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프로필로 돌아가기 →처녀자리개띠戊 무토토(土)
전통 명리·점성술의 일반 설명
무토(戊土) · 큰 산·너른 대지움직이지 않는 큰 산에 비유된다.
처녀자리 · 8.23~9.22분석력과 세심함, 완벽을 향한 근면함이 흔히 언급되는 특징이다.
개띠충직함과 정의감, 책임을 다하는 성실함이 흔히 언급되는 특징이다.
토(土) · 흙·대지받아들이고 중재하는 힘, 신뢰와 중심, 신(信)의 기운으로 설명된다.
아래 설명은 전통 명리학·점성술에서 각 기호에 흔히 붙는 일반적 설명입니다. 개인의 성격이나 미래를 판정하는 근거가 아니며, 라이프러리는 이를 사실 데이터와 분리해 "해석"으로만 다룹니다.
丙戌
연주
丙申
월주
戊寅
일주
—
시주 (미계산)
대운(大運) · 순행
丁酉
4세~
戊戌
14세~
己亥
24세~
庚子
34세~
辛丑
44세~
壬寅
54세~
癸卯
64세~
甲辰
74세~
乙巳
84세~
대운(大運)은 명리학에서 10년 단위로 바뀌는 흐름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라이프러리는 이를 예측이 아니라 "그 10년을 전통 명리학이 어떤 시기로 설명하는가"와 "실제 라이프 카운트에 무엇이 기록돼 있는가"를 나란히 놓는 용도로만 씁니다.
출생시각 미확인 — 시주(時柱)는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삼주 기준입니다.
10대
1946丙戌
- 1946년 09월 01일, 0세 때, 노무현은 경상남도 김해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과수 농사를 짓던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 사이 3남 2녀 중 막내로 음력 8월 6일에 태어났다.
- 1946년 09월 01일, 0세 때, 노무현은 난산 끝에 남산병원 원장이 집게로 끌어내 세상에 나왔고, 그때 생긴 자국이 어린 시절 머리와 어깨에 한동안 남아 있었다.
1950庚寅
- 1950년, 4세 때, 노무현은 손재주 좋은 작은형이 만든 스케이트·팽이·새총 같은 장난감을 울며 떼써 손에 넣곤 했고, 훗날 울기만 하면 언제든 자기 것이 되었다고 돌아봤다.
1952壬辰
- 1952년, 6세 때, 노무현은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워 모두 외웠고, 주변에서 '노(盧)천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1952년, 6세 때, 노무현은 봉화산 일대로 소풍 온 읍내 학생들이 일부러 집까지 찾아와 구경할 만큼 이름난 아이였다.
1953癸巳
- 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체구가 작고 야무지다는 이유로 '돌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봉화산과 들판에서 친구들과 칡을 캐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 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자왕골 등 야산을 돌아다니며 풀과 나무 이름을 익혔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삼지구엽초' 같은 식물 이름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 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겨울에 드물게 눈이 내리면 마을 친구들과 봉하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 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대창초등학교까지 10리 길을 매일 걸어 다녔고, 그 등굣길을 친구들과 장난치는 놀이터로 삼았다.
1954甲午
- 1954년, 8세 때, 노무현은 2학년에서 62명 중 1등을 했다.
- 1954년, 8세 때, 노무현은 새 학용품을 살 형편이 못 돼 누나가 쓰던 찌그러진 필통을 물려받아 썼다.
1956丙申
- 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대창초등학교 4학년 학급 임원을 맡아 자습 시간에 급우들의 공부를 이끌었다.
- 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4학년 담임 김종대 선생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 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급장으로 있으면서 순진한 짝꿍을 꾀어 그의 새 필통을 자기 낡은 필통과 바꿨다가, 친구들의 비난을 받고 돌려줬다.
- 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학교 친구들에게서 자유당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큰형 방에 있던 잡지와 책을 읽고 유행가를 따라 불렀다.
1957丁酉
- 1957년, 11세 때, 노무현은 체육 시간 당번을 서다 친구와 함께 교실에 있던 새 가방을 면도칼로 찢었고, 담임의 추궁에도 끝까지 털어놓지 않았다.
- 1957년, 11세 때, 노무현은 '두뇌가 명민하고 자발성이 풍부해 어른스러우며 성적도 매우 좋으나 다소 게으르다'는 학교 평가를 받았다.
- 1957년, 11세 때, 노무현은 과수원 복숭아 판 돈에 손대 하모니카를 샀다가 들켰고, 부모가 죄 없는 작은형을 의심하자 이튿날 울며 잘못을 빌었으며 이후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1958戊戌
- 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두뇌가 명민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며 성적이 우수하나 몸이 약하다'는 학교 평가를 받았다.
- 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6학년 담임 신종생 선생에게 휴일과 방학에도 불려 가 공부를 배웠고, 통학 거리가 멀어 선생의 자취방에서 자고 끼니를 얻어먹기도 했다.
- 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신종생 선생이 전교회장 선거 출마를 권하자 처음엔 사양했으나, 용기가 없다는 선생의 꾸지람에 자극받아 출마를 결심했다.
- 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밤새 정견 발표 원고를 준비했고, 연단에 얼굴이 가릴 만큼 키가 작자 "고추가 작아도 맵다"는 말로 청중을 웃겼다.
- 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대창초등학교 전교회장 선거에서 502표 중 302표를 얻어 당선됐다.
1959己亥
- 1959년, 13세 때, 노무현은 중학교에 들어간 뒤 사춘기를 맞아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공부를 등한시했고, 결석하는 날도 잦았으며 일부러 삐딱하게 옷을 입고 다녔다.
- 1959년 02월 10일, 12세 때, 노무현은 우수 학생으로 교육감상을 받으며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했다.
- 1959년 03월, 12세 때, 노무현은 어머니가 교사인 큰형수에게 부탁해 진영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했으나, 큰형수가 큰형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하자 자존심이 상한 큰형이 돈을 돌려주면서 입학금을 잃었다.
- 1959년 03월, 12세 때, 노무현은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가 여름 복숭아 농사로 입학금을 내겠다고 사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1959년 03월, 12세 때, 노무현은 교감에게서 농사나 배우라며 큰아들이 대학을 나와도 놀고 있는데 공부시켜 뭐 하느냐는 말을 듣고 화가 나 입학 원서를 찢고 나왔다.
1960庚子
- 1960년, 14세 때, 노무현은 훗날 가훈을 묻는 이들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갈대처럼 살아라"가 집안의 가훈이라고 냉소적으로 답하곤 했다.
-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앞두고 진영중학교에서 열린 찬양 글짓기 대회를 부당하다고 보고 급우들에게 백지를 내자고 설득해 반 전체가 백지를 제출하게 했다.
-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답안지에 '우리 이승만(택)통령'이라고만 적고 이름을 써 냈고, 시험을 감독하던 여교사가 울음을 터뜨렸다.
-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백지동맹 주동으로 교무실에서 하루 종일 벌을 섰고, 그사이 교감에게서 역적 같은 놈이라는 핀잔을 들었다.
-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반성문을 쓰지 않고 집으로 달아났다가, 옳다고 믿고 한 일이면 끝까지 당당히 버텼어야 한다는 큰형의 꾸지람을 들었다.
1961辛丑
- 1961년, 15세 때, 노무현은 진영중학교 3학년 재학 중 건강이 나빠져 1년간 휴학했다.
1962壬寅
- 1962년, 16세 때, 노무현은 진영중학교 3학년 때 부일장학생 시험에 붙어 장학금을 받았다.
- 1962년, 16세 때, 노무현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가난한 집안 사정상 빨리 돈을 버는 편이 낫다고 보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수험서를 사서 5급 공무원(현 9급) 시험을 준비했다.
- 1962년, 16세 때, 노무현은 이를 눈치챈 큰형 노영현이 고등학교 진학을 강하게 권하자 그 뜻을 받아들여 부산상고 진학을 택했다.
- 1962년, 16세 때, 노무현은 고등학교 때까지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고, 어머니는 잘 먹이지 못해 아들이 자라지 못했다며 늘 마음 아파했다.
1963癸卯
- 1963년, 17세 때, 노무현은 방학마다 진영에 돌아와 환갑을 넘긴 부모가 산기슭을 일궈 고구마를 심고 취로사업에 나가며 고구마순을 팔아 생계를 잇는 모습을 봤고, 거의 매일 저녁을 메밀죽으로 때우며 큰형을 원망하기도 했다.
- 1963년, 17세 때, 노무현은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가난한 봉하마을을 내려다보며 좌절하다가도, 사자바위에서 화포천까지 이어진 진영 들판과 부산행 기차를 바라보며 가난을 견디고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 1963년, 17세 때, 노무현은 부산 범일동의 한 소화기 판매회사 사무실에서 야간 경비를 서며 라면으로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했다.
- 1963년~1965년, 16~17세 때, 노무현은 고등학생 시절 권양숙과 가끔 마주치면 설레었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거의 없었다.
- 1963년 03월, 16세 때, 노무현은 단정한 차림의 은행원이 된 자신을 그리며 그것을 가난을 벗어나는 첫 단계로 삼기 시작했다.
1964甲辰
- 1964년, 18세 때, 노무현은 초량동 급우 집에서 밥을 얻어먹거나 가끔 묵었고, 그것도 어려우면 학교 근처 '아세아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잠들었다.
- 1964년, 18세 때, 노무현은 현실의 고통에 짓눌려 공부에서 멀어지며 시험을 빼먹고 술과 담배를 배웠고, 2학년 성적은 502명 중 48등에서 213등으로 떨어졌다.
- 1964년, 18세 때, 노무현은 가장 힘들던 무렵 어머니에게 이 넓은 세상에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다며 원망 섞인 편지를 보냈다.
1965乙巳
- 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독서실 총무의 지나친 통제에 맞서 책상 위에 올라가 총무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고, 이 일로 독서실 분위기가 바뀌며 오히려 총무와 가까워졌다.
- 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독서실 총무였던 부산상고 1년 후배 최도술과 인연을 맺었고, 그를 훗날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국회의원 보좌관, 청와대 총무비서관으로 곁에 두었다.
- 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3학년이 되면서 흐트러졌던 마음가짐을 조금씩 바로잡기 시작했다.
- 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졸업 뒤 부모를 모시겠다고 결심하고 농협 입사를 목표로 공부에 매달렸다.
- 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취업반인 3학년 3반에서 입사시험 대비 아침 보충수업을 들었고, 부기와 상식에 자신이 있어 정규 수업 직전에야 교실에 들어서곤 했다.
20대
1966丙午
- 1966년, 20세 때, 노무현은 《고시계》 사법시험 합격기에 4개월가량 준비해 예비시험에 붙은 행운으로 그때까지의 고된 싸움이 끝났다고 적었고, 자신의 합격에 자극받아 큰형이 1967년, 작은형이 1968년에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밝혔다.
- 1966년, 20세 때, 노무현은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 1966년 02월, 19세 때, 노무현은 졸업을 앞두고 학교가 소개한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의 어망 제조업체 삼해공업에 취업하기로 했다.
- 1966년 03월, 19세 때, 노무현은 동기 졸업생 넷과 함께 삼해공업에 들어가 한 달 뒤 첫 월급 2700원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대기업 신입 초봉 1만 원, 공무원 초봉 6000원에 크게 못 미치는 액수였다.
- 1966년 04월, 19세 때, 노무현은 월급이 기대보다 훨씬 적자 함께 입사한 신입사원 넷과 상의한 끝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뜻을 모았다.
1967丁未
- 1967년, 21세 때, 노무현은 법률 서적을 살 돈이 없어 사법시험 대신 예비시험 과목을 다시 공부하다가 이듬해 입대했다.
1968戊申
-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군 복무 내내 왜 쓸데없는 일을 해야 하느냐는 회의에 시달렸고, 전쟁이 실감 나지 않는 상황에서 혹독한 훈련을 견디는 것을 힘겨워했다.
-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영어책과 법률책을 늘 지니고 다니며 집에서 책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조바심과 달리 정작 공부는 잘되지 않았다.
-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군 생활 중 호남 지역에 대한 편견을 처음 접했고, 이를 평생 맞선 지역구도를 처음 체감한 계기로 정치인 시절 자주 이야기했다.
-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복무하며 월급이 차츰 올라 제대 무렵 440원을 받았고, GP 근무 때는 별도 수당도 받았다.
-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군대에서도 집안 막내로서 형들에게 신세를 지며 돈을 부쳐 달라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
1969己酉
- 1969년, 23세 때, 노무현은 원주 사령부 부관부에서 담뱃값 정도만 남는 근무를 1년쯤 하다가 부대 일부를 전방으로 보낸다는 소식에 곧바로 자원해 인제 제12보병사단 제52보병연대로 옮겼다.
- 1969년, 23세 때, 노무현은 자원은 했지만 전방으로 가는 버스에서 자신감을 잃었고, 사방이 가파른 산에 막혀 하늘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오지에 닿아서야 '인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말을 실감했다.
- 1969년, 23세 때, 노무현은 사령부 부관부의 고생 탓에 보병중대 배치를 바랐으나, 대대 CP 대기 중 졸면 목이 달아난다는 선배들의 겁주기에 결국 대대장 당번병이 되어 건봉산 대대 상황실에서 정보상황병으로 몇 달을 지냈다.
- 1969년, 23세 때, 노무현은 대대 상황실 근무가 철책 근무보다는 나았지만 쉬는 날 없이 밤을 지새우고 낮에 쪽잠을 자야 했으며, 특히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을 버거워했다.
1970庚戌
- 1970년, 24세 때, 노무현은 전방 철책 중대 본부로 옮겼다가 소대까지 내려가 철책과 GP 근무를 마친 뒤 제대했다.
- 1970년, 24세 때, 노무현은 어느 날 밤 철책선에 나가 실탄 80발을 허리에 차고 4킬로그램짜리 M1 소총을 든 채 12시간 넘게 보초를 섰고, 낮에는 사역과 김치 담그기, 벙커 공사까지 해야 했다.
- 1970년, 24세 때, 노무현은 4개월가량 GP에서 근무하며 실탄을 휴대한 긴장 속에서도 동료들이 서로 이해하고 돕는 모습을 보며 전우애와 함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얻었다.
1971辛亥
-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고교 졸업 후 부산에서 지내던 같은 마을 출신 권양숙이 할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돌아오면서 다시 만났는데, 권양숙은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사법시험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권양숙에게 마음이 끌려 구애했으나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독학으로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에서도 연애를 병행하려 할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공부에 크게 매달리지 않던 시기 심심하면 휘파람으로 권양숙을 불러내 새벽까지 함께 돌아다녔고, 이 때문에 장모 눈에는 딸을 굶길 사윗감으로 비쳤다.
-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공부 틈틈이 권양숙을 만나 책을 빌려주고 받으며 읽은 내용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1972壬子
-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직접 고안한 개량 독서대를 만들었다.
-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촛불을 켜고 공부해야 하는 마옥당보다 장유암이 편하다고 느꼈지만, 마을까지 한 번 내려오는 데 두 시간씩 걸렸다.
-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상고 출신 시골 청년이라는 이유로 권양숙 집안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권양숙의 아버지가 좌익 활동으로 복역하다 숨진 이력 때문에 연좌제가 살아 있던 당시 사법시험에 붙더라도 판검사 임용이 막힐 수 있다는 우려에 직면했다.
-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학벌과 집안이 좋은 규수와의 혼사를 바라던 자기 집안의 반대에도 부딪혔다.
1973癸丑
- 1973년, 27세 때, 노무현은 국사 과목이 새로 추가돼 부담이 커졌으나 제15회 사법시험이 7월로 미뤄지며 숨을 돌렸다.
- 1973년, 27세 때, 노무현은 벽에 '수석 합격'이라는 표어를 붙이고 공부에 매진했다.
- 1973년, 27세 때, 노무현은 거듭 낙방하는 동안 아이를 업고 매일 논길을 건너 마옥당까지 밥을 날라준 권양숙 덕분에 공부를 이어갔다.
- 1973년, 27세 때, 노무현은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지 대신 작은형이 부모 봉양과 자신의 책값·용돈, 아들 건호의 우윳값까지 맡아준 덕분에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 1973년 01월, 26세 때, 노무현은 2년 가까운 연애 끝에 양가 반대를 넘어 권양숙과 결혼했다.
1974甲寅
- 1974년, 28세 때, 노무현은 별다른 준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제16회 사법시험을 치렀으나, 전년보다 낮은 130위 안팎의 성적으로 또 떨어졌다.
1975乙卯
- 1975년, 29세 때, 노무현은 사법연수원 제7기에 들어가 60명 중 47등으로 수료했다.
- 1975년 01월, 28세 때,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을 앞두고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귀가하는 규칙적인 생활로 마음을 다잡았다.
- 1975년 03월 27일, 28세 때,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그해 합격자 가운데 대학을 거치지 않은 고졸 출신은 그 한 명뿐이었다.
- 1975년 05월, 28세 때, 노무현은 자신이 고안한 개량 독서대를 특허국(현 지식재산처)에 실용신안으로 출원했다.
- 1975년 06월, 28세 때, 노무현은 《고시계》 1975년 6월호 '제17회 사법시험 합격자 좌담회'에 참석해 가끔 동료들과 산 너머에서 막걸리를 마신 일이 큰 손실이었다고 말했다.
30대
1976丙辰
- 1976년 01월 17일, 29세 때, 노무현은 아버지 노판석을 여의었다.
1977丁巳
- 1977년, 31세 때, 노무현은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 1977년 12월, 31세 때, 노무현은 경제적인 이유로 임용 7개월 만에 판사직에서 물러났다.
1978戊午
- 1978년, 32세 때, 노무현은 등기 업무까지 맡아 부산 지역 사법서사들의 반발을 샀다.
- 1978년 05월, 31세 때, 노무현은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조세 전문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1981辛酉
- 1981년, 35세 때, 노무현은 김광일 변호사의 요청으로 부림 사건 변호인단에 합류했다.
- 1981년, 35세 때, 노무현은 부림 사건 피해자를 접견하다 고문 흔적을 발견한 뒤 변론에 온 힘을 쏟으며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1982壬戌
- 1982년, 36세 때, 노무현은 부산 서구에서 노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중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온 문재인을 만나 의기투합해 함께 사무소를 꾸렸다.
1985乙丑
- 1985년, 39세 때, 노무현은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고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었다.
40대
1987丁卯
- 1987년, 41세 때, 노무현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의 선두에 섰다.
- 1987년, 41세 때, 노무현은 연설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가도 마이크를 놓지 않고 연설을 계속했다.
- 1987년 08월, 40세 때, 노무현은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 사건과 관련해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으나, 법원이 영장을 기각해 풀려났다.
- 1987년 11월, 41세 때, 노무현은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1988戊辰
- 1988년, 42세 때, 노무현은 정치인이 된 뒤에야 군 시절 품었던 회의적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 1988년 04월, 41세 때, 노무현은 김영삼의 권유로 통일민주당에 들어가 부산 동구에 출마했고, 5공 실세 허삼수 후보를 누르고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 1988년 11월, 42세 때, 노무현은 5공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정주영, 장세동 등을 상대로 날카롭게 질의하며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89己巳
- 1989년 12월 31일, 43세 때, 노무현은 5공비리특위·광주특위 연석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증언 뒤에도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며 자신의 명패를 국회 단상에 던졌다.
1990庚午
- 1990년 01월, 43세 때, 노무현은 3당 합당에 반대해 김영삼과 갈라서고, 통일민주당에 남은 세력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1992壬申
- 1992년 03월, 45세 때, 노무현은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다시 출마했으나 4년 전 이겼던 허삼수와의 재대결에서 낙선했다.
1995乙亥
- 1995년, 49세 때, 노무현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나섰으나 민주자유당 문정수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50대
1996丙子
- 1996년, 50세 때, 노무현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이명박, 이종찬에 이어 3위로 낙선했다.
- 1996년, 50세 때, 노무현은 낙선 뒤 김원기, 이부영 등과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꾸렸다.
1997丁丑
- 1997년, 51세 때, 노무현은 통추의 진로를 두고 노선이 갈리자 한나라당 대신 새정치국민회의를 택해 입당했고, 부총재를 맡아 김대중의 대선 승리에 힘을 보탰다.
1998戊寅
- 1998년 02월, 51세 때, 노무현은 이명박 의원의 사퇴로 빈 종로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나서기 위해 서울시장 출마 계획을 접었다.
- 1998년 02월 18일, 51세 때, 노무현은 어머니 이순례를 여의었다.
- 1998년 07월, 51세 때, 노무현은 종로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돼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다.
2000庚辰
- 2000년~2001년, 54~54세 때,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일하며 관용차 의전과 지방 출장 때 고급 차량을 동원하던 관행을 없애는 등 권위주의를 걷어냈다.
- 2000년 04월, 53세 때, 노무현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를 떠나 지역주의 극복을 내걸고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으나, 35.69%를 얻는 데 그쳐 허태열 후보에게 졌다.
- 2000년 04월, 53세 때, 노무현은 부산 북·강서을 낙선을 계기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에 공감한 지지자들이 인터넷 모임 노사모를 만들었다.
- 2000년 08월 07일, 53세 때,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에 취임하며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라는 취임사로 직원들의 책임 부담을 자신이 지겠다고 밝혔다.
2001辛巳
- 2001년 03월, 54세 때,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정치 토론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며 활동했다.
- 2001년 12월, 55세 때,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새천년민주당 경선에 뛰어들었다.
2002壬午
- 2002년 04월 27일, 55세 때, 노무현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역사를 물려줍시다. 착한 사람이 이긴다는 믿음을 물려줍시다”라고 연설했다.
- 2002년 03월, 55세 때, 노무현은 이인제의 대선 출마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선을 치르며 '노풍'을 일으켜 판세를 뒤집었다.
- 2002년 04월 27일, 55세 때,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의 마지막 서울 경선에서 승리해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됐다.
- 2002년 05월 03일, 55세 때, 노무현은 아내 권양숙과 고향 봉하마을을 찾아 부모 산소에 참배하고 잡초를 뽑았으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묻는 기자들에게 "살아온 삶 그 자체가 다 가르침이었습니다"라고 답했다.
- 2002년 05월 03일, 55세 때, 노무현은 봉하마을 농기계 창고 앞에서 주민 100여 명과 점심을 함께했다.
2003癸未
-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부당하게 빼앗긴 정수장학회를 유족에게 돌려주려 애썼으나 원상회복을 이루지 못했고, 형에게서 들은 대로 군사쿠데타 세력이 자금 지원을 거절당하자 보복으로 재산을 빼앗았다며 이를 "장물"이라 불렀다.
-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군 생활을 여유 있게 돌아볼 틈은 많지 않았지만, 그 시절 어려움을 견디며 환경을 이겨내는 법을 익혔다고 여겼다.
-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군 시절 일화로, 야전삽과 곡괭이 하나씩만 받고 벙커를 지으라는 지시에 전쟁 때 쳐 둔 유자망을 철사로 쓰고 통나무를 엮어 귀틀집 같은 벙커를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 2003년~2006년, 56~57세 때, 노무현은 퇴임 후 거처를 정하려고 부산 인근 경남 일대의 은퇴자 마을 안내 책자를 구해 여러 곳을 살폈으나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국가 균형발전을 내건 당사자로서 사람들에게 지방행을 권해 놓고 자신은 서울에 남을 수 없다고 보고, 퇴임 후 지방에 내려가 살기로 마음먹었다.
2004甲申
- 2004년 3월 9일 57세 때, 화요일 오후 6시 27분 한나라당 의원 108명+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이 서명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보고됐다.
- 2004년 3월 10일 57세 때, 수요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발의됐다.
- 2004년 3월 11일 57세 때, 목요일 오전 10시 노무현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 2004년 3월 11일 57세 때, 목요일 오후 12시 30분 경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은 한남대교에서 투신 자살했다.
- 2004년 3월 12일 57세 때, 금요일 아침 정동영은 노무현에게 남상국의 자살에 대해 유감과 위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2005乙酉
- 2005년 08월, 58세 때, 노무현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까지 서훈 대상에 포함하도록 지시했다.
60대
2006丙戌
- 2006년 03월, 59세 때, 노무현은 나이지리아 순방 중 일정 없이 하루를 호텔에서 보내며 고민한 아내 권양숙으로부터 고향 봉하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 2006년 03월, 59세 때, 노무현은 고향을 놔두고 다른 곳을 찾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귀국 직후부터 봉하 귀향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 2006년 03월, 59세 때,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여러 차례 자신을 외면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했으나, 정치를 그만둔 만큼 편한 마음으로 가되 이웃으로서 설득할 일은 계속 설득하겠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귀향이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 통합에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랐다.
2007丁亥
- 2007년 02월 24일, 60세 때, 노무현은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을 탈당했고 서거 당시까지 당적을 회복하지 못했다.
- 2007년, 61세 때, 노무현은 대선 과정에서 엄정 중립을 지키며 이른바 'BBK 의혹'과 '도곡동 땅 문제'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한 검찰 수사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 2007년, 61세 때, 노무현은 정치인 시절부터 꿈꿔 왔으나 여러 번 좌절된 토론 사이트 구상을 실현하려고 퇴임 몇 달 전부터 '민주주의 2.0' 운영을 준비했으며, 이를 통해 깨어 있는 시민을 늘리고 자신을 줄곧 외면해 온 고향 지역에 뿌리내리기를 바랐다.
- 2007년, 61세 때, 노무현은 퇴임을 앞두고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사저를 꾸미는 데 공을 들였고, 지붕이 낮아 사저는 '지붕 낮은 집'으로 불렸다.
- 2007년 10월 02일, 61세 때, 노무현은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10·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2008戊子
-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공장 폐수로 오염된 화포천을 되살리려고 주민·지지자들과 함께 쓰레기를 치웠다.
-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국내 전문가와 함께 일본의 손꼽히는 오리농법 전문가를 봉하로 초빙해 주민들과 친환경 오리농법 교육을 받았다.
-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장군차를 길러 봉하마을 특산물로 만들었다.
-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일주일에 엿새씩 정해진 시간에 방문객들을 만나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눴다.
-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귀향 뒤 김해시 관광 수입이 늘어난 일로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소개되며 전직 대통령의 새로운 모습으로 주목받았다.
2009己丑
-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자녀 주택 자금 등의 명목으로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오리농법과 우렁이농법을 쓰는 친환경 재배 면적을 전년의 열 배로 넓혔고, 작목반은 14명에서 50명으로 늘었으며 생산량도 50톤에서 열 배 수준으로 늘 것으로 내다봤다.
-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제초제와 살충제를 쓰지 않고 비료를 줄이는 데서 나아가, 토착 미생물을 배양하고 천연 생물 약재를 만들어 쓰는 수준 높은 생태 농업으로 봉하 농법을 발전시켰다.
-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재배 면적이 열 배로 늘면 독자 도정 시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고 경상남도와 김해시를 어렵게 설득해, 주민 자부담으로 마련한 부지에 건조·보관·도정·포장을 모두 직접 하는 소형 미곡종합처리장(RPC) 형태의 친환경 쌀 방앗간을 짓고 백미와 현미를 함께 공급하기로 했다.
-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해가 바뀌자 오랫동안 정권 교체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함께했던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이 구속되고, 안희정이 다시 검찰 수사 대상이 됐다.
2010庚寅
- 2010년 05월 23일, 사후, 노무현은 1주기 추도식에 맞춰 봉하마을의 박석 묘역이 공개됐고, 이후 여러 추모시설이 차례로 조성됐다.
2012壬辰
- 2012년, 사후, 노무현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로 불거진 'NLL 포기' 논란에 이름이 오르내렸고, 이 논란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
70대
2024甲辰
- 2024년 3월 11일 사후, 목요일 오후 12시 10분 대우건설 법무팀장은 남상국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안되자+대우건설 비자금 수사를 담당하던 채동욱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에게 전화했고+경찰이 한남대교 남단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 2024년 3월 11일 사후, 목요일 오후 12시 25분 남산 소방방재센터로=한남대교에서 한 남자가 투신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2025乙巳
- 2025년, 사후, 노무현은 손바닥에 눈에 띄는 손상이 없었고 추락 당시 생활반응이 있었으며 목 조름 같은 폭행 흔적이나 방어흔은 없었다는 법의학 소견이 서중석 전 국과수 원장을 통해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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