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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없는 노무현 정신
2002.04.27~2007.02.24·1화노무현 : 노무현 없는 노무현 정신
2026년 10월 05일 월요일
노무현 : 2026년 10월 16일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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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09월 01일, 0세 때, 노무현은 경상남도 김해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과수 농사를 짓던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 사이 3남 2녀 중 막내로 음력 8월 6일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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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09월 01일, 0세 때, 노무현은 난산 끝에 남산병원 원장이 집게로 끌어내 세상에 나왔고, 그때 생긴 자국이 어린 시절 머리와 어깨에 한동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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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4세 때, 노무현은 손재주 좋은 작은형이 만든 스케이트·팽이·새총 같은 장난감을 울며 떼써 손에 넣곤 했고, 훗날 울기만 하면 언제든 자기 것이 되었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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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6세 때, 노무현은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워 모두 외웠고, 주변에서 '노(盧)천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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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6세 때, 노무현은 봉화산 일대로 소풍 온 읍내 학생들이 일부러 집까지 찾아와 구경할 만큼 이름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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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체구가 작고 야무지다는 이유로 '돌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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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봉화산과 들판에서 친구들과 칡을 캐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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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자왕골 등 야산을 돌아다니며 풀과 나무 이름을 익혔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삼지구엽초' 같은 식물 이름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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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겨울에 드물게 눈이 내리면 마을 친구들과 봉하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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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대창초등학교까지 10리 길을 매일 걸어 다녔고, 그 등굣길을 친구들과 장난치는 놀이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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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주머니칼과 물총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학교 책값 통지서를 고쳐 부모님을 여러 번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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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방과 후 자왕골에서 친구들과 공치기·자치기·전쟁놀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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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꼴망태를 메고 소를 모는 친구들을 보다가 자기 집에는 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처음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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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농토를 모두 판 집안에서 어머니가 고구마순을 길러 판 돈으로 학비를 대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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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초등학교에서 읍내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로 갈린 무리 가운데 시골 아이들 쪽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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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훗날 신문 기고문을 통해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주머니를 뒤지는 버릇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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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사람을 믿지 마라, 남을 위해 나서지 마라"는 어머니의 지론을 거듭 들으며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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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마름 출신 지주와 소작인의 분쟁에서 이해관계 없이 소작인 편에 서서 청원하고 법정 증언까지 했던 일화를 즐겨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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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인근 마을의 유일한 대학생이던 큰형 노영현을 또래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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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큰형이 대학생 친구들과 벌이는 시국 논쟁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곁에서 지켜보며 우쭐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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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어린 시절 마을에서 돈 이야기보다 '빽' 이야기를 더 자주 들으며 컸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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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세 때, 노무현은 진영대창국민학교 1학년에서 67명 중 2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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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03월 02일, 6세 때, 노무현은 진영 읍내의 대창초등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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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8세 때, 노무현은 2학년에서 62명 중 1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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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8세 때, 노무현은 새 학용품을 살 형편이 못 돼 누나가 쓰던 찌그러진 필통을 물려받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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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대창초등학교 4학년 학급 임원을 맡아 자습 시간에 급우들의 공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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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4학년 담임 김종대 선생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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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급장으로 있으면서 순진한 짝꿍을 꾀어 그의 새 필통을 자기 낡은 필통과 바꿨다가, 친구들의 비난을 받고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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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학교 친구들에게서 자유당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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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0세 때, 노무현은 큰형 방에 있던 잡지와 책을 읽고 유행가를 따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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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1세 때, 노무현은 체육 시간 당번을 서다 친구와 함께 교실에 있던 새 가방을 면도칼로 찢었고, 담임의 추궁에도 끝까지 털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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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1세 때, 노무현은 '두뇌가 명민하고 자발성이 풍부해 어른스러우며 성적도 매우 좋으나 다소 게으르다'는 학교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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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1세 때, 노무현은 과수원 복숭아 판 돈에 손대 하모니카를 샀다가 들켰고, 부모가 죄 없는 작은형을 의심하자 이튿날 울며 잘못을 빌었으며 이후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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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두뇌가 명민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며 성적이 우수하나 몸이 약하다'는 학교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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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6학년 담임 신종생 선생에게 휴일과 방학에도 불려 가 공부를 배웠고, 통학 거리가 멀어 선생의 자취방에서 자고 끼니를 얻어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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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신종생 선생이 전교회장 선거 출마를 권하자 처음엔 사양했으나, 용기가 없다는 선생의 꾸지람에 자극받아 출마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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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밤새 정견 발표 원고를 준비했고, 연단에 얼굴이 가릴 만큼 키가 작자 "고추가 작아도 맵다"는 말로 청중을 웃겼다.
38
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대창초등학교 전교회장 선거에서 502표 중 302표를 얻어 당선됐다.
39
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2등에 올랐으나, 1등 학생이 규정을 어기고 새 습자지를 받아 쓴 것에 항의하며 상을 반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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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을 비판하는 어머니의 말을 되풀이해 들었다.
41
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지지 후보가 당선되자 춤추며 기뻐하던 어머니가, 그 정치인이 자유당에 들어가자 실망해 욕하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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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세 때, 노무현은 하굣길에 소송 당사자들이 깡패에게 맞아 피를 흘리며 마을로 돌아오는 광경을 봤고, 큰형이 나서면서 싸움이 커져 아버지까지 봉변을 당했다.
43
1959년, 13세 때, 노무현은 중학교에 들어간 뒤 사춘기를 맞아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공부를 등한시했고, 결석하는 날도 잦았으며 일부러 삐딱하게 옷을 입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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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02월 10일, 12세 때, 노무현은 우수 학생으로 교육감상을 받으며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했다.
45
1959년 03월, 12세 때, 노무현은 어머니가 교사인 큰형수에게 부탁해 진영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했으나, 큰형수가 큰형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하자 자존심이 상한 큰형이 돈을 돌려주면서 입학금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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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03월, 12세 때, 노무현은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가 여름 복숭아 농사로 입학금을 내겠다고 사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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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03월, 12세 때, 노무현은 교감에게서 농사나 배우라며 큰아들이 대학을 나와도 놀고 있는데 공부시켜 뭐 하느냐는 말을 듣고 화가 나 입학 원서를 찢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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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03월, 12세 때, 노무현은 교무실을 나서는 길에 교감에게서 공부시켜 봐야 깡패밖에 안 될 아이라는 폭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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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03월, 12세 때, 노무현은 이튿날 큰형이 학교를 찾아가 교감의 발언을 따지며 항의한 덕분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50
1959년 03월 02일, 12세 때, 노무현은 진영중학교에 입학했다.
51
1960년, 14세 때, 노무현은 훗날 가훈을 묻는 이들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갈대처럼 살아라"가 집안의 가훈이라고 냉소적으로 답하곤 했다.
52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앞두고 진영중학교에서 열린 찬양 글짓기 대회를 부당하다고 보고 급우들에게 백지를 내자고 설득해 반 전체가 백지를 제출하게 했다.
53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답안지에 '우리 이승만(택)통령'이라고만 적고 이름을 써 냈고, 시험을 감독하던 여교사가 울음을 터뜨렸다.
54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백지동맹 주동으로 교무실에서 하루 종일 벌을 섰고, 그사이 교감에게서 역적 같은 놈이라는 핀잔을 들었다.
55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반성문을 쓰지 않고 집으로 달아났다가, 옳다고 믿고 한 일이면 끝까지 당당히 버텼어야 한다는 큰형의 꾸지람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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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이튿날 지각해 주임 교사의 사택으로 불려가 반성문을 쓰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반성 대신 백지동맹의 경위만 적어 제출했다.
57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는 주임 교사의 물음에 과거엔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지만 지금은 독재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58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누구에게 그런 말을 배웠느냐는 질문에 형님에게서 들었다고 답했고, 반성문을 다시 쓰라는 강요에도 끝내 쓰지 않았다.
59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주동한 일로 1주일간 정학 처분을 받았다.
60
1960년 02월, 13세 때, 노무현은 이승만 찬양 작문 문제로 학교가 소란해지자 전학을 권하는 큰형과 학교에 가서 빌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처신을 요구받았다.
61
1961년, 15세 때, 노무현은 진영중학교 3학년 재학 중 건강이 나빠져 1년간 휴학했다.
62
1962년, 16세 때, 노무현은 진영중학교 3학년 때 부일장학생 시험에 붙어 장학금을 받았다.
63
1962년, 16세 때, 노무현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가난한 집안 사정상 빨리 돈을 버는 편이 낫다고 보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수험서를 사서 5급 공무원(현 9급) 시험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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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6세 때, 노무현은 이를 눈치챈 큰형 노영현이 고등학교 진학을 강하게 권하자 그 뜻을 받아들여 부산상고 진학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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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6세 때, 노무현은 고등학교 때까지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고, 어머니는 잘 먹이지 못해 아들이 자라지 못했다며 늘 마음 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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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7세 때, 노무현은 방학마다 진영에 돌아와 환갑을 넘긴 부모가 산기슭을 일궈 고구마를 심고 취로사업에 나가며 고구마순을 팔아 생계를 잇는 모습을 봤고, 거의 매일 저녁을 메밀죽으로 때우며 큰형을 원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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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7세 때, 노무현은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가난한 봉하마을을 내려다보며 좌절하다가도, 사자바위에서 화포천까지 이어진 진영 들판과 부산행 기차를 바라보며 가난을 견디고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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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7세 때, 노무현은 부산 범일동의 한 소화기 판매회사 사무실에서 야간 경비를 서며 라면으로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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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1965년, 16~17세 때, 노무현은 고등학생 시절 권양숙과 가끔 마주치면 설레었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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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03월, 16세 때, 노무현은 단정한 차림의 은행원이 된 자신을 그리며 그것을 가난을 벗어나는 첫 단계로 삼기 시작했다.
71
1963년 03월, 16세 때, 노무현은 진영을 떠나 3년 동안 하숙·자취·입주 가정교사·빈 공장 숙직실 등 조금이라도 싼 거처를 찾아 부산 곳곳을 옮겨 다녔고, 영주동 작은누나 집에 신세 지는 날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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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03월 02일, 16세 때, 노무현은 대학 진학을 꿈꿀 형편이 아니었기에 졸업 후 농협 취업을 최선으로 여기며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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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8세 때, 노무현은 초량동 급우 집에서 밥을 얻어먹거나 가끔 묵었고, 그것도 어려우면 학교 근처 '아세아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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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8세 때, 노무현은 현실의 고통에 짓눌려 공부에서 멀어지며 시험을 빼먹고 술과 담배를 배웠고, 2학년 성적은 502명 중 48등에서 213등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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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8세 때, 노무현은 가장 힘들던 무렵 어머니에게 이 넓은 세상에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다며 원망 섞인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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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독서실 총무의 지나친 통제에 맞서 책상 위에 올라가 총무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고, 이 일로 독서실 분위기가 바뀌며 오히려 총무와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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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독서실 총무였던 부산상고 1년 후배 최도술과 인연을 맺었고, 그를 훗날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국회의원 보좌관, 청와대 총무비서관으로 곁에 두었다.
78
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3학년이 되면서 흐트러졌던 마음가짐을 조금씩 바로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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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졸업 뒤 부모를 모시겠다고 결심하고 농협 입사를 목표로 공부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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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취업반인 3학년 3반에서 입사시험 대비 아침 보충수업을 들었고, 부기와 상식에 자신이 있어 정규 수업 직전에야 교실에 들어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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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취업을 위해 주산·부기·타자 자격증을 따며 성적을 462명 중 59등까지 끌어올렸다.
82
1965년, 19세 때, 노무현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결혼 후 그만두고 실업자로 지내는 큰형의 좌절을 곁에서 지켜봤다.
83
1965년 11월, 19세 때, 노무현은 졸업을 앞둔 초겨울 머물 곳이 없어 학교 교실에서 홀로 이틀 밤을 추위에 떨며 보냈고, 이튿날 이가 아파 밥을 한술도 뜨지 못했다.
84
1965년 12월, 19세 때, 노무현은 도마다 한 명씩만 뽑는 농협 입사시험에서 떨어졌다.
85
1966년, 20세 때, 노무현은 《고시계》 사법시험 합격기에 4개월가량 준비해 예비시험에 붙은 행운으로 그때까지의 고된 싸움이 끝났다고 적었고, 자신의 합격에 자극받아 큰형이 1967년, 작은형이 1968년에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밝혔다.
86
1966년, 20세 때, 노무현은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87
1966년 02월, 19세 때, 노무현은 졸업을 앞두고 학교가 소개한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의 어망 제조업체 삼해공업에 취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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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03월, 19세 때, 노무현은 동기 졸업생 넷과 함께 삼해공업에 들어가 한 달 뒤 첫 월급 2700원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대기업 신입 초봉 1만 원, 공무원 초봉 6000원에 크게 못 미치는 액수였다.
89
1966년 04월, 19세 때, 노무현은 월급이 기대보다 훨씬 적자 함께 입사한 신입사원 넷과 상의한 끝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뜻을 모았다.
90
1966년 04월, 19세 때, 노무현은 사장을 찾아가 사직 의사를 밝혔고, 사장은 월급을 4000원으로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91
1966년 04월, 19세 때, 노무현은 동기들이 오른 월급에 만족해 남은 것과 달리 이미 마음이 떠나 있어, 동료 한 명과 함께 처음 결심대로 삼해공업을 나왔다.
92
1966년 04월, 19세 때, 노무현은 한 달 반 치 월급 6000원으로 기타와 사법시험용 헌 고시책 몇 권을 사고, 남은 돈으로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본 뒤 고향 진영으로 돌아갔다.
93
1966년 05월, 19세 때, 노무현은 실직해 집에 와 있던 작은형 노건평의 도움을 받아 뱀산 자락에 흙집을 짓고 사법시험 도전을 정식으로 시작했다.
94
1966년 05월, 19세 때, 노무현은 흙집이 완성되자 아버지에게서 옥을 갈듯 공부에 힘쓰라는 뜻의 '마옥당(磨玉堂)'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95
1966년 05월, 19세 때, 노무현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 사법시험에 앞서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이라는 자격시험부터 통과해야 했다.
96
1966년 05월, 19세 때, 노무현은 마옥당에서 책을 펴도 생계 걱정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에 집중하지 못했고, 책값이라도 벌려고 울산 한국비료 공장 건설 현장을 찾아가 막노동을 했다.
97
1966년 06월, 19세 때, 노무현은 울산 공사판에서 일당 180원을 받았지만 세 끼 밥값 105원을 빼면 75원만 남았고, 일감이 없는 날이 많아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98
1966년 06월, 19세 때, 노무현은 공사장 인근 밭에서 배를 훔치고 닭서리를 하기도 했다.
99
1966년 06월, 19세 때, 노무현은 밀린 밥값이 2000원을 넘자 일하러 간다고 둘러대고 식당 주인 몰래 울산역으로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00
1966년 06월, 19세 때, 노무현은 여전히 어려운 집안 형편에 작은형과 돈벌이를 궁리하다 김해 농업시험장에서 감나무 묘목 100그루가량을 훔쳐 왔다.
101
1966년 07월, 19세 때, 노무현은 묘목을 싸 온 신문지를 펼치다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 공고를 발견했는데,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넉 달뿐이었다.
102
1966년 11월, 20세 때, 노무현은 예비시험을 치른 뒤 다시 울산 합숙소로 가 예전에 떼먹은 밥값을 갚아 나가던 중, 넘어진 큰 목재에 얼굴을 맞아 치아 3개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져 입원했다.
103
1966년 12월, 20세 때, 노무현은 입원 중 친구를 통해 예비시험 합격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합격 소식은 집안의 경사가 됐다.
104
1967년, 21세 때, 노무현은 법률 서적을 살 돈이 없어 사법시험 대신 예비시험 과목을 다시 공부하다가 이듬해 입대했다.
105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군 복무 내내 왜 쓸데없는 일을 해야 하느냐는 회의에 시달렸고, 전쟁이 실감 나지 않는 상황에서 혹독한 훈련을 견디는 것을 힘겨워했다.
106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영어책과 법률책을 늘 지니고 다니며 집에서 책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조바심과 달리 정작 공부는 잘되지 않았다.
107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군 생활 중 호남 지역에 대한 편견을 처음 접했고, 이를 평생 맞선 지역구도를 처음 체감한 계기로 정치인 시절 자주 이야기했다.
108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복무하며 월급이 차츰 올라 제대 무렵 440원을 받았고, GP 근무 때는 별도 수당도 받았다.
109
1968년~1971년, 21~22세 때, 노무현은 군대에서도 집안 막내로서 형들에게 신세를 지며 돈을 부쳐 달라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
110
1968년 03월, 21세 때, 노무현은 강원도 원주 제1야전군사령부 부관부에 행정병으로 배치돼 첫 군 생활을 시작했고, 수시로 떨어지는 '사역 집합' 구호에 가장 먼저 뛰어나가는 신병이었으며 연병장 클로버 뽑기 같은 가벼운 사역을 맡기도 했다.
111
1968년 03월, 21세 때, 노무현은 부관부 사역이 주로 일과가 없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몰려 휴식 시간을 고스란히 내줘야 했다.
112
1968년 03월, 21세 때, 노무현은 클로버 뽑기 사역 때는 눈치를 봐 가며 적당히 요령을 피웠다.
113
1968년 03월 05일, 21세 때, 노무현은 육군에 입대해 창원 제39사단 훈련병으로 입소했다.
114
1968년 03월 07일, 21세 때, 노무현은 이병 월급이 390원이던 시절 군번 '51053545'를 부여받았다.
115
1968년 11월, 22세 때, 노무현은 눈이 귀한 고향과 달리 눈이 많은 부대에서 첫눈을 보고 무심코 감탄했다가 선임병에게 눈물이 찔끔 날 만큼 혼났고, 그제야 제설 작업이 얼마나 고된지 깨달았다.
116
1969년, 23세 때, 노무현은 원주 사령부 부관부에서 담뱃값 정도만 남는 근무를 1년쯤 하다가 부대 일부를 전방으로 보낸다는 소식에 곧바로 자원해 인제 제12보병사단 제52보병연대로 옮겼다.
117
1969년, 23세 때, 노무현은 자원은 했지만 전방으로 가는 버스에서 자신감을 잃었고, 사방이 가파른 산에 막혀 하늘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오지에 닿아서야 '인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말을 실감했다.
118
1969년, 23세 때, 노무현은 사령부 부관부의 고생 탓에 보병중대 배치를 바랐으나, 대대 CP 대기 중 졸면 목이 달아난다는 선배들의 겁주기에 결국 대대장 당번병이 되어 건봉산 대대 상황실에서 정보상황병으로 몇 달을 지냈다.
119
1969년, 23세 때, 노무현은 대대 상황실 근무가 철책 근무보다는 나았지만 쉬는 날 없이 밤을 지새우고 낮에 쪽잠을 자야 했으며, 특히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을 버거워했다.
120
1970년, 24세 때, 노무현은 전방 철책 중대 본부로 옮겼다가 소대까지 내려가 철책과 GP 근무를 마친 뒤 제대했다.
121
1970년, 24세 때, 노무현은 어느 날 밤 철책선에 나가 실탄 80발을 허리에 차고 4킬로그램짜리 M1 소총을 든 채 12시간 넘게 보초를 섰고, 낮에는 사역과 김치 담그기, 벙커 공사까지 해야 했다.
122
1970년, 24세 때, 노무현은 4개월가량 GP에서 근무하며 실탄을 휴대한 긴장 속에서도 동료들이 서로 이해하고 돕는 모습을 보며 전우애와 함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얻었다.
123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고교 졸업 후 부산에서 지내던 같은 마을 출신 권양숙이 할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돌아오면서 다시 만났는데, 권양숙은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124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사법시험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권양숙에게 마음이 끌려 구애했으나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125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독학으로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에서도 연애를 병행하려 할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126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공부에 크게 매달리지 않던 시기 심심하면 휘파람으로 권양숙을 불러내 새벽까지 함께 돌아다녔고, 이 때문에 장모 눈에는 딸을 굶길 사윗감으로 비쳤다.
127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공부 틈틈이 권양숙을 만나 책을 빌려주고 받으며 읽은 내용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128
1971년, 25세 때, 노무현은 권양숙이 결혼 적령기를 넘겼다는 사정과 고시와 연애는 함께할 수 없다는 주변 여론 사이에서 둘 다 고민했고, 마음이 깊어질수록 공부 시간에 대한 집착도 커져 내적 갈등을 겪었다.
129
1971년 01월 23일, 24세 때, 노무현은 입대 무렵 터진 김신조 사건 여파로 30개월이던 복무 기간이 34개월 반으로 늘어난 끝에, 베트남전 참전자가 많아 병장을 달지 못하고 상병으로 만기 전역해 고향에 돌아왔으며, 두 형이 5급 공무원이 되어 형편이 나아진 집에서 다시 사법시험에 전념하기로 했다.
130
1971년 04월, 24세 때, 노무현은 뱀산의 마옥당을 고치고 공부에 몰두했다.
131
1971년 05월 02일, 24세 때, 노무현은 3급 공무원(현 행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인 사법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132
1971년 09월, 25세 때, 노무현은 법률책을 소설 읽듯 빠르게 넘기며 4개월 동안 전 과목을 세 번 읽었으나, 그것이 피상적인 공부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133
1971년 09월, 25세 때, 노무현은 8개월 동안 끈질기게 구애한 끝에 1차 시험을 앞두고 권양숙의 마음을 얻었다.
134
1971년 09월, 25세 때, 노무현은 여름이 끝나갈 무렵 산기슭 흙집에서 덮을 담요를 집에서 가져가다 둑길에서 권양숙과 함께 걸었는데, 이 장면을 본 누군가의 입을 통해 담요를 들고 연애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져 해명도 못 하고 망신을 당했다.
135
1971년 10월, 25세 때, 노무현은 제14회 사법시험 공고가 나자 들뜬 마음으로 문제집을 사서 직접 밑줄 친 부분만 골라 읽었다.
136
1971년 10월, 25세 때, 노무현은 권양숙과 본격적으로 사귄 지 얼마 안 돼 청혼했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았고, 이후에도 둑길을 밤늦게까지 함께 걸으며 연애를 이어갔다.
137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직접 고안한 개량 독서대를 만들었다.
138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촛불을 켜고 공부해야 하는 마옥당보다 장유암이 편하다고 느꼈지만, 마을까지 한 번 내려오는 데 두 시간씩 걸렸다.
139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상고 출신 시골 청년이라는 이유로 권양숙 집안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140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권양숙의 아버지가 좌익 활동으로 복역하다 숨진 이력 때문에 연좌제가 살아 있던 당시 사법시험에 붙더라도 판검사 임용이 막힐 수 있다는 우려에 직면했다.
141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학벌과 집안이 좋은 규수와의 혼사를 바라던 자기 집안의 반대에도 부딪혔다.
142
1972년, 26세 때, 노무현은 양가의 반대 속에서도 권양숙과 다투며 관계를 지켜 나간 끝에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아냈다.
143
1972년 06월, 25세 때, 노무현은 8개월가량 준비해 제14회 사법시험 2차 시험에 응시해 평균 50점을 넘겼으나 합격하지 못했고, 이후 다음엔 붙을 것이라 여기며 대여섯 달을 흘려보냈다.
144
1972년 09월, 26세 때, 노무현은 마음을 다잡고 김해의 절 장유암에 들어갔다.
145
1972년 09월, 26세 때, 노무현은 장유암에서 훗날 청와대 민정수석이 된 박정규, 총무비서관이 된 정상문과 함께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146
1973년, 27세 때, 노무현은 국사 과목이 새로 추가돼 부담이 커졌으나 제15회 사법시험이 7월로 미뤄지며 숨을 돌렸다.
147
1973년, 27세 때, 노무현은 벽에 '수석 합격'이라는 표어를 붙이고 공부에 매진했다.
148
1973년, 27세 때, 노무현은 거듭 낙방하는 동안 아이를 업고 매일 논길을 건너 마옥당까지 밥을 날라준 권양숙 덕분에 공부를 이어갔다.
149
1973년, 27세 때, 노무현은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지 대신 작은형이 부모 봉양과 자신의 책값·용돈, 아들 건호의 우윳값까지 맡아준 덕분에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150
1973년 01월, 26세 때, 노무현은 2년 가까운 연애 끝에 양가 반대를 넘어 권양숙과 결혼했다.
151
1973년 05월, 26세 때, 노무현은 결혼 4개월 만에 아들 노건호를 얻었다.
152
1973년 05월, 26세 때, 노무현은 아들이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자신을 아끼며 못다 이룬 꿈까지 걸었던 큰형 노영현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153
1973년 05월, 26세 때, 노무현은 큰형을 묻고 장유암으로 돌아오는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상심했고, 삶과 죽음, 사법시험과 출세에 대한 회의가 겹쳐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154
1973년 05월, 26세 때, 노무현은 '수석 합격' 대신 '천직=소명'이라는 문구를 붙이고, 낮에는 마옥당에서, 밤에는 집에서 여유 있을 때 공부하는 생활로 바꿨다.
155
1973년 07월, 26세 때, 노무현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누르고 제15회 사법시험에 응시했으나, 극심한 긴장 속에 합격 정원 60명에 못 미치는 90위 안팎의 성적으로 떨어졌다.
156
1974년, 28세 때, 노무현은 별다른 준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제16회 사법시험을 치렀으나, 전년보다 낮은 130위 안팎의 성적으로 또 떨어졌다.
157
1975년, 29세 때, 노무현은 사법연수원 제7기에 들어가 60명 중 47등으로 수료했다.
158
1975년 01월, 28세 때,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을 앞두고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귀가하는 규칙적인 생활로 마음을 다잡았다.
159
1975년 03월 27일, 28세 때,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그해 합격자 가운데 대학을 거치지 않은 고졸 출신은 그 한 명뿐이었다.
160
1975년 05월, 28세 때, 노무현은 자신이 고안한 개량 독서대를 특허국(현 지식재산처)에 실용신안으로 출원했다.
161
1975년 06월, 28세 때, 노무현은 《고시계》 1975년 6월호 '제17회 사법시험 합격자 좌담회'에 참석해 가끔 동료들과 산 너머에서 막걸리를 마신 일이 큰 손실이었다고 말했다.
162
1976년 01월 17일, 29세 때, 노무현은 아버지 노판석을 여의었다.
163
1977년, 31세 때, 노무현은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164
1977년 12월, 31세 때, 노무현은 경제적인 이유로 임용 7개월 만에 판사직에서 물러났다.
165
1978년, 32세 때, 노무현은 등기 업무까지 맡아 부산 지역 사법서사들의 반발을 샀다.
166
1978년 05월, 31세 때, 노무현은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조세 전문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167
1981년, 35세 때, 노무현은 김광일 변호사의 요청으로 부림 사건 변호인단에 합류했다.
168
1981년, 35세 때, 노무현은 부림 사건 피해자를 접견하다 고문 흔적을 발견한 뒤 변론에 온 힘을 쏟으며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169
1982년, 36세 때, 노무현은 부산 서구에서 노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중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온 문재인을 만나 의기투합해 함께 사무소를 꾸렸다.
170
1985년, 39세 때, 노무현은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고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었다.
171
1987년, 41세 때, 노무현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의 선두에 섰다.
172
1987년, 41세 때, 노무현은 연설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가도 마이크를 놓지 않고 연설을 계속했다.
173
1987년 08월, 40세 때, 노무현은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 사건과 관련해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으나, 법원이 영장을 기각해 풀려났다.
174
1987년 11월, 41세 때, 노무현은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175
1988년, 42세 때, 노무현은 정치인이 된 뒤에야 군 시절 품었던 회의적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176
1988년 04월, 41세 때, 노무현은 김영삼의 권유로 통일민주당에 들어가 부산 동구에 출마했고, 5공 실세 허삼수 후보를 누르고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77
1988년 11월, 42세 때, 노무현은 5공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정주영, 장세동 등을 상대로 날카롭게 질의하며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78
1989년 12월 31일, 43세 때, 노무현은 5공비리특위·광주특위 연석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증언 뒤에도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며 자신의 명패를 국회 단상에 던졌다.
179
1990년 01월, 43세 때, 노무현은 3당 합당에 반대해 김영삼과 갈라서고, 통일민주당에 남은 세력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180
1992년 03월, 45세 때, 노무현은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다시 출마했으나 4년 전 이겼던 허삼수와의 재대결에서 낙선했다.
181
1995년, 49세 때, 노무현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나섰으나 민주자유당 문정수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182
1996년, 50세 때, 노무현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이명박, 이종찬에 이어 3위로 낙선했다.
183
1996년, 50세 때, 노무현은 낙선 뒤 김원기, 이부영 등과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꾸렸다.
184
1997년, 51세 때, 노무현은 통추의 진로를 두고 노선이 갈리자 한나라당 대신 새정치국민회의를 택해 입당했고, 부총재를 맡아 김대중의 대선 승리에 힘을 보탰다.
185
1998년 02월, 51세 때, 노무현은 이명박 의원의 사퇴로 빈 종로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나서기 위해 서울시장 출마 계획을 접었다.
186
1998년 02월 18일, 51세 때, 노무현은 어머니 이순례를 여의었다.
187
1998년 07월, 51세 때, 노무현은 종로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돼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다.
188
2000년~2001년, 54~54세 때,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일하며 관용차 의전과 지방 출장 때 고급 차량을 동원하던 관행을 없애는 등 권위주의를 걷어냈다.
189
2000년 04월, 53세 때, 노무현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를 떠나 지역주의 극복을 내걸고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으나, 35.69%를 얻는 데 그쳐 허태열 후보에게 졌다.
190
2000년 04월, 53세 때, 노무현은 부산 북·강서을 낙선을 계기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에 공감한 지지자들이 인터넷 모임 노사모를 만들었다.
191
2000년 08월 07일, 53세 때,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에 취임하며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라는 취임사로 직원들의 책임 부담을 자신이 지겠다고 밝혔다.
192
2001년 03월, 54세 때,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정치 토론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며 활동했다.
193
2001년 12월, 55세 때,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새천년민주당 경선에 뛰어들었다.
194
2002년 03월, 55세 때, 노무현은 이인제의 대선 출마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선을 치르며 '노풍'을 일으켜 판세를 뒤집었다.
195
2002년 04월 27일, 55세 때,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의 마지막 서울 경선에서 승리해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됐다.
196
2002년 05월 03일, 55세 때, 노무현은 아내 권양숙과 고향 봉하마을을 찾아 부모 산소에 참배하고 잡초를 뽑았으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묻는 기자들에게 "살아온 삶 그 자체가 다 가르침이었습니다"라고 답했다.
197
2002년 05월 03일, 55세 때, 노무현은 봉하마을 농기계 창고 앞에서 주민 100여 명과 점심을 함께했다.
198
2002년 05월 03일, 55세 때, 노무현은 경선 내내 좌익 경력 시비로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장인의 묘(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를 피하지 않고 찾아가 참배했다.
199
2002년 06월, 55세 때, 노무현은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이 참패하자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당무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했다.
200
2002년 11월, 56세 때, 노무현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와의 여론조사 방식 후보 단일화에서 이겨 단일 후보가 됐다.
201
2002년 12월 18일, 56세 때, 노무현은 대선 전날 밤 정몽준이 지지를 철회하자 그의 집을 직접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섰다.
202
2002년 12월 19일, 56세 때, 노무현은 투표율 70.8%의 선거에서 48.91%를 얻어 46.58%의 이회창 후보를 근소하게 제치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3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부당하게 빼앗긴 정수장학회를 유족에게 돌려주려 애썼으나 원상회복을 이루지 못했고, 형에게서 들은 대로 군사쿠데타 세력이 자금 지원을 거절당하자 보복으로 재산을 빼앗았다며 이를 "장물"이라 불렀다.
204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군 생활을 여유 있게 돌아볼 틈은 많지 않았지만, 그 시절 어려움을 견디며 환경을 이겨내는 법을 익혔다고 여겼다.
205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군 시절 일화로, 야전삽과 곡괭이 하나씩만 받고 벙커를 지으라는 지시에 전쟁 때 쳐 둔 유자망을 철사로 쓰고 통나무를 엮어 귀틀집 같은 벙커를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206
2003년~2006년, 56~57세 때, 노무현은 퇴임 후 거처를 정하려고 부산 인근 경남 일대의 은퇴자 마을 안내 책자를 구해 여러 곳을 살폈으나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207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국가 균형발전을 내건 당사자로서 사람들에게 지방행을 권해 놓고 자신은 서울에 남을 수 없다고 보고, 퇴임 후 지방에 내려가 살기로 마음먹었다.
208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개발·투기 바람이 불던 진영읍 일대의 규제를 더 풀지 못하게 하고 농지를 묶어 두었다.
209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어린 시절 기억에 기대어 건설교통부에 화포천 습지 보존과 치수 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으나, 하수종말처리장 건설과 천변 저류지용 사유지 대량 매입 등 3,400억 원 규모로 설계된 사업은 지주들의 반발과 습지보호구역 지정에 대한 주민들의 무관심으로 무산됐다.
210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 람사르 세계습지총회의 창원 유치를 이끌며 퇴임 후 자원봉사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211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역대 대통령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았던 관행을 바꾸려고 대통령 기록물을 국가가 관리하도록 하는 법률을 만들고 대통령기록관을 세웠다.
212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법 밖의 권력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인사권만으로 국정을 이끌었으며, 검찰·국세청·국가정보원과 거리를 두고 언론과도 손잡지 않았다.
213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분열과 편 가르기의 상징으로 그려지는 것을 거부하며 한 정파의 수장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10년 변화를 이끄는 지도자보다 30년 뒤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정치인으로 남고자 했다.
214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남아메리카 순방을 마친 지 나흘 만에 동남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떠나는 등 빡빡한 순방을 소화했고, 모스크바를 방문하고도 붉은 광장을 둘러보지 못했으며, 필요하면 1박 3일 일정의 미국 방문도 마다하지 않으며 형식보다 정상들과의 대화를 통한 설득을 중시했다.
215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정치인 시절부터 의례적인 행사를 꺼려,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낼 수 있을 때만 참석에 적극적이었다.
216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쟁점을 꺼내기도 했고, 지지율을 높이려 이미지를 연출하지 않았으며, 말을 둘러싼 시비만큼은 줄이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217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취임 초 '성공한 대통령이 되라'는 주변의 덕담을 큰 부담으로 느끼며 실현 가능한 주문인지 여러 차례 회의했다.
218
2003년~2008년, 56~57세 때, 노무현은 취임 무렵부터 참여정부 정책이 입안·토론·시행되는 과정을 실제 사례로 연구해 미래 정부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싶다는 뜻을 참모들에게 여러 차례 밝혔다.
219
2003년 02월 25일, 56세 때, 노무현은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20
2003년 03월, 56세 때, 노무현은 미국의 요청에 국익을 이유로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221
2004년 03월, 57세 때, 노무현은 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된 동안 출입기자들과 산에 오르며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뜻의 '춘래불사춘'을 입에 올렸다.
222
2004년 03월 12일, 57세 때, 노무현은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면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223
2004년 04월 05일, 57세 때, 노무현은 탄핵소추로 관저에 머물던 중 식목일 행사로 아내와 함께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224
2004년 05월, 57세 때, 노무현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225
2004년 05월 14일, 57세 때, 노무현은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 청구를 기각하면서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226
2004년 10월, 58세 때, 노무현은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받아 들었다.
227
2004년 12월 15일, 58세 때, 노무현은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해 테이프를 끊었다.
228
2005년 08월, 58세 때, 노무현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까지 서훈 대상에 포함하도록 지시했다.
229
2006년 03월, 59세 때, 노무현은 나이지리아 순방 중 일정 없이 하루를 호텔에서 보내며 고민한 아내 권양숙으로부터 고향 봉하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230
2006년 03월, 59세 때, 노무현은 고향을 놔두고 다른 곳을 찾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귀국 직후부터 봉하 귀향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231
2006년 3월경 · 59세 무렵,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여러 차례 자신을 외면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했으나, 정치를 그만둔 만큼 편한 마음으로 가되 이웃으로서 설득할 일은 계속 설득하겠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귀향이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 통합에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랐다.
232
2007년, 61세 때, 노무현은 대선 과정에서 엄정 중립을 지키며 이른바 'BBK 의혹'과 '도곡동 땅 문제'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한 검찰 수사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233
2007년, 61세 때, 노무현은 정치인 시절부터 꿈꿔 왔으나 여러 번 좌절된 토론 사이트 구상을 실현하려고 퇴임 몇 달 전부터 '민주주의 2.0' 운영을 준비했으며, 이를 통해 깨어 있는 시민을 늘리고 자신을 줄곧 외면해 온 고향 지역에 뿌리내리기를 바랐다.
234
2007년, 61세 때, 노무현은 퇴임을 앞두고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사저를 꾸미는 데 공을 들였고, 지붕이 낮아 사저는 '지붕 낮은 집'으로 불렸다.
235
2007년 10월 02일, 61세 때, 노무현은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10·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236
2007년 12월 28일, 61세 때, 노무현은 청와대를 찾은 이명박 당선인에게서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만큼은 확실한 전통으로 세우겠다는 말을 들었고, 청하지도 않은 말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여 고마움을 표했다.
237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공장 폐수로 오염된 화포천을 되살리려고 주민·지지자들과 함께 쓰레기를 치웠다.
238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국내 전문가와 함께 일본의 손꼽히는 오리농법 전문가를 봉하로 초빙해 주민들과 친환경 오리농법 교육을 받았다.
239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장군차를 길러 봉하마을 특산물로 만들었다.
240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일주일에 엿새씩 정해진 시간에 방문객들을 만나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눴다.
241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귀향 뒤 김해시 관광 수입이 늘어난 일로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소개되며 전직 대통령의 새로운 모습으로 주목받았다.
242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고향을 생태 마을로 가꾸겠다는 구상 아래 주업인 농사부터 친환경으로 바꾸기로 하고 오리농법 도입을 추진했다.
243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농지의 60% 이상이 외지 지주 소유이고 농업용수 사정도 나쁜 탓에, 남의 땅에 왜 투자하느냐, 실패하면 누가 책임지느냐는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244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실패의 책임은 물론 쌀이 팔리지 않을 경우까지 자신이 떠안겠다며, 택지 개발 대신 고품질 친환경 브랜드로 부가가치를 높이자고 주민들을 설득했고 판매와 오리 관리도 직접 맡겠다고 약속했다.
245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설득 끝에 논 2만 5,000여 평에 오리농법을 들여왔다.
246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일손이 많이 들어 다른 지역에서는 오리농법을 접는 추세였지만, 어린 시절 습지였던 봉하 들판에 야생 오리가 많이 날아들었던 기억을 근거로 이곳은 다르다고 고집했다.
247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조류 인플루엔자까지 번지며 우려가 커지자 오리가 감염되면 살처분하고 우렁이로 대신하면 된다며 계획을 밀어붙였고, 조류 인플루엔자가 가라앉으면서 다른 곳 대부분이 포기한 오리농법을 성공시켰다.
248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봉하오리쌀'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공모로 캐릭터 디자인을 정했으며, 오리쌀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249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김정호 비서관이 대표를 맡은 영농법인 봉하마을 실무진이 자신의 캐릭터 사용을 망설이자 포장지 심사에서 노무현 캐릭터를 쓰라고 지시하며 자기 이름과 신뢰를 걸겠다고 했고, 품질 검증만은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말라고 못 박았다.
250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누군가 몰래 논둑에 제초제를 뿌려 풀이 누렇게 말라 버리자 당사자를 불러 꾸짖었고, 이후 같은 일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251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다른 마을 사람이 장비를 끌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 뛰어가 막으며 봉하쌀 브랜드의 신뢰를 지켜 냈다.
252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첫해 봉하 들판 논의 10%만 참여한 오리농법으로 40kg 한 가마를 일반 수매가 5만 원보다 높은 6만 5,000원에 팔았고, 태풍과 농약 없이 수확량은 전년보다 10%, 가격은 30% 올라 참여 농가의 실질소득을 50% 늘렸다.
253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첫해 성과를 본 이웃 마을 주민들이 자기들도 친환경 농사에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변화를 이끌어 냈다.
254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첫해 수확한 벼를 도정할 시설이 없어 인근 미곡종합처리장(RPC)을 열흘가량 빌려 눈치를 보며 겨우 도정했고, 다른 쌀과 섞이지 않게 관리하고 포장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255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재임 중 산림청이 전국 수십 곳을 '웰빙숲' 시범지로 지정할 때 봉화산도 포함됐던 인연을 살려 봉화산 숲 가꾸기에 나섰다.
256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숲을 가꾸면 일자리가 생기고 숲의 경제적 가치도 높아진다고 보고, 늘어나는 방문객이 삼림욕과 야생화 탐사, 산나물·열매 채취, 새 관찰을 즐길 수 있는 마을숲 생태학습장을 만들어 다른 지역으로 퍼뜨릴 성공 사례로 삼으려 했다.
257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김해시가 세운 간벌 계획에 따라 많은 자원봉사자와 함께 봉화산 숲 가꾸기를 열심히 챙겼다.
258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간벌과 달리 시설 설치나 나무 심기에는 산주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외지 산주가 많고 투기 목적으로 산을 산 이들이 차라리 산을 사라며 협조하지 않아 웰빙숲 조성이 벽에 부딪혔다.
259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퇴임 후 화포천을 다시 살피면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하천 습지라는 것을 깨닫고, 봉하 인근 구간부터 생태 하천으로 되살리는 소박한 계획을 새로 세웠다.
260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매일 아침 청와대 시절 타던 전기 자전거로 낙동강과 만나는 모정까지 두 시간 반가량 화포천을 둘러봤고, 새벽부터 동행한 참모들이 고생했으며 배터리가 떨어져 경호실 차량이 배터리를 실어 온 적도 있었다.
261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귀향 당시 화포천이 인근 공단의 불법 폐수와 생활오수·축산폐수, 불법 투기된 대형 폐기물과 낚시 쓰레기로 거의 숨이 끊길 지경인 것을 확인했다.
262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화포천 바닥에 버려진 불법 그물과 지천에서 밀려온 쓰레기를 치웠는데, 그 양이 1톤 화물차로 100대를 훌쩍 넘었다.
263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본산공단에서 흘러들어 봉하마을 농수로에 쌓인 악취 나는 슬러지를 친환경 농사를 위해 방치할 수 없다며 한국농어촌공사에 지원을 요청했고, 15톤 덤프트럭 100대가 넘는 준설 슬러지를 큰 논을 빌려 임시로 쌓았다가 간신히 처리했다.
264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화포천 곳곳에 불법 그물이 깔려 있고 한 삼강망에 굵은 잉어 수십 마리가 갇혀 있는 것을 발견한 뒤 뻘에 묻힌 삼강망 35개를 걷어냈고, 그 뒤 낙동강 잉어가 화포천을 거쳐 얕은 농수로까지 올라와 알을 낳았다.
265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을 지내면서도 전국의 지천과 실개천, 습지가 그토록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며 부끄러워했다.
266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청소보다 오염 예방이 중요하다고 보고 '화포천 지킴이'를 만들어 불법 어로·밀렵·불법 경작·쓰레기 투기를 꾸준히 감시하고 단속하게 했다.
267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자리를 잡으려 없던 길까지 내며 드나드는 낚시꾼들을 모아 '화포천을 사랑하는 낚시 동호회'를 만들려 했고, 직접 고무보트를 타고 여러 차례 찾아가 낚시할 권리를 주는 대신 청소와 단속을 맡아 달라고 설득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68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낚시 동호회 구상이 무산된 뒤 화포천 전역이 행정 당국에 의해 낚시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다.
269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화포천을 계기로 습지를 깊이 공부하면서, 갈수기에 물이 마르면 습지가 맨땅으로 바뀌고 섬이 드러나 새들이 살쾡이·너구리·들고양이를 피해 주남저수지에서 자고 화포천을 오간다는 문제를 파악했다.
270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화포천 하류에 홍수 때는 열고 갈수기에는 닫아 수위를 1m가량 높이는 자동 개폐식 수중보를 세워, 천변 저습지를 유지하고 겨울 철새의 쉼터를 만드는 방안을 구상했다.
271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화포천에 임시 물막이를 설치해 물을 가둬 본 결과 두 주 만에 겨울 철새 1만 마리가량이 찾아와 낮에는 논에서 먹이를 찾고 밤에는 물이 깊은 곳에서 잠드는 것을 확인했다.
272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봉하 들판 낮은 논에 물을 채워 무논을 만들었고, 철새들이 그 논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273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수중보를 세울 위치와 갈수기 적정 수위를 가늠하려고 여러 차례 자전거로 현장을 답사했다.
274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화포천이 2급 지방하천이라 국비를 받을 수 없고 지천 살리기 사업을 국비 지원에서 뺀 제도는 바꾸기 어렵다고 판단해, 하천형 습지가 잘 남아 있는 화포천 일부라도 습지생태공원으로 지정받는 사업을 먼저 추진하기로 했다.
275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귀향 직후 지지자들에 이어 구경 온 사람들이 몰리면서 평일에도 수천 명, 주말과 휴일에는 1만 명 넘는 방문객을 맞았고, 신혼여행객과 가족 휴가객, 관광버스 회사가 모집한 단체 손님까지 봉하마을을 찾았다.
276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일부 언론이 사저를 '봉하 아방궁'이라 부르며 퍼뜨린 탓에, 막상 찾아온 이들이 이게 무슨 아방궁이냐고 되묻는 일을 겪었다.
277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낮 시간 대부분을 방문객 인사에 쓰느라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는데, 이는 귀향을 결심할 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278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퇴임했다고 해서 정치적 대립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데도 전직 대통령 문화가 없는 나라에서 미국·유럽의 전직 국가원수처럼 살려 한 자신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낭만적이었다고 돌아봤다.
279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공기업·문화·언론 단체의 기관장들을 소관 부처와 감사원, 검찰 등을 동원해 몰아냈다고 비판했다.
280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마을 사업을 하며 찍힌 사진들이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끈 사실을 한동안 몰랐는데, 자전거를 탄 모습은 화포천 활동, 논바닥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거나 장화를 신은 모습은 벼농사와 화포천 청소 때 찍힌 것이었다.
281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한 기자가 쉼터에서 담배를 문 자신의 모습을 우연히 찍어 보도하는 일을 겪었고, 손녀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진이 공개됐을 때는 쑥스러워했다.
282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농사짓고 숲 가꾸고 개울을 청소하는 평범한 모습이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것이라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283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봉화산 숲 가꾸기, 화포천 습지 복원, 봉하 들판 생태농업을 3대 사업으로 삼았고, 여기에 덧붙여 수익이 아닌 마을 경관을 위해 장군차 심기를 시작했다.
284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진영 단감 농가들이 수지가 맞지 않아 폐원 보상을 받고 떠난 뒤 지상권 분쟁을 꺼린 외지 지주들이 다른 과수를 심지 못하게 해 늙고 병든 감나무가 방치된 마을 뒷산 땅에,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않고 차나무까지 모두 넘기겠다고 설득한 끝에 장군차를 심었다.
285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일반 기록은 물론 본인만 볼 수 있던 지정기록물까지 영장을 받은 검찰에 열람됐고, 검찰은 10월 전에 관련자 소환 조사를 마치고도 무혐의 처분도 기소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286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부산상고 동문 정화삼 씨가 월급 사장으로 있던 제주 제피로스 골프장을 시작으로 주변에 대한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287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 주변으로까지 국세청과 검찰의 수사 움직임이 뻗쳤다.
288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오랜 후원자인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 자신의 허리 수술을 맡았던 우리들병원 이상호 원장, 김수경 수도약품 회장 부부, 이어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까지 국세청 세무조사 대상에 오르자, 그 모든 조사의 최종 표적이 자신이라고 판단했다.
289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개인적으로 가까운 여러 기업은 물론 자신이 자주 가던 식당까지 세무조사 대상이 됐다.
290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세무조사가 잇따라 고발과 검찰 수사로 번지고 언론이 그때마다 '노 전 대통령 측근', '참여정부 고위 인사' 연루 가능성을 보도하자, 날마다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지만 달리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291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전국에서 몰려든 방문객들 덕분에 다시 생기를 되찾았고, 마을 어귀 가게에서 주인과 담배를 나눠 피우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시골 아저씨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292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사저 앞 '만남의 광장'에서 하루 여덟 번 넘게 방문객을 맞아 인사하고 마을을 안내했으며, 질문에 답하고 청하면 노래도 불렀다.
293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사저를 왜 한옥으로 짓지 않았느냐는 방문객의 물음에 기와를 올려 집이 높아지면 뒷산이 가려지니 지붕을 없애고 담을 낮춰 자연과 어울리게 했다고 답했다.
294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방문객 앞에서 5년 동안 욕을 많이 먹었지만 여러분이 지켜 줬다고 감사를 전했고, 대통령을 한 번 더 하라는 외침에는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어도 하고 싶지 않다며 해 보니 힘들었다고 답했다.
295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방문객들에게 봉화산 마애불을 소개하는가 하면, '비전 2030'은 세금을 더 내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번영하는 복지 사회의 비전이라고 풀어 설명했다.
296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노래를 청하는 방문객에게 전라도 길을 노래한 곡의 한 대목을 불러 주기도 했다.
297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방문객 대화에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자제했고, 매일 저녁 그날 한 말을 이호철·김경수 등 참모들과 되짚은 뒤 다음 날 새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298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이 합리적 토론보다 일방적 주장과 상대를 겨냥한 공격성 댓글로 채워지며 기대만큼 작동하지 않자 낙담했고, 자신이 의견을 내기도 어려운 처지가 됐다.
299
2008년, 62세 때, 노무현은 오리농법이 힘들고 관리가 어렵다며 일부 비서진이 우렁이농법을 대안으로 내고, 이웃 방동마을이 6년간 해 온 오리농법을 힘에 부쳐 우렁이농법으로 바꾼다는 사례까지 전해 들었지만, 들판이 예부터 야생 오리가 많아 '오리방'으로 불린 데다 병충해 방제·시비 효과와 어린이 체험학습 유치에도 낫다며 힘과 비용이 더 들어도 오리농법으로 간다는 결론을 지켰다.
300
2008년 01월 21일, 61세 때, 노무현은 이명박 당선인 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법 개편안에 대해 정보통신부·과학기술부·여성가족부·통일부가 왜 생겼는지 조목조목 짚으며, 자신의 소신과 어긋나는 법안에 서명할 수 없고 새 정부의 법은 새 대통령이 공포하는 게 맞다는 입장을 밝혔다.
301
2008년 02월, 61세 때, 노무현은 임기 막바지까지 직접 매달려 전자기록을 포함한 대통령 기록물 826만 건을 대통령기록관에 넘겼고, 그중 일부는 특별한 절차 없이는 본인 외에 누구도 볼 수 없는 지정기록물로 분류했다.
302
2008년 02월, 61세 때, 노무현은 퇴임 후 국정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의 미래를 연구하고 책을 쓰는 데 자신이 만든 기록물이 필요했으나, 국가기록원이 온라인 열람에 1년 넘게 걸린다며 구체적인 열람 방안을 내놓지 않자 기록 대부분이 담긴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 'e-지원'을 통째로 복사해 봉하로 가져왔다.
303
2008년 02월, 61세 때, 노무현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늦게 처리되면서 퇴임 때까지 정부로 넘어오지 않아, 실제로 서명을 거부하는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304
2008년 02월, 61세 때, 노무현은 퇴임 무렵 낮은 지지율을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였으나 5년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성적표로 보지는 않았고, 지지율 탓에 정권을 내줬다는 비판에도 굳이 반박하지 않았으며,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정권 재창출을 위해 애썼다는 자부심을 간직했다.
305
2008년 02월, 61세 때, 노무현은 사실상 '실패한 대통령'에 가깝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으며 퇴임했지만, 타고난 낙관으로 스스로를 지탱했다.
306
2008년 02월, 61세 때, 노무현은 대전 국가기록원까지 오가지 않고도 재임 기록을 볼 수 있게 하겠다던 전용망 열람 시스템 구축이 기약 없이 미뤄진 데다, 참여정부 시절 사안을 둘러싼 논란에 바로 대응하려면 기록 확인이 필요하다고 보고 사저용 기록물 한 세트를 따로 복사했다.
307
2008년 02월, 61세 때, 노무현은 귀향하면서 전직 참모들과 원격 화상회의로 함께 일하는 방안을 구상했으나, 당시 기술로는 구현이 어렵고 효율도 떨어져 실행하지 못했다.
308
2008년 02월 25일, 61세 때, 노무현은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직원들과 작별하고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뒤 KTX를 타고 고향 김해 봉하마을로 돌아가 사저에 정착했다.
309
2008년 02월 25일, 61세 때, 노무현은 서울역에서 노사모 회원과 지지자 1,000여 명의 환송을 받으며 함께 일한 참모 150여 명과 36호 대통령 전용 KTX에 올랐고,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첫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310
2008년 02월 25일, 61세 때, 노무현은 대전과 동대구를 지나 밀양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참모들과 담소를 나누며 때로 홀가분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고, 이날 아침 식사부터 대통령 음식 검식이 끝났다.
311
2008년 02월 25일, 61세 때, 노무현은 밀양역에서 시민 1,500여 명이 참석한 간단한 환영식을 치른 뒤 아내와 승용차로 이동했고, 노사모 회원들이 28km 길가에 매단 노란 풍선 1만여 개 사이를 지나 오후 3시 30분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312
2008년 02월 25일, 61세 때, 노무현은 봉하마을에 도착해 첫 인사로 "야, 기분 좋다"고 외쳤다.
313
2008년 02월 25일, 61세 때, 노무현은 봉하마을에 도착해 목적이 있어 이 마을에 왔으며 오랜만에 고향을 느꼈다는 소회를 밝혔다.
314
2008년 02월 25일, 61세 때, 노무현은 노사모 등이 마을 곳곳에 내건 노란 환영 현수막이 펄럭이는 가운데 귀향 첫날 밤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315
2008년 03월, 61세 때, 노무현은 사저가 덜 지어져 나무 이식과 실내 배치 공사 등 잡무가 쌓인 가운데 봄을 맞자, 이 시기를 놓치면 1년을 허비한다고 판단해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316
2008년 03월, 61세 때, 노무현은 농촌이 잘살아야 좋은 사회라는 평소 신념에 따라 귀향 후 첫 사업으로 화포천 청소에 착수했고, 김해시장과 경남지사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317
2008년 03월, 61세 때, 노무현은 봄 무렵부터 친환경 농사를 시작하는 한편 마을 환경 정비와 봉화산 숲 가꾸기에도 힘을 쏟았다.
318
2008년 03월, 61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기며, 시민이자 은퇴한 전직 대통령으로서만큼은 꼭 성공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다.
319
2008년 03월, 61세 때, 노무현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을 시켜 김백준 청와대 총무비서관에게 e-지원 사본을 가져온 경위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게 했다.
320
2008년 03월 24일, 61세 때, 노무현은 퇴임 한 달 만에 봉하마을 방문객이 10만 명을 넘어섰고, 마을 뒷산을 청소하거나 발가락 양말에 슬리퍼 차림으로 구멍가게에 앉아 담배를 무는 모습이 인터넷으로 퍼지며 방문객은 더 늘었다.
321
2008년 04월, 61세 때, 노무현은 4월 15일까지 자신의 홈페이지에 네티즌 글 3만6천 건이 올라올 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322
2008년 04월, 61세 때, 노무현은 김해에서 민주당 최철국 의원이 자신의 사진을 홍보물에 싣고 대통령의 고향이라며 지지를 호소한 끝에 국회의원 재선에 성공하는 것을 지켜봤다.
323
2008년 04월, 61세 때, 노무현은 전국 정당을 지향했던 열린우리당이 이미 사라진 처지를 두고, 시주하러 절에 왔더니 절은 없고 암자 하나만 남았다며 자조했다.
324
2008년 04월, 61세 때, 노무현은 문재인 전 비서실장을 통해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여러 차례 전화로 협의하며 e-지원 사본 문제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325
2008년 04월 28일, 61세 때, 노무현은 퇴임 두 달 만에 봉하마을 방문객이 20만 명을 넘어섰다.
326
2008년 05월, 61세 때, 노무현은 방문객 인사가 하루 일과 전부가 돼 귀향 후 하려던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인사를 하루 네 번으로 줄였고, 그 대신 한 번의 대화가 30분을 넘기는 일이 잦아졌다.
327
2008년 05월, 61세 때, 노무현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허용을 둘러싼 대규모 촛불시위에 대해 발언을 아끼면서도, 수입을 결정한 책임을 참여정부에 돌리려는 시도에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328
2008년 05월 15일, 61세 때, 노무현은 봉하마을 방문객이 35만 명을 넘어선 날, 엷은 하늘색 재킷에 밀짚모자 차림으로 인근 생림면의 장군차 제다 시설을 찾아 제다 과정을 체험했고, 차밭 주인이 차린 장군차 비빔밥이 자신에게 가장 먼저 놓이자 아직 어른 노릇이 어색하다며 쑥스러워했다.
329
2008년 06월, 61세 때, 노무현은 외부 통신망과 연결되지 않은 e-지원 사본을 두고, 민감한 인사 자료와 국정 기밀을 빼돌려 현 정부의 일을 방해할 수 있는 것처럼 언론에 흘린 청와대로부터 '국가 기록물 불법 유출'이라는 비난과 함께 반환 요구를 받았고, 국가기록원은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김충환 전 비서관 등 실무자들을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330
2008년 06월, 61세 때, 노무현은 다시 전화했으나 이명박 대통령과 연결되지 못했고 담당 수석이 설명할 것이라는 부속실장의 전갈만 받았으며, 그사이 익명의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언론을 통해 갖가지 말을 퍼뜨렸다.
331
2008년 06월, 61세 때, 노무현은 청와대발 기사로 기록물 한 세트를 불법으로 가져갔다는 주장에 휩싸였고, 이명박 정부는 e-지원에서 자료 200만 건이 유출됐다며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으며, 김경수 비서관은 열람 서비스가 없어 복사본을 잠정 보관 중이며 이를 청와대에 충분히 설명했다고 해명했다.
332
2008년 06월 12일, 61세 때, 노무현은 청와대로부터 퇴임 때 봉하로 가져간 e-지원 사본이 불법이니 대통령기록물을 모두 돌려달라는 공개 요구를 받았다.
333
2008년 06월 14일, 61세 때, 노무현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화해 보도로 알았다며 불편이 없도록 챙기고 전직 대통령을 잘 모시는 문화를 만들겠다,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하겠다는 답을 들었으나 이후 연락은 오지 않았다.
334
2008년 06월 14일, 61세 때, 노무현은 귀향 후 외로울 것을 염려한 후원자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의 권유로 충주 시그너스 골프장에서 2박 3일 일정을 보냈고, 청와대 시절 참모 몇 명을 불러 이틀간 라운딩하며 담소를 나눴는데, 퇴임 후 가장 멀리 나선 외출이었다.
335
2008년 06월 14일, 61세 때,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골프에 대한 흥미를 잃어 퇴임 후 스스로 골프 자리를 만들지는 않았고, 강금원 회장이 자리를 마련해 권할 때만 동반자들과의 대화를 위해 응했다.
336
2008년 06월 14일, 61세 때, 노무현은 시그너스 골프장 첫 홀인 실크 코스 티박스에서 기록물 문제로 양해를 구하려 먼저 걸었던 전화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회신을 받고 정상문 전 비서관을 통해 경위를 충분히 설명했다는 점을 상기시켰으나, 평소와 달리 흔쾌한 기색이 사라진 통화에 전·현직 대통령의 원만한 관계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통화 뒤 친 티샷은 똑바로 날아가지 않았다.
337
2008년 07월, 61세 때, 노무현은 기록물을 반납했는데도 청와대 관계자와 한나라당 대변인으로부터 도둑이 장물을 돌려줬다고 절도죄가 사라지느냐는 비난을 받았다.
338
2008년 07월, 61세 때, 노무현은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자신과 참모들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하면서 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의 조사를 받게 됐다.
339
2008년 07월, 61세 때, 노무현은 여름휴가 중 정선에서 저녁 식사 뒤 기다리던 사람들의 사진 요청에 끝까지 응했고, 평창 바람마을 의야지에서는 주민 전체와 단체 사진을 찍은 뒤 얼굴이 잘 보이도록 부녀회·청년회 등 대여섯 그룹으로 나눠 다시 찍자고 제안했으며, 마을을 알리려고 풀썰매를 타다 뒤집히기도 했다.
340
2008년 07월, 61세 때, 노무현은 비가 오락가락한 여름휴가의 마지막 일정으로 강금원 회장의 시그너스 골프장에 다시 들러 전직 참모들을 불러 모았다.
341
2008년 07월 16일, 61세 때, 노무현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낼 공개 서신 원고를 마침 봉하에 다녀가던 양정철·윤태영에게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고, 두 사람은 서울역 앞 PC방에서 메일로 원고를 받아 고쳤다.
342
2008년 07월 16일, 61세 때, 노무현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모든 일은 자신의 지시로 생긴 것이니 책임은 자신에게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343
2008년 07월 16일, 61세 때, 노무현은 같은 편지에서 기록을 국가기록원에 돌려줬다고 알리며, 정치를 모르는 참모들이 꾸민 공작이라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공상이라고 반박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싸움에서 물러서겠다고 밝혔다.
344
2008년 07월 19일, 61세 때, 노무현은 e-지원 사본이 담긴 봉하마을 컴퓨터 하드웨어를 떼어 내 봉인한 뒤 비서들이 일반 차량 세 대에 나눠 싣고 성남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반납했고, 기록물은 이튿날 새벽 1시에 입고됐다.
345
2008년 07월 22일, 61세 때, 노무현은 이광재 의원이 마련한 일정으로 평창·강릉 일대 여름휴가를 떠났고, 거리에서 반기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눴다.
346
2008년 07월 22일, 61세 때, 노무현은 평창 한국자생식물원에서 벌개미취·노루오줌·황기·삼지구엽초 등 풀과 나무 이름을 어린 시절 기억으로 하나하나 불러냈고, 김창렬 원장의 청으로 마라톤 100회 완주자 기념탑 앞에 더디 자라지만 오래 사는 노간주나무를 심었다.
347
2008년 07월 24일, 61세 때, 노무현은 정선 하이원리조트 전망대 식당에서 참모들과 점심을 하며 이제 목적은 기록물 회수가 아니라 이전 정부 흠집 내기임이 분명해졌다며, 허위 사실로 흠집을 낸 데 대해 명예훼손 고소 등 법적 대응을 참모들과 협의해 나가자고 했다.
348
2008년 07월 24일, 61세 때, 노무현은 같은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모든 기록이 공개된다는 전제로 일했기 때문에 공개돼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349
2008년 09월 18일, 62세 때, 노무현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쌍방향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열어 대통령으로 일하며 느끼고 배운 것을 국민과 토론하며 나누고자 했고, 참여정부 학자들과 연구재단을 만드는 계획도 세웠다.
350
2008년 10월, 62세 때, 노무현은 '진보주의 연구'를 주제로 한 책 작업을 시작했고, 비공개 온라인 연구 카페를 열어 참여정부 청와대·내각·국정과제위원회에서 일한 학자 30여 명과 집단 협업에 나섰다.
351
2008년 10월, 62세 때, 노무현은 방문객들에게 권력과 자리를 줄 수 있을 때는 줄을 서던 사람들이 권력이 끝나면 장판에 쏟은 콩알이나 물에 떨어진 기름방울처럼 흩어진다며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이야기했다.
352
2008년 10월, 62세 때, 노무현은 참여정부 인사들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매일 방문객을 만나 입담으로 좌중을 웃겼고, 가을 무렵에는 방문객 인사를 감세·성장·작은 정부·규제 완화·민영화 등을 짚은 '보수의 일곱 가지 거짓말'로 정리했다.
353
2008년 10월 20일, 62세 때, 노무현은 봉하마을 논에서 직접 콤바인을 몰고 친환경 쌀 작목반과 오리농법으로 기른 '봉하 오리쌀'을 수확하며 날씨가 좋아 농사가 잘됐다는 소회를 밝혔고, 예상과 달리 관행농법과 차이 없는 풍작에 만족했다.
354
2008년 10월 20일, 62세 때, 노무현은 3월부터 두 달 남짓 주민들과 준비해 마을 농지의 10분의 1에서 시작한 오리쌀 재배를 이듬해 전체로 넓히고 주민이 주도하게 하겠다고 밝혔으며, 수확한 쌀은 1인당 3kg으로 제한해 인터넷과 마을 광장에서 팔기로 했다.
355
2008년 10월 28일, 62세 때, 노무현은 자신이 유치한 람사르 세계습지총회가 창원에서 열렸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자원봉사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대신 고향에서 습지 보존을 몸소 실천하기로 했다.
356
2008년 10월 28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논 습지의 생물 다양성을 되살리려고 옛 논 둠벙 자리를 되찾아, 물이 솟는 다섯 곳에 둠벙을 새로 팠다.
357
2008년 10월 28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둠벙을 복원하면서 기계 영농으로 낮고 좁아진 논두렁과 도랑을 넓고 높게, 넓고 깊게 다시 만들어 미나리와 미꾸라지가 살 수 있게 했다.
358
2008년 10월 28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낙동강·화포천·농수로·도랑·둠벙·논을 하나로 잇는 복합 습지 생태계를 되살려 낙동강 잉어가 논까지 올라와 알을 낳던 옛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다고 보고 이를 목표로 삼았다.
359
2008년 10월 28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생태계를 되살린 농촌에 아이들이 찾아와 할아버지·할머니와 지내다 가는 날을 꿈꿨다.
360
2008년 10월 28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람사르환경재단의 지원으로 논습지 체험 캠프를 20차례 넘게 열었고, 처음 시범으로 시작한 캠프에 유치원생 단체와 가족 참가자가 늘며 아이들이 수생곤충을 채집해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렸다.
361
2008년 10월 28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겨울 무논에 떨어진 볍씨와 풀씨가 철새 먹이가 되고, 철새가 잡초의 씨와 뿌리를 먹어 치우며 그 배설물이 천연비료가 돼 화학비료 없이도 농사가 가능하다는 순환을 확인하고, 논습지를 평생 연구할 만한 과제로 여겼다.
362
2008년 11월 24일, 62세 때, 노무현은 후원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수사 착수 발표를 접했다.
363
2008년 12월, 62세 때, 노무현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본격화되자 공개 활동을 줄이기 시작했다.
364
2008년 12월, 62세 때, 노무현은 어려웠던 시절 알게 돼 정치자금법이 느슨하던 때 자신을 후원하면서도 청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박연차 회장이 구속되는 것을 지켜봤다.
365
2008년 12월, 62세 때, 노무현은 사저에 고립되면서 수도권과의 거리감을 느끼고 귀향이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366
2008년 12월, 62세 때, 노무현은 작은형 사건이 터지자 본격적인 집필에 나서기로 하고, 청와대에서 글을 쓰던 전직 비서관 넷의 논의를 거쳐 양정철·윤태영을 봉하로 불러 지금의 강금원 기념 봉하연수원 빌라에 머물게 했으며, 이송평 박사·신미희 전 행정관·김경수·박은하 비서관과 함께 집필팀을 꾸렸다.
367
2008년 12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사저 서재에서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집필팀 회의를 열었고,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 로버트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 등을 탐독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368
2008년 12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이따금 봉하에 함께 내려온 비서들과 마을 안쪽 화포메기국 집에서 술 한잔을 나눴다.
369
2008년 12월 01일, 62세 때, 노무현은 작은형 노건평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370
2008년 12월 04일, 62세 때, 노무현은 작은형 노건평이 구속됐다.
371
2008년 12월 05일, 62세 때, 노무현은 작은형 노건평이 구속된 다음 날 방문객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모든 공개 활동을 접고 사실상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372
2008년 12월 5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외출을 끊은 뒤에도 집에서 내다보이는 무논에 겨울 철새가 많이 모여들자, 김정호 비서관이 집에서라도 보라며 애써 무논을 만들어 철새를 불러 모은 것으로 여겨 고마워했고, 사람이 없는 새벽에만 가끔 잠깐씩 나가 봤다.
373
2008년 12월 5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사저를 찾아오려는 사람들의 면담도 모두 끊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만 매달렸으며, 겨울 내내 성경륭 전 국가균형발전위원장, 김병준·이정우 전 정책실장, 조기숙 전 홍보수석,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 윤태영·양정철 전 비서관, 신미희 전 행정관, 노사모 이송평 씨 등을 사저로 불러 자주 대화를 나눴다.
374
2008년 12월 5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학자들과의 모임을 앞두면 며칠 전부터 설레 잠을 설치며 새벽까지 읽고 메모하며 토론을 준비했고, 헤어질 때마다 월급은 못 줘도 차비는 드릴 테니 자주 오라고 했지만 실제로 차비를 건넨 것은 한 번뿐이었다.
375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자녀 주택 자금 등의 명목으로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376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오리농법과 우렁이농법을 쓰는 친환경 재배 면적을 전년의 열 배로 넓혔고, 작목반은 14명에서 50명으로 늘었으며 생산량도 50톤에서 열 배 수준으로 늘 것으로 내다봤다.
377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제초제와 살충제를 쓰지 않고 비료를 줄이는 데서 나아가, 토착 미생물을 배양하고 천연 생물 약재를 만들어 쓰는 수준 높은 생태 농업으로 봉하 농법을 발전시켰다.
378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재배 면적이 열 배로 늘면 독자 도정 시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고 경상남도와 김해시를 어렵게 설득해, 주민 자부담으로 마련한 부지에 건조·보관·도정·포장을 모두 직접 하는 소형 미곡종합처리장(RPC) 형태의 친환경 쌀 방앗간을 짓고 백미와 현미를 함께 공급하기로 했다.
379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해가 바뀌자 오랫동안 정권 교체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함께했던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이 구속되고, 안희정이 다시 검찰 수사 대상이 됐다.
380
2009년, 62세 때, 노무현은 박연차 회장을 구속한 검찰이 2008년 말부터 날마다 수사 상황을 브리핑하면서, 사저를 지을 때 박 회장에게 빌린 돈의 차용증, 조카사위 연철호와 관련됐다는 500만 달러,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을 거쳐 자택에서 받았다는 100만 달러가 차례로 언론에 공개됐다.
381
2009년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봉하에 온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자신보다 먼저 아내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가 보니 아내가 울고 있었고, 아내에게서 자신이 모르는 빚을 갚는 데 돈을 썼다는 말을 들었으나 끝내 무슨 빚인지는 듣지 못했으며, 정 전 비서관은 그 돈을 자신이 받아 쓴 것으로 하려 했다.
382
2009년 01월 01일, 62세 때, 노무현은 찾아온 전직 참모들과 떡국을 먹은 뒤 올해는 반드시 책으로 일가를 이루겠다고 다짐했고, 상황이 이러하니 앞으로는 자신을 자주 찾지 말라고 당부했다.
383
2009년 02월, 62세 때, 노무현은 자신이 정화에 힘써 온 화포천이 국토해양부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뽑히는 성과를 거뒀다.
384
2009년 02월, 62세 때, 노무현은 아내와 함께 바람을 쐬러 강금원 회장의 시그너스 골프장에 다녀왔고, 골프장 인근에 집을 마련해 서울 참모들을 만나라는 강 회장의 제안에는 확답하지 않았다.
385
2009년 02월, 62세 때, 노무현은 압박이 조여 오며 담배가 급격히 늘었으나 2월과 3월 내내 집필팀 회의에 더욱 몰두했다.
386
2009년 02월 14일, 62세 때, 노무현은 귀향 후 최대 후원자였던 강금원 회장의 시그너스 골프장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387
2009년 03월, 62세 때, 노무현은 3월 말 봉하 참모들이 사저 옆 산의 장군차 나무를 타운하우스촌(지금의 강금원 기념 봉하연수원) 뒤편 산으로 옮겨 심는 날 오랜만에 밖에 나가 일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이야기를 나눈 뒤 서둘러 사저로 돌아왔다.
388
2009년 03월, 62세 때, 노무현은 이 무렵부터 일이 진척되지 않는데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며 힘겨움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이 책을 정리해 연구소에 넘기고 '성공과 실패'를 주제로 따로 글을 써 볼까 하는 구상도 내비쳤다.
389
2009년 03월 25일, 62세 때, 노무현은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뇌물 혐의로 구속됐다.
390
2009년 03월 26일, 62세 때, 노무현은 이광재 의원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391
2009년 04월, 62세 때, 노무현은 수사가 본격적으로 자신을 향하자 2008년 10월부터 이어 온 '진보주의 연구' 책 작업마저 멈췄다.
392
2009년 04월, 62세 때, 노무현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결과를 지켜봤다.
393
2009년 04월, 62세 때, 노무현은 미국에서도 기자들이 아들 집을 에워싸 손녀가 남의 집으로 피해야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들 노건호가 열흘 사이 여섯 차례 소환 조사를 받고 처남까지 검찰에 불려 갔다.
394
2009년 04월, 62세 때, 노무현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퇴임 후 자신의 생활을 걱정해 특수활동비를 떼어 몰래 모아 둔 사실을 보도를 통해서야 알았고, 친구가 자신을 위해 한 일이라 짐작했지만 더는 해명하지 않기로 했다.
395
2009년 04월, 62세 때, 노무현은 4월 중순 취재진의 카메라를 피해 사저 대문을 굳게 닫고 서재 통창에 블라인드를 절반 넘게 내린 채 지냈고, 특유의 농담과 부산 억양도 사라질 만큼 기운을 잃었다.
396
2009년 04월, 62세 때, 노무현은 4월 말 자신을 큰 산맥 없이 홀로 솟은 봉화산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397
2009년 04월 03일, 62세 때, 노무현은 집필팀에 정치 역정을 길게 돌아보며, 정치를 시작할 때 목표는 노동자의 친구이자 대변자가 되는 것이었으나 1990년 3당 합당 이후 그 구도를 넘어서는 일이 핵심 과제가 됐고, 당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맡으며 생각의 틀이 분노와 저항에서 책임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398
2009년 04월 03일, 62세 때, 노무현은 같은 자리에서 자신에게 진보와 보수는 부차적이었고 중요하다고 본 구조의 문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해, 대통령을 하는 내내 좌절을 말하는 사람이 됐다고 돌아봤다.
399
2009년 04월 03일, 62세 때, 노무현은 어린 시절 성공은 곧 출세였고 실제 선택은 모두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데 맞춰져 있었으며, 그 문제는 해결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먹고사는 걱정 없는 사람이 된 것뿐이고 명성과 신뢰는 깎여 나가 실패로 가고 있다고 자평했다.
400
2009년 04월 03일, 62세 때, 노무현은 초선 의원 이후 '깨끗한 정치'를 입에 올린 적이 없고 정치와 돈은 정도의 문제일 뿐 떼어 낼 수 없다고 여겨 왔으나, 방심과 부주의로 사람들의 믿음과 희망에 큰 상처를 입혔다고 털어놓았다.
401
2009년 04월 03일, 62세 때, 노무현은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이 부족했고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괜찮은 지식인으로 살았을 것이라며, '정치하지 마라'를 결론으로 정치와 돈, 정치와 친구, 성공과 실패를 다루는 책을 구상했고, 책이 안 나오면 단편 글이라도 내겠다며 이 일이 없으면 노후에 찾아올 친구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402
2009년 04월 07일, 62세 때, 노무현은 검찰이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을 체포하자, 의혹 제기를 넘어 실제 수사가 시작된 이상 사실을 밝히고 사과해야 한다고 판단해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정 전 비서관의 혐의는 그의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부탁해 받아 쓴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403
2009년 04월 09일, 62세 때, 노무현은 뇌종양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법원의 영장 발부로 구속되고 병보석 신청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04
2009년 04월 09일, 62세 때, 노무현은 강금원 회장이 대전지검 특수부에 구속된 뒤 표정이 어두워지고 근심이 깊어졌으며, 선거 개표일에도 일찍 잠자리에 들던 그에게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405
2009년 04월 10일, 62세 때, 노무현은 조카사위 연철호가 검찰에 체포됐다.
406
2009년 04월 11일, 62세 때, 노무현은 아내 권양숙이 부산지검에 출석해 조사를 받은 같은 날 귀국한 아들 노건호의 차를 기자들이 뒤쫓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며, 다음 날 대검 중수부 조사를 앞둔 아들의 거처를 걱정했다.
407
2009년 04월 19일, 62세 때, 노무현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대통령 특수활동비 횡령 혐의가 더해져 검찰에 다시 체포되고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408
2009년 04월 21일, 62세 때, 노무현은 마을 곳곳에 진을 친 취재진이 부엉이바위와 사자바위에까지 24시간 카메라를 세워 침실·거실 창을 겨누는 바람에 창문도 열지 못하고 집 안뜰에도 나갈 수 없게 되자 홈페이지에 사생활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문을 올렸고, 김경수 비서관의 협상으로 두 바위의 취재진이 철수했다.
409
2009년 04월 22일, 62세 때, 노무현은 홈페이지에 자신은 더 이상 지지자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자격을 잃었고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졌으니 함께 빠지지 말고 자신을 버려 달라는 글을 올렸다.
410
2009년 4월 22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사저에 갇힌 채 여러 심경을 담은 글을 비공개 카페에 올렸고, 그중 '강금원이라는 사람'이라는 글로 자신 때문에 고초를 겪는 강금원 회장에게 각별한 미안함을 전했다.
411
2009년 4월 22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검찰 수사팀 교체를 요청하며 주변 사람과 기업은 이미 충분히 조사됐고 많은 이가 감옥에 갔으니 사실과 법리대로만 처리해 달라, 한 사람의 보통 인간으로서 방어권을 존중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16대 대통령' 직함 없이 이름만 적어 썼으나,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고 부담만 커진다며 문재인 전 비서실장 등 참모들이 강하게 반대하자 고심 끝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412
2009년 4월 22일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오지 말라고 했던 유시민 전 장관이 수백 대의 카메라를 뚫고 찾아오고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도 방문하자 반갑게 맞아 옛이야기에 오랜만에 웃었고, 기소되면 일단락되고 다시 농사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위로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답하지 못했으며, 대화가 끊겼던 아내와도 이날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413
2009년 04월 22일, 62세 때, 노무현은 우병우 대검 중앙수사부 1과장 명의의 A4 7장 분량 서면질의서를 받았다.
414
2009년 04월 23일, 62세 때, 노무현은 집필팀 회의에서 새로운 목표를 안고 돌아왔지만 떠나기 전보다 더 고단한 삶으로, 먹고사는 데 급급하던 사람의 수준으로 되돌아온 것 같다며 귀향이 경솔한 생각이었다고 토로했다.
415
2009년 04월 25일, 62세 때, 노무현은 검찰의 서면질의에 11개 항목의 답변서를 보내며, 마지막 항목에서 도덕적으로 궁지에 몰려 정당한 권리조차 말하기 어렵고 때로는 피의자의 방어권마저 포기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416
2009년 04월 30일, 62세 때, 노무현은 오전 8시 버스로 봉하마을을 떠나 서울 대검찰청에 출석했고, 참여정부 총리·장관·참모들의 배웅 속에 만류에도 지지자들이 노란 국화를 던졌으며 5시간 20분 동안 취재 차량과 방송 헬기가 뒤따랐다.
417
2009년 04월 30일, 62세 때, 노무현은 문재인·전해철 변호사가 입회한 조사에서 아들과 관련된 500만 달러는 퇴임 후에야 알고 아들에게 손을 떼게 한 순수 투자 거래이고, 아내가 받아 쓴 3억 원과 100만 달러는 알게 된 경위와 쓰임새를 진술했으며, 정상문 전 비서관의 특수활동비 12억 5,000만 원 횡령은 몰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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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4월 30일, 62세 때, 노무현은 검사들이 대질 신문을 하겠다며 박연차 회장을 조사실에 데려왔으나 그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고, 100만 달러 사용처는 나중에 내역을 내기로 해 며칠 안에 작성해 제출했다.
419
2009년 5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사망 몇 주 전부터 바깥출입을 끊고 홀로 지내며 측근·비서진과의 대화도 피한다는 정보가 검찰 정보 부서에 거듭 보고됐다.
420
2009년 5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하루 한 끼만 들 만큼 식욕이 떨어졌고 우울 증세도 보인다는 내용이 보고됐다고 대검 범죄정보팀 관계자가 전했다.
421
2009년 05월, 62세 때, 노무현은 검찰이 곧 기소할 것으로 보고 틈틈이 진술을 준비했으나 검찰은 기소하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고, 보도는 계속됐으며 아내를 다시 소환한다는 말까지 돌았다.
422
2009년 5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박연차 회장이 회갑 선물로 줬다는 이른바 '명품 시계'가 보도되면서, 600만 달러 뇌물을 받고 잘못을 아내에게 떠넘긴 사람으로 비쳤으나 그 시계는 회갑 때 알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423
2009년 5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와 검찰,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이 자신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로 몰며 부림사건 변론 이후 자신이 걸어온 민주화 운동·시민운동·정치 20년 전체를 깎아내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424
2009년 5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자신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분노와 진보의 미래를 망쳤다는 원망 속에 많은 지지자가 등을 돌리는 것을 지켜보며 미안해했고, 끝까지 곁에 남아 변함없이 지지한다는 이들에게는 볼 면목이 없다고 느꼈다.
425
2009년 5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전직 대통령의 명예는 이미 지킬 수 없다고 보고 시민이자 피의자로서의 권리만 지키려 했는데, 알면서 저지른 범죄와 주변 관리 소홀로 생긴 사고는 다르다는 점이 자신을 믿고 도운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426
2009년 5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며 대통령이 되려 한 것 자체가 역량을 넘는 욕심이었다고 결론 내렸고, 준비 없이 자신을 따라 권력의 세계로 들어와 고초를 겪는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정치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겼다.
427
2009년 5월경 · 62세 무렵, 노무현은 귀향 후 품었던 꿈을 모두 접고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으며, 20년 정치 인생을 돌아보며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진보를 이루는 데 맞는 자리였는지 스스로 물었다.
428
2009년 05월, 62세 때, 노무현은 집필팀 회의 중에도 책을 낼 수 있을지, 낸다 한들 의미가 있을지 회의하며 운명이 자기편이 아닌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429
2009년 05월, 62세 때, 노무현은 사저 마당에도 나가지 못한 채 일곱 걸음 남짓한 방 안을 숫자를 세며 맴돌았고, 수사가 길어지며 자신의 구속을 겨냥한다고 보이자 인정할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인정해 버릴까 하는 생각에 시달렸다.
430
2009년 05월, 62세 때, 노무현은 다시 집필팀을 불러 모아 회고록의 뼈대가 될 원고를 스크린에 띄웠고, 윤태영이 그 책을 전담해 쓰겠다고 하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맡겼다.
431
2009년 05월 01일, 62세 때, 노무현은 새벽 2시 노란 풍선을 든 지지자들 사이로 대검찰청을 나와 밤새 차를 달려 봉하로 돌아와 기다리던 참모들과 곧바로 추가 진술 준비에 들어갔고, 이것이 생애 마지막 외출이 됐다.
432
2009년 05월 19일, 62세 때, 노무현은 집필팀을 해산하며 양정철·윤태영 등에게 앞으로 먹고살 방도가 있느냐고 물었고, 같은 날 강금원 회장의 보석 심리가 또 연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433
2009년 05월 22일, 62세 때, 노무현은 겨울에 발 수술을 받은 아내 대신 저녁에 아들 노건호와 함께 집 뒤뜰과 주변의 잡초를 뽑았다.
434
2009년 05월 23일, 62세 때, 노무현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거실 컴퓨터로 많은 사람에게 짐을 지웠고 건강이 나빠 책도 글도 쓸 수 없다며, 슬퍼하거나 미안해하거나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화장한 뒤 집 가까운 곳에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는 짧은 유서를 써 바탕화면에 저장했고, 이후 파일을 다시 열어 문장을 고쳐 저장했다.
435
2009년 05월 23일, 62세 때, 노무현은 오전 5시 47분 인터폰으로 이병춘 경호관을 불러 회색 재킷에 단화 차림으로 집을 나섰고, 경비 의경의 경례에 답한 뒤 어린 시절 뛰놀던 생가 골목을 따라 걸으며 담장 아래 잡초를 뽑았다.
436
2009년 05월 23일, 62세 때, 노무현은 봉화산 등산로 입구 마늘밭에서 마을 주민 박 씨에게 작황을 물었고, 정토원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봉수대 근처까지 올랐다가 되돌아 내려와 부엉이바위로 향했다.
437
2009년 05월 23일, 62세 때, 노무현은 부엉이바위에서 경호관에게 담배가 있는지 물었다가 없다는 답에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했고, 정토원에 가서 선진규 법사가 있는지 보고 오라며 경호관을 보냈다.
438
2009년 05월 23일, 62세 때, 노무현은 김해 봉하마을 뒷산 봉화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해 세상을 떠났다.
439
2009년 05월 23일, 62세 때, 노무현은 오전 6시 51분 부엉이바위 45m 아래에 쓰러진 채 이병춘 경호관에게 발견됐고, 맥박이 멎은 상태로 그의 어깨에 업혀 산비탈 66m가량을 내려온 뒤 인공호흡을 받으며 병원으로 이송됐다.
440
2009년 05월 23일, 62세 때, 노무현은 부산대병원 허기영 교수에게 1차 검안을 받았다.
441
2009년 05월 23일, 62세 때, 노무현은 유족이 그간 다녀온 부산대병원 이외의 곳에 시신을 보이길 원하지 않아, 봉하마을까지 내려온 서중석 국과수 법의학부장에게는 검안을 받지 않았다.
442
2009년 5월 23일경, 사후, 노무현은 추락 현장에 혈흔이 적다는 점을 내세운 시해설, 발을 헛디뎠다는 실족사설, 유서 조작설, 말기 폐암을 알고 목숨을 끊었다는 폐암설이 잇따라 퍼졌다.
443
2009년 05월 29일, 사후, 노무현은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국민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졌다.
444
2009년 05월 30일, 사후, 노무현은 상처가 지나치게 적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경찰의 재요청을 받은 서중석 국과수 법의학부장에게 시신 사진과 두부 CT, 부엉이바위 현장 조사를 토대로 영상부검을 받았고, 이는 국내 주요 인사를 대상으로 한 첫 영상부검이었다.
445
2009년 05월 30일, 사후, 노무현은 추락 같은 거대한 외력으로 두부 손상을 포함한 다발성 손상을 입어 숨졌다는 허기영 교수의 1차 판단에 서중석 법의학부장이 동의한다는 소견이 나왔다.
446
2009년 06월 01일, 사후, 노무현은 투신 장소인 부엉이바위에서 경찰 현장감식이 진행됐고, 모두 네 차례 이뤄진 감식에서 나뭇잎·이정표의 혈흔 3점과 옷·등산화의 혈흔 31점이 확인됐다.
447
2009년 06월 02일, 사후, 노무현은 봉하마을에서 서거 당일 상황을 재연하는 현장검증이 실시됐다.
448
2009년 6월 2일경, 사후, 노무현은 유서가 사망 당일 오전 5시 21~44분 본인이 직접 작성했고 그 뒤 접속 기록이 없어 조작될 여지가 없다는 경찰 발표가 나왔다.
449
2009년 6월 2일경, 사후, 노무현은 건강검진을 맡아 온 부산대병원의 발표로 폐암이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450
2009년 6월 2일경, 사후, 노무현은 사진·CT·진료기록으로 사인을 밝힐 수 있고 경위가 비교적 분명한 데다 유족이 거부했다는 이유로 정식 부검을 받지 않았고, 사인은 두개골 골절과 두부 손상, 다발성 골절과 내부 장기 손상으로 최종 발표됐다.
451
2009년 6월 2일경, 사후, 노무현은 추락 지점에서 11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상의 콤비가 경호관이 그를 바위 아래 공터로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진 것이라는 경찰 설명이 나왔다.
452
2009년 07월 10일, 사후, 노무현은 49재에 맞춰 김해 봉화산 정토원에 유골이 안장됐다.
453
2010년 05월 23일, 사후, 노무현은 1주기 추도식에 맞춰 봉하마을의 박석 묘역이 공개됐고, 이후 여러 추모시설이 차례로 조성됐다.
454
2012년, 사후, 노무현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로 불거진 'NLL 포기' 논란에 이름이 오르내렸고, 이 논란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
455
2025년, 사후, 노무현은 손바닥에 눈에 띄는 손상이 없었고 추락 당시 생활반응이 있었으며 목 조름 같은 폭행 흔적이나 방어흔은 없었다는 법의학 소견이 서중석 전 국과수 원장을 통해 공개됐다.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