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
프로필로 돌아가기 →물병자리개띠戊 무토토(土)
전통 명리·점성술의 일반 설명
무토(戊土) · 큰 산·너른 대지움직이지 않는 큰 산에 비유된다.
물병자리 · 1.20~2.18독창성과 자유로운 사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가 흔히 언급되는 특징이다.
개띠충직함과 정의감, 책임을 다하는 성실함이 흔히 언급되는 특징이다.
토(土) · 흙·대지받아들이고 중재하는 힘, 신뢰와 중심, 신(信)의 기운으로 설명된다.
아래 설명은 전통 명리학·점성술에서 각 기호에 흔히 붙는 일반적 설명입니다. 개인의 성격이나 미래를 판정하는 근거가 아니며, 라이프러리는 이를 사실 데이터와 분리해 "해석"으로만 다룹니다.
庚戌
연주
戊寅
월주
戊申
일주
—
시주 (미계산)
대운(大運) · 순행
己卯
8세~
庚辰
18세~
辛巳
28세~
壬午
38세~
癸未
48세~
甲申
58세~
乙酉
68세~
丙戌
78세~
丁亥
88세~
대운(大運)은 명리학에서 10년 단위로 바뀌는 흐름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라이프러리는 이를 예측이 아니라 "그 10년을 전통 명리학이 어떤 시기로 설명하는가"와 "실제 라이프 카운트에 무엇이 기록돼 있는가"를 나란히 놓는 용도로만 씁니다.
출생시각 미확인 — 시주(時柱)는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삼주 기준입니다.
10대
1910庚戌
- 1910년 2월 12일, 이병철은 경상남도 의령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안동 권씨 권재림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 1910년대, 어린 시절 이병철은 할아버지 이홍석 훈장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 등을 배웠다.
- 1910년대, 어린 시절 이병철은 형과 함께 문산당에 가서 가문의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재능은 생각보다 없었지만 꾸준하고 성실히 공부했다.
1919己未
- 1919년 3월, 9세 때, 이병철은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20庚申
- 1920년, 11세 때, 이병철은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 1920년대 초, 이병철은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했다.
- 1920년대 중반, 이병철은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 1920년대 후반, 4학년 1학기 무렵 이병철은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 1920년대 후반, 이병철은 부모로부터 일본 유학에 대해 반대받았으나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했다.
1923癸亥
- 1923년, 14세 때, 이병철은 지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6丙寅
- 1926년, 17세 때, 이병철은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했다.
- 1926년, 결혼식을 마친 후 이병철은 상경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했다.
1929己巳
- 1929년, 20세 때, 이병철은 중동중학교를 졸업했다.
- 1929년, 20세 때, 이병철은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 1929년, 유학 초기 이병철은 한동안 책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
- 1929년, 대학 시절부터 이병철은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되었다.
20대
1930庚午
- 1930년, 1학년 때 이병철은 건강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 1930년대 초, 이병철은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스스로 회고했다.
- 1930년대 초, 어느 날 이병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3명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 1930년대 초, 이병철은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우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1930년대 초, 이병철은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며칠 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1931辛未
- 1931년, 22세 때, 이병철은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와세다대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했다.
- 1931년, 귀국 후 이병철은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건강이 회복되었다.
- 1931년, 귀국 후 이병철은 고향에서 특별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며 친구들과 노름판에 빠졌다.
1936丙子
- 1936년, 27세 때, 이병철은 친구 2명과 힘을 합쳐서 동업으로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설립했다.
1938戊寅
- 1938년 3월, 29세 때, 이병철은 30,000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30대
1941辛巳
- 1941년, 32세 때, 이병철은 삼성상회를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했다.
1942壬午
- 1942년, 33세 때, 이병철은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했다.
1947丁亥
- 1947년, 38세 때, 이병철은 광복 후 경성으로 상경했다.
1948戊子
- 1948년, 39세 때, 이병철은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했다.
40대
1950庚寅
- 1950년 초, 41세 때, 이병철은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하여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했다.
- 1950년 6월 25일, 이병철은 서울에서 한국 전쟁을 맞았다.
- 1950년, 전쟁 직후 이병철은 피난을 떠났다.
- 1950년대 중반, 이병철은 사업 영역을 확장해나가며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하여 경영했다.
- 1950년대 중반, 이병철은 성균관대학교의 재단 이사로서 교육사업에 투자했다.
1951辛卯
- 1951년, 42세 때, 이병철은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1953癸巳
- 1953년, 44세 때, 이병철은 제조업에도 투자하여 제일제당을 설립했다.
1954甲午
- 1954년, 45세 때, 이병철은 제일모직을 설립하여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50대
1961辛丑
- 1961년부터 1987년까지, 이병철은 한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1964甲辰
- 1964년 초, 55세 때,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인수하여 운영했다.
- 1964년 5월, 55세 때, 이병철은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에도 진출했다.
- 1964년, 이병철은 대구대학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 1964년 8월 13일, 이병철은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이사에 위촉되었다.
1965乙巳
- 1965년 9월, 56세 때, 이병철은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에도 진출했다.
- 1965년 이후, 이병철은 중앙일보 등을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1966丙午
- 1966년 5월 24일, 이병철이 운영하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나는 사카린 밀수 사건이 발생했다.
- 1966년 6월, 부산세관은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이병철의 삼성에 부과했다.
- 1966년 11월, 이병철의 차남 창희가 한국비료의 상무로 있으면서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68戊申
- 1968년 2월, 59세 때, 이병철은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1969己酉
- 1969년, 60세 때, 이병철은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60대
1970庚戌
- 1970년, 이병철은 와세다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70년대, 이병철은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 1970년대 중반, 이병철은 삼성정밀·용인자연농원 등을 설립했다.
- 1970년대 후반, 이병철은 미술에 심취하여 많은 소장품을 수집하거나 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했다.
- 1970년대 후반, 이병철은 정주영 등과 함께 울산에 공단을 조성하는 데에도 일정부분 투자하거나 기부를 하여 설립에 일익을 담당했다.
1972壬子
- 1972년 7월, 63세 때, 이병철은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어 제일합섬을 설립했다.
1974甲寅
- 1974년, 65세 때, 이병철은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에 진출했다.
1975乙卯
- 1975년 5월, 66세 때, 이병철은 특별히 제일합섬의 공장 시스템을 공개했다.
1976丙辰
- 1976년, 67세 때, 이병철은 위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1977丁巳
- 1977년 5월, 68세 때, 이병철은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하여 삼성전자로 단일화했다.
- 1977년, 이병철은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70대
1980庚申
- 1980년까지, 이병철은 동양방송을 언론통폐합이 될 때까지 운영했다.
- 1980년, 70세 때, 이병철은 중앙일보 회장이 되었다.
1981辛酉
- 1981년 2월, 72세 때,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1982壬戌
- 1982년,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으로 다시 재위촉되었다.
- 1982년부터, 이병철은 제일합섬을 새한그룹을 차려 분가한 차남 창희에게 서서히 넘겨주었다.
- 1982년, 73세 때, 이병철은
- 1982년, 73세 때, 이병철은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했다.
- 1982년, 이병철은 보스턴대학교에서 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甲子
- 1984년 8월, 75세 때, 이병철은 삼성전자의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1985乙丑
- 1985년, 76세 때, 이병철은 폐암 판정을 받았다.
- 1985년 이후, 이병철은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1987丁卯
- 1987년 11월 초,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했다.
- 1987년 11월 19일, 78세의 나이로 이병철은 숨을 거두었다.
-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은 사망하였고 국민�장 무궁화장이 특별 추서되었다.
- 1987년 이후, 삼성전자는 이병철의 3남 건희에게 상속되었다.
- 1987년 이후, 이병철의 장녀 인희는 한솔그룹을 창업했다.
80대
1995乙亥
- 1995년, 이병철은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이 추서되었다.
1999己卯
- 1999년 12월, 이병철은 매일경제와 전경련이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10대
2026丙午
- 2026년 03월 29일, 116세 때, 이병철 은 식습관과 성공 신화에 관한 일화를 남겼다.
- 2026년 04월 07일, 116세 때, 이병철 은 인재 경영의 원칙과 경영자로서의 마지막 발자취를 전했다.
- 2026년 04월 08일, 116세 때, 이병철 은 행정안전부 참여혁신국장으로 대한행정사회 초청 간담회에 참석했다.
- 2026년 04월 08일, 116세 때, 이병철 은 반도체 및 조선 산업 등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 2026년 04월 09일, 116세 때, 이병철 은 다올투자증권의 지분을 29%까지 확대하며 최대주주 지위를 공고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