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0억 원의 재구성
2026년 7월 24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가사1부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재산분할 파기환송심 선고기일을 열었다. 이상주 부장판사가 주문을 읽어내려갔다. "피고는 원고에게 재산분할로 9440억 원과 판결 확정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5%의 이자를 지급하라."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파기한 1조 3808억 원에서 4400억 원 가까이 줄어든 숫자였다. 그래도 대한민국 이혼 소송 사상 최대 금액이라는 타이틀은 바뀌지 않았다. 2017년 7월 최 회장의 이혼 조정 신청으로 시작된 소송은 그렇게 9년 만에 새 국면을 맞았다. 선고가 끝난 뒤에도 최 회장과 노 관장, 누구도 법정 밖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100배의 오류
쟁점의 뿌리는 2024년 항소심 판결문의 계산 하나에 있었다. 1998년 최종현 선대회장 별세 당시 SK C&C 주당 가치를 항소심 재판부는 100원으로 계산했다. 실제 가치는 1000원이었다. 10배의 착오는 최종현 선대회장의 기여도를 12.5배로, 최태원 회장의 기여도를 355배로 뒤바꿔 놓았다. 오류를 바로잡자 숫자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선대회장의 기여는 125배로 뛰었고, 최 회장의 기여는 35.5배로 주저앉았다. 자수성가형 경영자라는 전제가 무너지자, 상속 재산이라는 성격이 짙어졌다. 1조 3808억 원을 떠받치던 계산 하나가, 그렇게 무너졌다.
불법원인급여
항소심은 김옥숙 여사가 보관하던 50억 원권 약속어음 6장, 총 300억 원을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기여로 인정했었다. 1991년 태평양증권 인수,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의 뒤에 정권의 방패막이가 있었다는 판단이었다. 대법원의 생각은 달랐다. 민법 746조, 불법원인급여. 재임 중 받은 뇌물을 사돈 가문에 넘겨 국가의 추징을 피하게 한 행위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불법으로 준 돈은 돌려받을 권리도, 기여로 인정받을 자격도 없다. 파기환송심은 이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300억 원은 계산에서 지워졌다. 그런데 같은 소송이 남긴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2024년 항소심 재판부는 최 회장을 향해 "부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 문장은 파기 대상에 없었다. 위자료 20억 원과 함께 그대로 확정됐다. 돈의 죄는 지워졌지만, 사람의 죄는 남았다.
16만 원과 81만 5천 원
남은 싸움은 시점이었다. 최 회장 측은 항소심 변론이 끝난 2024년 4월 16일, 주가 16만 원대를 기준으로 삼자고 했다. 노 관장 측은 파기환송심 변론이 끝난 2026년 6월 26일, 주가 81만 5천 원을 기준으로 삼자고 맞섰다. AI 반도체 호황과 SK하이닉스의 성장이 그 사이 주가를 5배 넘게 밀어올린 탓이었다. 재판부는 2024년 4월 16일을 택했다. 그 이후의 급등은 최 회장의 경영적 기여가 만든 결과이지, 부부 공동재산의 몫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대신 급등 그 자체는 기여율 산정에 반영했다. 숫자로 나누지 못한 몫을, 비율로 나눠준 셈이다.
사과한 남편, 침묵한 아내
선고 직후 최 회장 측 법률대리인은 입장문을 냈다.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했다. 판결문을 받는 대로 이유를 면밀히 검토한 뒤 대법원에 다시 상고할지 결정하겠다고 덧붙였다. 노 관장 측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법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2024년 항소심 선고 당시, SK 주식이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된다는 소식만으로 지주회사 SK㈜ 주가는 장중 15.89%까지 뛰어올랐다. 경영권 분쟁 가능성 그 자체가 재료였다. 이번엔 처음부터 현금 지급으로 못박히면서, 그날의 롤러코스터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최 회장이 보유한 SK㈜ 지분 17.90%는 그대로 남았다.
나뉜 돈, 나뉘지 않은 자리
9440억 원은 여전히 역대 최대 액수다. 그러나 1조 3808억 원에서 4400억 원이 줄어드는 사이, 판결의 무게중심도 옮겨갔다. 불법 자금은 배제됐지만 유책의 문장은 남았다. 계산 오류는 정정됐고, 경영권은 지켜졌다. 노 관장이 받은 것은 돈이었고, 최 회장이 지킨 것은 자리였다. 최 회장은 사과했고, 노 관장은 침묵했다. 9년의 소송 끝에, 재산은 나뉘었다. 자리는 나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