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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다로 : 보름달이 뜬 자리

1018년 음력 10월, 헤이안쿄의 한 축하연. 딸이 천황의 황후로 책봉된 것을 자축하며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시를 읊는다.

보름달이 뜬 자리

1018년 음력 10월, 헤이안쿄의 한 축하연. 딸이 천황의 황후로 책봉된 것을 자축하며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시를 읊는다. "이 세상을 내 세상이라 생각하노라. 보름달처럼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읊은 이는 후지와라 미치나가, 헤이안 시대 최고 권세가였다. 그의 권력은 관직이 아니라 혈연에서 나왔다. 딸을 넷이나 천황과 태자에게 시집보내 외척이 되었고, 천황은 그의 사위이자 손자였다. 왕좌에 앉은 자는 천황이었지만, 왕좌를 설계한 자는 후지와라였다.

천 년 하고도 8년이 지난 2026년 6월 23일, 도쿄의 한 인터넷 방송에서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가 같은 이름을 다시 꺼냈다. "아소가(家)가 후지와라가(家) 아닌가." 겨냥한 상대는 아소 다로 자민당 부총재, 86세. 2008~2009년 총리를 지낸 후쿠오카 재벌가 출신 보수 원로이자, 당내 유일하게 남은 공식 파벌의 수장이다. 그는 총리가 아니다. 얼굴은 다카이치 사나에가 대신 쓰고 있다. 그러나 지난 넉 달, 일본 정치를 움직인 손은 그의 것이었다.

그가 만든 총리

2025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 결선투표, 다카이치 사나에는 고이즈미 신지로와 맞붙었다. 당내 독자 기반이 약했던 다카이치를 밀어 올린 건 정책도 인기도 아니었다. 아소파 수장인 아소가 다카이치 지지를 명확히 선언하자 의원표가 순식간에 결집했고, 다카이치는 54% 대 46%로 승리해 총재가 됐다. 총리 관저의 문이 열린 순간, 다카이치는 이미 아소에게 정치적 빚을 진 채무자였다. 당내 기반이 약한 총리와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원로 — 아소는 자신을 대신할 얼굴을 얻었고, 다카이치는 자신을 지탱할 뼈대를 얻었다.

보름달 아래 두 가문

1947년, 미군정은 황실 재산에 최고 9할의 재산세를 매겨 방계 11개 궁가 51명의 황족 신분을 박탈했다. 그 이후 일본 황실은 남계 남성이 태어나지 않아 승계 자격자가 3명, 그중 젊은 사람은 히사히토 친왕 한 명뿐인 상태로 좁아졌다. 아소의 여동생 노부코는 1980년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과 결혼해 황족이 됐고, 남편이 2012년 사망한 뒤 2025년 개편을 거쳐 자신의 이름을 딴 별도 가문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비가'의 당주가 됐다. 지난 6월 24일 공개된 정부 초안은 양부모 자격을 나루히토 천황 부부와 아키히토 상황 부부, 단 네 명으로 못 박아 두었다. 그런데 단 3시간 심의 끝에 통과된 최종안에서는 그 범위가 달라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만약 노부코에게도 양자를 들일 자격이 주어졌다면, 그가 옛 황족의 아들을 입양하는 순간 그 아들의 아들은 황위 승계권을 가진다. 왕관이 후지와라의 딸을 거쳐 왕좌에 닿았듯, 이번에는 아소의 여동생을 거쳐 닿을 수도 있다.

엎드려 부탁한다

지난 1일, 다카이치가 인도를 방문한 사이 아소의 측근 모리 에이스케 중의원 의장은 여야를 조율해 황실기본법 심의를 최우선으로 하자는 '의장 알선'을 꺼냈다. 아소는 입양안에 반대하던 유신회 대표를 직접 만나 "엎드려 부탁한다"고 했다. 유신회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중의원 정수 감축안은 그 대가로 조용히 접혔다. 총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법안의 운명은 총리 없이 결정되고 있었다. 10일, 중의원 본회의는 단 3시간 심의 만에 개정안을 가결시켰다. 국회를 움직인 건 총리의 권한이 아니라 원로의 인맥이었다.

희생양의 조건

국민 70% 이상이 지지하는 여성 천황안이 배제되고, 80년 가까이 일반인으로 살아온 옛 궁가의 후손이 양자로 들어오는 길이 열렸다. 그 대가는 곧바로 숫자로 돌아왔다. 7월 여론조사에서 주요 8개 언론사 지지율이 일제히 하락해 정권 출범 이후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마이니치는 41%(-10포인트)로 부정 평가가 처음 긍정 평가를 앞질렀고, 시사통신은 취임 후 처음 5할 선이 무너졌다. 그러나 정작 지지율이 빠진 자리에 아소의 이름은 없다. 그는 선거에 나가지 않는다. 책임질 자리에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5월, 아소는 자민당 내 '국력연구회'라는 다카이치 지지 모임의 발족을 주도했다. 명목은 정책 지원이지만, 정치권은 그가 다카이치 이후의 차기 후보군까지 미리 관리하려는 포석으로 읽는다. 다카이치의 지지율이 무너지는 그 순간에도, 아소의 다음 패는 이미 준비돼 있었다.

무관의 섭정

아소 다로는 총리가 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총리를 만들었고, 그 총리의 국회 일정을 결정했고, 그 총리의 지지율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다음 판을 짜고 있었다. 다카이치는 유신회와의 약속을 접었고, 국민 여론과 부딪혔고, 결국 지지율의 절반 가까이를 잃었다. 그 모든 청구서는 얼굴을 가진 사람에게 갔다. 얼굴이 없는 사람은, 이득만 챙겼다. 왕관은 다카이치가 썼다. 그러나 그 왕관을 씌운 손과, 그 왕관이 부서질 때 다치지 않을 손은 처음부터 같은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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