03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저서 『어머니』 출판기념회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이 자리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강재섭 대표, 한나라당 의원 63명, 지지자 2만 명이 모였다.
- 2007년 03월 05일, 65세 때, 이명박은 충북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손학규의 탈당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당에 남아도 나가도 시베리아라는 취지로 답했다가, 손학규에게서 나가라고 놀린다는 반발을 샀다.
- 2007년 03월 19일, 65세 때, 이명박은 경선 3파전의 한 축이던 손학규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박근혜와의 양자 대결 구도를 맞았다.
2008戊子
- 2008년, 67세 때,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통해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통폐합안을 발표하고,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뼈대로 '경제살리기'의 기치를 내걸었다.
- 2008년, 67세 때,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쇠고기협상이 타결되자 MBC PD수첩을 비롯한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인간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하면서 광우병 사태가 발생하자 사과하고 30개월 이상 소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재협상을 약속했다.
- 2008년 9월, 66세 때,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발 글로벌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대내적으로는 미국, 일본, 중국 등과 통
- 2008년 01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캠프 인사를 통해 쇠고기 협상 지연으로 한미 관계가 파탄 지경이라며 노무현 대통령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전해 들었다.
- 2008년 01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당선인 신분으로 삼청동 안가에서 임채진 검찰총장을 만나 새 정부가 들어서면 물러나겠다는 뜻을 들었으나, 사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임시키겠다고 답했다.
2009己丑
- 2009년 8월 28일, 67세 때, 이명박은 나로우주센터 방문에서 "내가 젊었을 때 대한민국 자동차를 처음 개발했는데 부품이 2만3000개나 된다"는 발언으로 자동차 개발 참여 관련 논란을 일으켰다.
- 2009년 00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정부 핵심 인사 몇 명을 통해 수사가 불가피하더라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최대한 지키며 조용히 진행하라는 뜻을 검찰에 간접적으로 전했다.
- 2009년 00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세계 경제가 역성장한 가운데 한국 경제가 0.3% 플러스 성장을 기록하는 결과를 끌어냈다.
- 2009년 00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한식 세계화 사업을 시작했고, 재임 중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한글학당을 세웠다.
- 2009년 01월 20일, 67세 때, 이명박은 서울 용산 재개발 지역 농성 진압 과정에서 사상자가 난 용산참사를 맞았다.
2010庚寅
- 2010년 03월 00일, 68세 때, 이명박은 천안함 피격 사건을 맞았고, 성명에서 희생 장병을 잊지 않고 퇴임 후에도 매년 찾겠다고 유가족에게 약속했다.
- 2010년 03월 02일, 68세 때, 이명박은 대학에 가지 않고도 취업할 수 있는 학교로 만든 마이스터고의 개교식에 참석했다.
- 2010년 09월 21일, 68세 때, 이명박은 김윤옥 여사와 함께 KBS 1TV 아침마당 생방송에 출연했다.
- 2010년 11월 00일, 68세 때, 이명박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벌어진 교전 상황을 맞았다.
- 2010년 11월 11일, 68세 때, 이명박은 서울에서 제5차 G20 정상회의를 열었다.
70대
2011辛卯
- 2011년 01월 10일, 69세 때, 이명박은 무함마드 왕세제에게 특전사의 왕실 경비대 훈련을 제안해 아크부대 150여 명을 파병했고, 장병 급여를 아랍에미리트가 내겠다는 제안은 용병이 될 수 있다며 거절했다.
- 2011년 03월 00일, 69세 때,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의 제안을 받아 국내 비축기지에 UAE산 원유 600만 배럴을 공동 비축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 2011년 03월 14일, 69세 때,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 바라카에서 열린 원전 기공식에 참석해 무함마드 왕세제와 악수했다.
- 2011년 07월 00일, 69세 때, 이명박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확정 결과를 받아 들었다.
- 2011년 11월 00일, 69세 때, 이명박은 한미 FTA 비준을 둘러싼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2012壬辰
- 2012년 03월 20일, 70세 때,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 유전 개발 관계자들을 불러 격려 오찬을 열었다.
- 2012년 03월 26일, 70세 때, 이명박은 서울에서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열었다.
- 2012년 07월 01일, 70세 때, 이명박은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을 맞았다.
- 2012년 08월 10일, 70세 때, 이명박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독도를 방문했다.
- 2012년 08월 13일, 70세 때, 이명박은 김명식을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에 임명했다.
2013癸巳
- 2013년 01월 00일, 71세 때, 이명박은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택시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2018戊戌
- 2018년 03월 14일, 76세 때, 이명박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한동훈 3차장 체제의 검찰 수사를 받으며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2020庚子
- 2020년 10월 29일, 78세 때, 이명박은 다스 자금 횡령과 뇌물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 원을 확정받았다.
80대
2022壬寅
- 2022년 00월 00일, 80세 때, 이명박은 수감 중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이 찾아와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수감자의 편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거절했으나, 거듭된 요청에 결국 관계 복원을 바라는 편지를 써 주었다.
- 2022년 06월 00일, 80세 때, 이명박은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풀려났다.
- 2022년 12월 28일, 81세 때, 이명박은 윤석열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남은 형기 약 15년과 벌금 82억 원을 면제받고 복권됐다.
2023癸卯
- 2023년 01월 29일, 81세 때,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무함마드 국왕이 이명박 이야기만 절반 넘게 했다며 감사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 2023년 03월 22일, 81세 때, 이명박은 특별사면 후 첫 공식 일정으로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참배했다.
- 2023년 08월 15일, 81세 때, 이명박은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 윤기중 명예교수 빈소를 찾아 윤석열과 처음 대면했고, 논현동 사저를 찾아뵙고 싶다는 윤석열의 말에 그럴 필요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 2023년 10월 00일, 81세 때, 이명박은 재임 중 지은 4대강 16개 보 가운데 하나인 여주 강천보를 걸었다.
2024甲辰
- 2024년 05월 29일, 82세 때, 이명박은 방한 중인 무함마드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이 논현동 자택을 찾아와 그를 맞이했다.
- 2024년 08월 12일, 82세 때, 이명박은 윤석열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남동 관저를 찾아 정진석 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만찬을 함께했다.
- 2024년 08월 12일, 82세 때, 이명박은 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 수사 때 생각이 달랐으나 아랫사람 때문이었다며 대립 중이던 인사를 탓하자, 그 사람을 앉힌 것은 대통령이니 사람을 잘못 쓴 것이라고 답했다.
2025乙巳
- 2025년 09월 17일, 83세 때, 이명박은 중앙일보 창간 60주년 기념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 2025년 12월 10일, 83세 때, 이명박은 서울시립대에서 '서울시 버스개혁과 청계천 복원: 성과와 교훈'을 주제로 강연했다.
2026丙午
- 2026년 03월 26일, 84세 때, 이명박은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참배했다.
-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서초동 개인 사무실에서 퇴임 13년 만의 첫 언론 인터뷰를 중앙일보와 갖고, 이재명 정부가 탈원전 철회·북극항로 개발·자원외교 등 보수 정권 정책을 받아들인 것을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의회 3분의 2를 내준 보수가 참패를 인정하고 원인을 분석해야 하는데도 분열까지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이미 과거가 된 윤석열 문제는 법에 맡기고 미래를 보라고 주문했다.
-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재임 중 가장 잘한 일로 세계 금융위기 극복을, 아쉬운 일로 4대 그룹에 부지를 줘 기업도시로 만들려던 세종시 구상의 좌절을 꼽았다.
-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젊은 세대의 재평가 움직임을 왜곡된 진실이 드러난 결과로 보면서, 수감 중 1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젊은이들에게서 하루 70~80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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