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8일 일요일

윤보선 : 2026년 10월 18일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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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08월 26일, 0세 때, 윤보선은 충청남도 천안군(지금의 아산시)에서 해평 윤씨 집안의 아버지 윤치소와 어머니 이범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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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경, 7~8세 때, 윤보선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가족을 따라 한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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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0월 00일, 9~10세 때, 윤보선은 관립 한성고등소학교(지금의 교동초등학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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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0월 00일, 9~10세 때, 윤보선은 국채보상운동에 자신의 용돈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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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00월 00일, 12~13세 때, 윤보선은 YMCA에 드나들며 이승만, 이상재와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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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00월 00일, 12~13세 때, 윤보선은 교동의 학교 과정을 마치고 서울 충무로에 있던 일본인 학교 일출소학교 5학년으로 옮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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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00월 00일, 14~15세 때, 윤보선은 일출소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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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00월 00일, 15~16세 때, 윤보선은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에 입학했으나 두 학기를 마치고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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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00월 00일, 15~16세 때, 윤보선은 도쿄의 세이소쿠영어학교에 적을 두었다가 중도에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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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00월 00일, 17~18세 때, 윤보선은 민영철의 딸인 여흥 민씨와 혼인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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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2월 00일, 18세 때, 윤보선은 게이오의숙을 그만두고 부산을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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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2월 00일, 18세 때, 윤보선은 첫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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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00월 00일, 19~20세 때, 윤보선은 아버지에게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알리고 독립운동에 몸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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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00월 00일, 19~20세 때, 윤보선은 여름에 인천을 떠나 상하이로 건너가 신규식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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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경, 19~20세 때, 윤보선은 신규식에게서 물가의 갈대처럼 꿋꿋하라는 뜻의 호 해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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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00월 00일, 19~20세 때, 윤보선은 신아동제사와 신한청년당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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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00월 00일, 19~20세 때, 윤보선은 상하이에서 여운형과 함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는 주간 소식지를 펴내는 일을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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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00월 00일, 21~22세 때, 윤보선은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국내 자금을 모으려 중국인 유학생 차림으로 일본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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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00월 00일, 21~22세 때, 윤보선은 동생 윤완선이 국내에서 가져온 3,000원을 독립자금으로 전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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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03월 13일, 22세 때, 윤보선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경기도 의원으로 뽑혀 의정원 최연소 의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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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00일, 23세 때, 윤보선은 잡지 『진단』의 편집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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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06월 00일, 23세 때, 윤보선은 신규식, 신익희 등의 권유로 부인과 함께 중국인 여행자로 가장해 영국 유학길에 올랐고, 42일 뒤 마르세유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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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00월 00일, 27~28세 때, 윤보선은 스코틀랜드의 학교에서 1년을 공부한 뒤 버밍엄의 우드브룩 칼리지에서 다시 1년 동안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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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00월 00일, 27~28세 때, 윤보선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석 달 동안 영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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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00월 00일, 29~30세 때, 윤보선은 에든버러 대학 고고학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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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윤보선은 에든버러 대학 재학 중 신경쇠약에 시달려 2년간 학업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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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2월 00일, 33세 때, 윤보선은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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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2월 00일, 33세 때, 윤보선은 귀국하라는 집안의 독촉에도 1932년까지 유럽 곳곳을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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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03월 16일, 34세 때, 윤보선은 국내 인사들의 요청을 받고 부인과 함께 부산을 거쳐 귀국했고,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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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00월 00일, 38~39세 때, 윤보선은 어머니의 회갑을 기리며 교회를 새로 짓는 비용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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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00월 00일, 39~40세 때, 윤보선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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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00월 00일, 39~40세 때, 윤보선은 부인 여흥 민씨와 사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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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00월 00일, 40~41세 때, 윤보선은 동아일보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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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05월 00일, 40세 때, 윤보선은 월성초등학교에 토지를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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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경, 42~43세 때, 윤보선은 함경도 안변의 별장 등에 머물며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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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01월 00일, 42세 때, 윤보선은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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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02월 00일, 45세 때, 윤보선은 폐렴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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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08월 16일, 47세 때, 윤보선은 이인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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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09월 00일, 48세 때, 윤보선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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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09월 16일, 48세 때, 윤보선은 한국민주당 창당에 앞장섰고 자신의 집을 당의 회합 장소로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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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00일, 48세 때, 윤보선은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과 경기도지사 고문으로 위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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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01일, 48세 때, 윤보선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환영 행사를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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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30일, 48세 때, 윤보선은 송진우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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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00월 00일, 48~49세 때, 윤보선은 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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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06월 15일, 48세 때, 윤보선은 삼의사 유해 봉환 행사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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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01월 26일, 49세 때, 윤보선은 신탁통치 반대 투쟁 조직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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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02월 04일, 49세 때, 윤보선은 남조선과도정부 농상부 고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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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04월 00일, 49세 때, 윤보선은 민중일보를 인수해 사장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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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07월 04일, 49세 때, 윤보선은 국제문제연구회를 공동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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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0월 08일, 50세 때, 윤보선은 한영협회 회장에 취임해 이듬해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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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2월 00일, 50세 때, 윤보선은 장덕수의 빈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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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2월 13일, 50세 때, 윤보선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환영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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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01월 12일, 50세 때, 윤보선은 서울에서 열린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회의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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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04월 00일, 50세 때, 윤보선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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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05월 00일, 50세 때, 윤보선은 한국민주당 서울시당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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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05월 10일, 50세 때, 윤보선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에서 출마했으나 4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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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05월 30일, 50세 때, 윤보선은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실장에 기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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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07월 00일, 50세 때, 윤보선은 국회의장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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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07월 22일, 50세 때, 윤보선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내민 입각 제안을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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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08월 15일, 50세 때, 윤보선은 주중·주일·주미 대사 자리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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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08일, 51세 때, 윤보선은 이충무공기념사업회를 함께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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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5일, 51세 때, 윤보선은 내무부 장관 윤치영이 숙부라는 점을 들어 처음에는 고사했으나 제2대 서울특별시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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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5일경 · 51세 무렵, 윤보선은 서울시장으로서 국민학교 9곳을 세우고 동사무소마다 한글 강습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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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5일경 · 51세 무렵, 윤보선은 서울시장으로서 쓰레기 수거를 시 직영으로 바꾸고 공공 쓰레기통 설치, 신생활운동, 수세식 화장실 보급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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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1월 06일, 51세 때, 윤보선은 서울시장 재임 중 공덕귀와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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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2월 00일, 51세 때, 윤보선은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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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6월 05일, 51세 때, 윤보선은 약 반년 만에 서울시장 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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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6월 06일, 51세 때, 윤보선은 상공부 장관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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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05월 09일, 52세 때, 윤보선은 상공부 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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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00일, 53세 때, 윤보선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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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경 · 53세 무렵, 윤보선은 적십자사 총재로서 목격한 국민방위군 사건의 실상을 이승만에게 알렸다가 이승만의 분노를 샀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과 거리를 두며 야당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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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05월 00일, 54세 때, 윤보선은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고 야당 정치인의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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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05월 00일, 56세 때, 윤보선은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 종로갑에서 출마해 9,485표(32.4%)로 1위를 차지하며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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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06월 00일, 56세 때, 윤보선은 사사오입 개헌에 맞서는 투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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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00월 00일, 57~58세 때, 윤보선은 야당 민주당 창당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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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05월 00일, 58세 때, 윤보선은 신익희가 세상을 떠난 뒤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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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05월 00일, 60세 때, 윤보선은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서울 종로갑에서 22,780표(63.2%)를 얻어 재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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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00월 00일, 61~62세 때, 윤보선은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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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4월 00일, 62세 때, 윤보선은 3·15 부정선거 진상조사단장을 맡아 이승만 정부를 비판했고, 4·19혁명 뒤 민주당 구파를 이끄는 인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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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7월 00일, 62세 때, 윤보선은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서울 종로갑에서 출마해 31,924표(81.9%)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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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8월 00일, 63세 때, 윤보선은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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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8월 12일, 62세 때, 윤보선은 국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재적 259명 가운데 208표를 얻어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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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8월 12일, 62세 때, 윤보선은 대통령 선출에 따라 민의원 의원직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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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8월 13일, 62세 때, 윤보선은 제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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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8월 13일, 62세 때, 윤보선은 국무총리로 김도연을 지명했으나 국회 인준 표결에서 3표가 모자라 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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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8월 13일, 62세 때, 윤보선은 김도연 인준 부결 뒤 민주당 신파의 장면을 국무총리로 다시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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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05월 16일, 63세 때, 윤보선은 오전 9시 30분 청와대에서 군사정변 주도자 박정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올 것이 왔구나'라며 한숨을 쉬었고, 훗날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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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05월 16일, 63세 때, 윤보선은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로부터 정변군 진압을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거듭 받았으나, 휴전선 너머 적을 앞에 두고 국군끼리 피를 흘릴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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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05월 19일, 63세 때, 윤보선은 하야를 결심하고 성명을 냈으나 곧 그 뜻을 거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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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03월 22일, 64세 때, 윤보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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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03월 24일, 64세 때, 윤보선은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사임을 수리받아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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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07월 00일, 65세 때, 윤보선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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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15일, 66세 때, 윤보선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4,546,614표(45.09%)를 얻었으나 박정희에게 15만6,026표 차이로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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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15일, 66세 때, 윤보선은 대선 패배 뒤 자신이 사실상의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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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00일, 66세 때, 윤보선은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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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00월 00일, 66~67세 때, 윤보선은 한일회담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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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00월 00일, 67~68세 때, 윤보선은 야당 통합으로 출범한 민중당 창당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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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08월 05일, 67세 때, 윤보선은 한일협정을 굴욕적 타협이라고 반대하며 민중당을 떠났고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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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00월 00일, 68세 때, 윤보선은 신한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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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02월 05일, 69세 때, 윤보선은 야당 통합으로 만들어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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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04월 00일, 69세 때, 윤보선은 당선 가능성이 보이면 저격한다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계획 아래 자택 주변에 저격수가 배치됐다고, 방준모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 2001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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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05월 03일, 69세 때, 윤보선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개표 도중 한때 앞서기도 했으나 박정희에게 116만여 표 차이로 다시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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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00월 00일, 71~72세 때, 윤보선은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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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00월 00일, 73~74세 때, 윤보선은 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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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00월 00일, 73~74세 때, 윤보선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섰다가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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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00월 00일, 75~76세 때, 윤보선은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꾸려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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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00월 00일, 75~76세 때, 윤보선은 민주구국헌장 발표 사건에 연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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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00월 00일, 76~77세 때, 윤보선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돼 징역 15년을 구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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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03월 01일, 78세 때, 윤보선은 명동성당 3·1절 기념 미사에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문에 김대중, 함석헌 등과 함께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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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03월 10일, 78세 때, 윤보선은 정부가 발표한 민주구국선언 관련자 20명 명단에 포함돼 불구속 입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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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월 10일경 · 78세 무렵, 윤보선은 민주구국선언 사건 1심에서 피고인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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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03월 00일, 79세 때, 윤보선은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민주구국선언 사건 피고인 전원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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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00월 00일, 81~82세 때, 윤보선은 YWCA 위장결혼 사건에 연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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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00월 00일, 81~82세 때, 윤보선은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에 취임한 뒤 정치 일선에서 차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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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00월 00일, 82~83세 때, 윤보선은 서울의 봄 정국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대선 후보 단일화를 주선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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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00월 00일, 82~83세 때, 윤보선은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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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00월 00일, 82~83세 때, 윤보선은 전두환 정부의 국정자문위원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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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00월 00일, 87~88세 때, 윤보선은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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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0월 00일, 88~89세 때, 윤보선은 민족사 바로잡기 국민회의 의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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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00월 00일, 89~90세 때, 윤보선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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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3월 30일, 92세 때, 윤보선은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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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7월 18일, 92세 때, 윤보선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퇴원한 뒤 서울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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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7월 18일, 사후, 윤보선은 인촌문화상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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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7월 23일, 사후, 윤보선은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서 서울 안국동 안동교회에 모인 가족과 사회 인사 1,000여 명의 배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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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7월 23일, 사후, 윤보선은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의 집안 선영에 안장됐다.

윤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