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브리핑

0~2025.09.18·1화

박선원 : 한반도의 항해사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방어선

2026.09.10~2026.09.11·1화

박선원 : 김승원(한동훈) 맞불 작전 개시!

2026년 08월 28일 금요일

박선원 : 한반도의 항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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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14일 월요일, 0세 때, 박선원은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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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3세 때, 박선원은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초등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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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6세 때, 박선원은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중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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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6세 때, 박선원은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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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6세 때, 고등학교 1학년 박선원은 해외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는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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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 16세 때, 토요일, 박선원의 아버지 박영식은 고등학교 1학년 아들 박선원에게 김대중 선생님이 돌아오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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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7세 때, 고등학교 2학년 박선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로 언론에 의해 왜곡되는 현실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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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7세 때, 고등학교 2학년 박선원은 광주에서 나주로 피난을 내려오는 사람들과 시체들을 직접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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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7세 때, 고등학교 2학년 박선원은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교련복을 입고 나무 몽둥이를 들고 광주로 향하는 학생들을 직접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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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05월 00일, 17세 때, 박선원은 고등학교 2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목격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호남 사람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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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일요일, 17세 때, 고등학교 2학년 박선원은 나주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전라남도 광주에서 벌어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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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5일 일요일, 17세 때, 전남 순천 태생인 미국계 한국인 인요한은 형 인세반과 함께 광주 도청에서 시민군과 외신의 기자회견을 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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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8세 때, 고등학교 3학년 박선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교내시위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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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8세 때, 고등학교 3학년 박선원은 아버지에게 대한민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로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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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세 때, 연세대학교 1학년 박선원은 연세대학교의 이념 서클 중 1970년에 결성돼 참된 민주주의를 공부하는 사회과학 동아리 목화회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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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세 때, 연세대학교 1학년 박선원은 목화회가 전두환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가장 격렬하게 하기 때문에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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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세 때, 연세대학교 1학년 박선원은 입학 직후부터 전공인 경영학과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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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19세 때, 박선원은 전남 나주 영산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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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19세 때,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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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0세 때, 연세대학교 2학년 박선원은 전두환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데모에서 가장 선두에 서서 싸우는 전투 소조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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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21세 때, 연세대학교 3학년 박선원은 3학년 1학기까지는 졸업을 위한 최소 학점만 받고 3학년 2학기 때부턴 전공 공부는 중단하고 학생 운동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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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21세 때, 연세대학교 4학년 박선원은 전투 소조로서의 활약을 인정 받아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지도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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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겨울, 21세 때, 연세대학교 3학년으로 총학생회 지도부인 박석원은 광주민주화운동 5주기인 1985년에 맞춰서 전두환 정권에 치명타를 입힐 투쟁 전략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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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겨울, 21세 때, 연세대학교 3학년으로 총학생회 지도부인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1년 선배이자 총학생회장이었던 송영길에 이어 전국 민정당사 15곳에 돌을 던지는 공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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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겨울, 21세 때, 연세대학교 3학년으로 총학생회 지도부인 박선원은 전국 민정당사 15곳에 대한 공격이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자 더 센 투쟁 전략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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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겨울, 21세 때,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79학번으로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이자 5월투쟁 위원장이었던 문용식이 경찰인 아버지에 의해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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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1월 14일 수요일, 21세 때, 연세대학교 4학년으로 연세대학교의 초대 직전 총학생회장이었던 송영길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최형두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영춘과 함께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해 있던 여당 민주정의당 중앙당사를 점거하고 농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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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2세 때 박선원은 미국 문화원을 점거하면 감옥에 갈 것을 알았고 그 전에 면회를 와 줄 여자친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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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2세 때, 박선원은 5명의 여학생들과 2회씩 만나면서 여자친구를 물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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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2세 때,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82학번 동기로 시위 현장에선 늘 맨 앞에 나가서 돌을 던지던 여학생과 사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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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2세 때, 박선원은 서대문 구치소로 면회를 온 아버지 박영식을 만나서 아들이 군대에 갔다고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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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22세 때, 연세대학교 4학년 박선원은 민족통일과 민주쟁취와 민중해방을 목표로 하는 투쟁위원회인 삼민투가 결성되면서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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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22세 때, 연세대학교 4학년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을 맡으면서 학생 운동의 배후에서 전면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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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22세 때,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앞에서 학생 운동을 그만두라고 자신을 설득하려고 찾아온 아버지와 육군 중령인 고모부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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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22세 때, 박선원은 고모부가 박선원의 아버지가 몸이 안 좋다고 설득했는데도 학생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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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4월 3일 수요일 , 22세 때,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김민석이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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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2세 때, 박선원은 수배 상태로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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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14일 화요일,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전국학생총연합 의장 김민석과 함께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전국학생총연합 3차 대회에서 서울 지역 5개 대학 학생회의 일원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미국 문화원을 점거농성하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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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14일 화요일, 22세 때, 박선원은 전국학생총연합 3차 대회에서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에서 서울대생과 고대생은 미국 문화원에 진입하고 연대생과 성대생은 후속 지원을 하기로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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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18일 토요일,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과 서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함운경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5주기에 맞춰서 미국 문화원을 점거하려고 했지만 미국 문화원 내부 행사로 주변 경비가 강화되면서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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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목요일 낮 12시 10분 경,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택시를 타고 미국 문화원과 미국 대사관 주변을 돌면서 망을 보다가 점거 농성이 시작되지 않자 그대로 연세대학교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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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목요일 오후,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이 중단된 원인은 정보가 샜다는 오판 때문이었다고 판단하고 다음날인 1985년 5월 24일 금요일에 다시 시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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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목요일 오후,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미국 문화원 점거 시각을 순찰을 도는 경찰들의 점심 시간에 맞춰서 1985년 5월 24일 금요일 오후 12시 30분으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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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목요일 밤,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미국 문화원을 점거할 75명을 연세대학교에 집결시켜서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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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목요일,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 남고 대신 여자친구를 미국 문화원 맞은편 롯데백화점으로 보내서 상황을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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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목요일,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여자친구와 점거가 성공하면 전화로 “날씨가 좋으니 소풍을 가자”는 암호를 말하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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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목요일 오후 12시 35분 경,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서 여자친구로부터 “날씨가 좋으니 소풍을 가자”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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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목요일 오후,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허인회와 함께 신문사에 미국 문화원을 점거한 사실을 알리고 선언문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는가를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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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05월 23일, 22세 때,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으로서 서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함운경을 비롯한 전국학생총연합 소속 서울 지역 5개 대학 학생회 소속 73명이 서울 을지로1가에 위치한 서울 미국 문화원을 점거할 당시 직접 점거 농성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배후에서 조력했다.
50
1985년 5월 25일 토요일, 22세 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의대생 인요한은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서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을 만나서 전두환 정부의 외무장관 이원경이 주한미국대사 리처드 루이스 워커에게 강경 진압을 하겠다고 설득하고 있다면서 가능한 빨리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을 당장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51
1985년 5월 25일 토요일 저녁, 22세 때,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은 서울대총학생회장 김민석과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허인회와 함께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기도실에서 미국 대사관의 고위 관리와 면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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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5일 토요일 저녁, 22세 때, 박선원은 미국 대사관측에, 1980년 5월 미국 정부가 전두환 신군부의 군대 이동을 묵인한 것에 사과하고, 전두환 정권 대신 한국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밝히고, 미국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반미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미국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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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6일 일요일 새벽 0시 자정 경, 22세 때, 박선원은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고 미국측이 약속을 깼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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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7일 22세 때, 월요일, 주한미국대사 리처드 루이스 “딕시” 워커는 대학생들의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이 끝났는데도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자유민주주의에 진전을 이루고자 하는 한국 국민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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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05월 27일, 22세 때,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삼민투 위원장으로서 주한미국대사 리처드 루이스 “딕시” 워커가 대학생들과의 약속을 지켰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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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8일 화요일, 22세 때,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박선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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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6월, 22세 때,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의 주동자로 수배 중이던 박선원이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 숨어 있을 때 아버지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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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6월, 22세 때, 수배 중이던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학생 회관으로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 박영식에게 여자친구를 소개시켜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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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6월, 22세 때, 수배 중이던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학생 회관으로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 박영식이 자신의 반독재 투쟁을 이젠 인정했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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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6월 7일 금요일, 22세 때, 국방부 장관 윤성민은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광주에 내려진 계엄령 선포는 미국과의 사전 논의가 없었으며 광주에 특전사와 20사단을 투입한 것은 미국의 사전 승인 없이 이뤄졌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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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22세 때,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 박선원은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투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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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3월 20일 목요일 , 23세 때,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박선원은 국가보안범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서울형사지법 합의 12부로부터 징역 3년과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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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23세 때, 박선원은 수원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아버지가 중학생인 여동생으로부터 아버지가 56세를 일기로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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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23세 때, 박선원은 교도소측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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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23세 때, 박선원은 일주일 동안 수원 교도소의 불교방에서 아버지를 위해 불경을 읽고 목탁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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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23세 때, 박선원의 아버지 박영식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로서 현충원에 안장됐다.
67
1986년 9월 7일, 23세 때, 박선원의 아버지 박영식이 향년 55세로 별세했다.
68
1987년, 24세 때, 박선원은 감옥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영어 회화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69
1987년 여름, 24세 때, 박선원은 청주교도소에서 김민석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70
1987년 하반기, 24세 때, 박선원은 김민석의 어머니가 넣어준 영어 회화 테이프로 영어 공부를 함께 했다.
71
1987년 말, 24세 때, 박선원은 김민석과 함께 청추교도소 교무과장 사무실에서 마이마이를 귀에 꽂고 영어 공부를 했다.
72
1987년 말, 24세 때, 박선원은 김민석과 출소한 이후에 연구소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73
1988년 가을, 25세 때, 박선원은 김민석과 함께 민족과 세계연구소를 개소했다.
74
1988년 2월 26일 금요일, 25세 때, 박선원은 2년 6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대통령 노태우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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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26세 때, 박선원은 학생 운동을 함께 했고 2년 6개월 동안 옥바라지까지 해줬던 여자친구와 결혼했다.
76
1989년 11월 9일 목요일, 26세 때, 박선원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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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20일 월요일, 26세 때, 박선원은 운동권 선배인 이우재와 장기표가 주도하는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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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7세 때, 박선원은 첫째 아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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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10일 토요일, 27세 때, 박선원은 운동권 선배들인 이우재가 상임 대표를 맡고 김상기와 김낙중이 공동대표를 맡고 이재오와 김문수가 주도해서 창당한 민중당에 입당해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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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17일 목요일, 27세 때, 박선원은 CNN을 통해 1차 걸프전을 시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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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3월 24일 화요일, 29세 때, 박선원은 몸 담고 있던 민중당이 총선에서 득표율 미달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면서 정당법에 의해 해산되자 재야 정치권을 떠나서 학교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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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0세 때, 성균관대학교 박사과정 이종석은 박사논문 조선노동당의 지도사상과 구조변화에서 북산 사회를 북한 내부의 시선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북한 내재적 접근론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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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0세 때,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84
1995년, 32세 때, 워릭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박선원은 연간 6500파운드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교에서 제공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박선원의 아내는 대학 구내 식당에서 팬케이크를 구워서 돈을 벌었다.
85
1995년 10월, 32세 때, 박선원은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 주동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미국과 일본으로는 유학을 갈 수가 없었다.
86
1995년 10월, 32세 때, 박선원은 영국 코번트리에 위치한 명문대학교인 워릭대학교 대학원의 국제정치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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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33세 때, 워릭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박선원은 1980년 한국에서 신군부 쿠데타와 광주학살이 발생하던 정권 교체기에 미국 카터 행정부와 일본의 자민당 정권은 어떤 태도를 취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분석하는 박사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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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0월 00일, 36세 때, 박선원은 워릭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에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주한일본대사를 역임하면서 10.26 박정희 암살과 12.12 전두환 쿠데타를 모두 관통한 교린대학교 명예교수 스노베 료조를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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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7세 때,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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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7세 때, 연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 박선원은 80년대 운동권 시절부터 동지이자 절친이었던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김민석으로부터 청와대 외곽 정무보좌팀에 합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91
2000년, 37세 때, 연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 박선원은 국회의원 정동영, 김한길, 김민석, 정균환, 정동채 등 5명과 함께 대통령 김대중에게 정무적 자문을 해주는 역할을 했다.
92
2000년 2월, 37세 때, 워릭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박선원은 박사 논문을 거의 마무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영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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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17일 수요일, 37세 때, 연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 박선원은 박사 학위 논문 한미일 삼각동맹안보체제의 정치적 역동성 : 1979 - 1980년 한국의 정권 교체기에 나타난 일본의 영향력을 공식 발표했다.
94
2000년 5월 17일 수요일, 37세 때, 연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 박선원은 워릭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 학위 논문에서 1979년 11월 말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주일 한국대사관 수석공보관 허문도가 주한일본대사관 인근 보안사령부 안가에서 주한일본대사 스노베 류조를 만나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곧 체포할 것”이라며 12.12 군사 쿠데타를 사전 통보한 사실을 밝혀냈다.
95
2000년 5월 17일 수요일, 37세 때, 연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 박선원은 박사 학위 논문에서 1980년 5월 10일 토요일 일본 내각조사실 에비스 겐이치가 북한 남침 결정 문건을 보고했고 이것이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무력 진압에 국제정치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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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17일 수요일, 37세 때, 연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 박선원은 박사 학위 논문에서 쇼와 시대의 참모로 불렸던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 세지마 류조가 1983년 1월 11일 화요일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전후 첫 공식 방한을 성사시키고 대한 경제협력 자금 40억 달러를 제공해주면서 전두환 5공 정권과 거래를 했던 사실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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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18일 목요일, 37세 때, 연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 박선원은 한국일보 기자 안준현과 이주훈과의 인터뷰에서 1979년부터 1980년까지 한반도 국제 정치 역학 구조 안에서 “미국은 민간정부 수립을 목표로 신군부와 지속적인 갈등을 빚은 반면 일본은 한반도의 조기 안정과 자국의 이익 측면에서 신군부를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미일 양국은 동북아 삼각안보 동맹체제를 유지하려는 큰 틀 안에서 제각기 자국 이익을 위해 현실적인 정책을 선택한 것일 뿐이며 이 연구가 미국에 면죄부를 주거나 감정적인 일본 책임론은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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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8세 때, 박선원은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연구교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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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8세 때,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연구교수 박선원은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 이종석과 함께 한반도 평화보고서를 공동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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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8세 때, 신분이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연구교수여서 대선 캠프에 공개적으로 참여하긴 어려웠던 박선원은 경남대학교 극동문제 연구소와 외교안보연구원과 상지대학교 교수로서 북한학 전문가인 서동만과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 이종석을 통해 대통령 후보 노무현에게 안보정책에 관한 의견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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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38세 때, 김대중 청와대 외곽 정무보좌팀의 일원이었던 박선원은 차기 대권 후보로 노무현을 지지하면서 노무현 대선 캠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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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38세 때, 박선원은 노무현 대선 캠프에서 대선 후보 노무현의 메시지를 관리하고 안보 정책에 관하 조언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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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초, 39세 때,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한국 국방부 장관 김동신에게 주한미군 감축협상을 시작하자고 요구했다.
104
2002년 초, 39세 때,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한국 국방부 장관 김동신이 주한미군 감축협상에 소극적으로 시간을 끌자 애를 먹었다.
105
2008년, 39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미국 국무부 차관보 리차드 롤리스로부터 2002년 2월 25일 화요일 대통령 노무현의 취임식 당일에 주한 미군 감축 이야기를 꺼낸 것은 미국 입장에선 김대중 정부 말기부터 1년을 기다려온 일이었기 때문에 긴급한 이슈였다는 뒷설명을 들었다.
106
2002년 10월, 39세 때,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와 함께 조용히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대신 한반도 긴장을 높이는 성독격서 전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07
2002년 11월 12일 화요일, 39세 때,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한국 외교 장관 유종하와 한미외교장관 회담을 열었다.
108
2002년 12월, 39세 때, 노무현 대선캠프에서 메시지를 관리하던 박선원은 2차 북핵 위기에서 긴장을 고조시키는 쪽은 북한만이 아니라 미국이기 때문에 대선후보 노무현은 미국을 더 강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안보팀의 보고서에 우려했고 대신 북미 어느 한쪽을 비판하기보단 한국이 한반도 평화 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보고했고 결국 노무현은 박선원의 의견을 선택했다.
109
2002년 12월, 39세 때, 박선원은 2차 북핵 위기의 전개 과정을 정확하게 예측했던 과정을 칼럼으로 써서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했다.
110
2002년 12월 6일 금요일, 39세 때, 노무현 대선 캠프에서 외교안보 메시지를 관리하던 박선원은 결국 미국이 북한 선박을 나포하고 북한은 IAEA 사찰단을 쫓아내고 NTP에서 탈퇴하면서 강대강 충돌로 전개될 것이라는 분석을 공개했다.
111
2002년 12월 9일 월요일, 39세 때,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미국과 스페인 연합 작전을 통해 예맨으로 향하고 있던 북한 선박 서산호를 나포해서 15개의 스커드 미사일과 재래식 폭탄을 압수했다.
112
2003년,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국가안보전략지침을 수립하면서 대통령 노무현이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한국이 거부능력 수준의 군사적 하드파워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안보철학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13
2003년,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국가안보전략지침을 수립하면서 방위충분성을 확보한 군사력과 평화 지향적인 외교력이라는 창과 방패를 들고 한미 동맹을 기본축으로 중국과 러시아와 균형 외교를 해야 한반도 평화의 균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대통령 노무현의 안보비전을 완성했다.
114
2003년,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국가안보전략지침을 수립하면서 대통령 노무현이 늙어가는 일본과 강해지는 중국과 커져가는 미중 갈등 사이에서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하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구체화해나가는 과정을 보좌했다.
115
2003년 1월, 39세 때, 박선원은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 이종석으로부터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외교안보분과위원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116
2003년 1월, 39세 때, 박선원은 북핵 문제 해법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서 세종연구소의 학술지 국가안보전략에 기고했다.
117
2003년 3월, 40세 때, 박선원은 노무현 청와대의 지하 벙커에 마련된 NSC 사무처에서 남북관계와 한미관계와 한일관계에 관련된 외교 전략 지침을 짜는 일을 하면서 아침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했다.
118
2003년 3월 7일 금요일부터 2003년 3월 12일 수요일까지, 40세 때, 박선원은 HSBC와 함께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과 노동 정책을 해외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는 정책 쇼케이스를 다녔다.
119
2003년 3월 7일 금요일부터 2003년 3월 12일 수요일까지, 40세 때, 박선원은 6일 동안 싱가포르와 홍콩과 런던과 뉴욕과 보스턴을 돌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노무현 정부의 외교 정책과 노동 정책을 설명했다.
120
2003년 3월 17일 월요일, 40세 때, 박선원은 노무현 청와대에서 신설된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의 전략기획실에서 3급 행정관인 전략기획국장으로서 업무를 시작했다.
121
2003년 3월 20일, 40세 때,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폭격하면서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을 겨냥한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다.
122
2003년 4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함께 30대 4급과 5급 행정관을 증원해서 사무처 직원을 69명까지 늘렸다.
123
2003년 4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함께 기능국과 지역국으로 구성된 미국 백악관의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벤치마크했다.
124
2003년 4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NSC 전략기획실장 서주석과 함께 김대중 청와대 시절 국방부와 외교부의 행정적 보조 역할에 머물렀던 NSC 사무처를 대통령의 안보정책을 실질적으로 수립하는 실세 조직으로 격상시켰다.
125
2003년 4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NSC 전략기획실장 서주석과 함께 NSC 사무처를 전략기획실, 정책조정실, 정보관리실, 위기관리실의 4실 체제로 증편했다.
126
2003년 4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를 구축하면서 비주류 대통령 노무현의 좁은 인재풀과 파견직 공무원들의 충성심 문제로 애를 먹었다.
127
2003년 4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대통령이 누군가를 3번 이상 회의에 안 부른다면 그건 기대에 못 미치니 알아서 나가라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128
2003년 4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워싱턴 조야에 노무현은 효순 미순 양 사건에 촉발한 반미 분위기를 타고 한국 대통령에 당선된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는 걸 알았다.
129
2003년 4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워싱턴과 서울의 보수층이 자신과 NSC 사무차장 이종석을 반미 탈레반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30
2003년 05월 00일, 40세 때, 박선원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으로서 한미정상회담 조율 과정에서 외교장관 윤영관을 중심으로 한 외교라인과 NSC 사무차장 이종석을 중심으로 한 안보라인의 손발이 맞지 않으면서 대통령 노무현을 한국에선 친미주의자로, 미국에선 반미주의자로 비춰지게 만드는 실수를 했다고 판단했다.
131
2003년 5월, 40세 때, 대통령 노무현은 NCS 사무처 행정관 박선원을 소개 받았지만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132
2003년 5월, 40세 때, 국민참여수석실 참여기획비서관 천호선은 노무현이 박선원을 계속 기억하지 못하자 다시 한번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그때서야 노무현은 박선원을 기억했다.
133
2003년 05월 00일, 40세 때, 박선원은 자신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낙인찍혔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에서 일하게 해준 대통령 노무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134
2003년 5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북한이 6자 회담의 틀을 깨는 레드라인을 넘고 미국이 강경 대응을 할 경우 한국은 어떤 대응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응 계획(Contingency Plan)을 시나리오별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135
2003년 05월 00일, 40세 때, 박선원은 NSC 사무처 행정관으로서 미일이 함께 북핵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 한반도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것을 보며 미국이 동북아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보고 긴장했다.
136
2003년 05월 19일, 40세 때, 박선원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으로서 NSC 사무차장 이종석의 배려로 처음으로 대통령 노무현과 대면했다.
137
2003년 6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의 지시에 따라 한중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중국과 한중공동성명을 조율했다.
138
2003년 6월 4일 수요일 저녁, 40세 때, NSC 사무처 행정관 박선원은 북핵 전담 대사 이수혁과 함께 한일정상회담의 막판 협상을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139
2003년 6월 5일 목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행정관 박선원은 일본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 국장 야부나카 미토치에게 평화적 해결이라는 문구를 한일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넣지 않으면 대통령 노무현의 방일은 없을 것이라고 압박했다.
140
2003년 6월 6일 금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행정관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이 국빈 방문을 위해 일본 도쿄에 도착하는 날까지 일본 외무성과 협상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복귀했다.
141
2003년 6월 12일 목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북핵 담당 외교통상부 차관보 이수혁을 보좌해서 미국 하와이에서 미국 국부무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제임스 켈리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 야부나카 미토리와 만나서 한미일 공동성명을 위한 대북정책조정그룹 회의를 진행했다.
142
2003년 6월 12일 목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한미일 협상과 한일 협상과 미일 협상에선 북핵의 평화적 해결에 동의하던 미일이 미일협상에선 말이 바뀌고 결국 한미일 협상에선 한국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했다.
143
2003년 7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한국의 북한과 북핵에 대한 변화된 입장을 다시 정리해서 중국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
144
2003년 7월 말, 40세 때, 박선원은 제주도에 휴가를 내려왔다.
145
2003년 8월 중순,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1차 6자 회담을 앞두고 대통령 노무현이 마련한 대표단 격려 행사에 참석했다.
146
2003년 8월 중순,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1차 6자 회담에서 대통령 노무현의 뜻을 대표단 안에서 관철시켜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
147
2003년 8월 13일 수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한미일 협의를 통해 미국 국부무 차관보 제임스 켈리에게 6자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이 동시에 긴장 완화를 하는 행동을 교환하는 협상안을 설명했다.
148
2003년 8월 25일 월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처 정책조정실 행정관 1인과 함께 외교통상부 차관보 이수혁을 필두로 국정원, 국방부, 통일부 1인씩과 함께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서 6자 회담을 시작했다.
149
2003년 8월 25일 월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 대표단이 일부러 북한 대표단을 넓은 회의장 한 구석에 앉혀 놓고 북한과의 직접 대화는 거부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150
2003년 8월 25일 월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이 처음부터 6자 회담의 틀 안에 북한을 끌어들여서 대화의 모양새는 취하지만 실질적인 일대일 회담은 거부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51
2003년 8월 25일 월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이 한미한일한중 연쇄 정상회담으로 어렵게 만든 6자 회담이 시작하고 25분 만에 깨져버리는 상황을 경험했다.
152
2003년 9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에게 이라크 추가 파병의 외교적 군사적 정무적 전략을 수립해서 보고했다.
153
2003년 9월 9일 목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6자 회담이 깨진 뒤 북한이 북한 노동당 창건일인 9.9절에 맞춰서 북한이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새로운 미사일을 공개해서 긴장을 높일지 여부를 예의 주시했다.
154
2003년 9월 9일 목요일,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9.9절 군사 퍼레이드에서 북한이 새로운 미사일을 공개하지 않자 북한이 아직은 6자 회담을 깰 생각이 없다고 읽었다.
155
2003년 10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함께 주한미국대사 토마스 허버드에게 주한미군 2사단의 후방 배치는 노무현 정부 임기 안에 시작하겠지만 주한미군 감축은 공론화를 통해 한국 국민들의 합의를 얻어야 가능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156
2003년 10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함께 주한미국대사 토마스 허버드에게 주한미군 감축 논의는 1년 뒤인 2004년 여름에 공론화하기로 합의했다.
157
2003년 10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의 요구대로 8000명의 전투병을 파병하는 대신 3000명 정도만 추가 파병하거나 의료공병부대만 파경하거나 경계 병력만 2500명 정도를 보내주는 대안을 수립해서 보고했지만 외교부 북미국장 위성락은 안 주는 것만 못하다고 반대했다.
158
2003년 12월, 40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중국 외교부 부부장 다이빙궈와 미국 백악관의 2차 6자 회담의 일괄타결 합의안 초안을 제안했지만 거절 당했다.
159
2003년 12월 19일 금요일, 40세 때,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는 핵과 생화학 무기를 완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160
2004년 가을,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합동참모본부에서 열린 워게임인 태극연습에서 한미연합사가 북한 급변 사태에서 특정 부대를 투입하는 훈련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161
2004년 가을,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합참과 국방부를 통해 한미 국방부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노무현에게 보고하지 않고 북한 내부의 급변 사태에서 한미가 개입하는 개념계획 5029를 수립하고 작전계획으로 격상시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162
2004년 가을,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북한이 계획적 남침을 하는 작전계획 5027과 남북간에 우발적 전쟁이 일어나는 우발계획 5028과 별개로 북한 내부의 급변 사태가 벌어지면서 한미가 개입하는 개념계획 5029의 수립과 작전계획 격상을 중단시켰다.
163
2004년 00월 00일, 41세 때, 박선원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으로서 연말 무렵 대통령 노무현이 외교안보분야 현안에서 오히려 참모진과 전문가들을 리드하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164
2004년 1월 4일 일요일, 40세 때,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미국 민주당 상원 외교위원회 간사 조 바이든의 보조관 프랭크 재누치와 리차드 루가 상원 의원의 보좌관 키스 루스와 핵 물리학자인 존 루이스와 지그프리드 해커 등 민간대표단을 평양으로 초청해서 연변 핵재처리시설을 일부 공개했다.
165
2004년 2월 25일 목요일,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2차 6자 회담에 참석했다.
166
2004년 3월,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함께 별도로 국가안보정책조정회의를 열고 국무조정실장 한덕수를 배석시켜서 대통령 권한대행 고건에게 알아서 보고하게 했다.
167
2004년 03월 12일, 41세 때, 박선원은 노무현 청와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으로서 국무조정실장 한덕수의 지시를 받고 모멸감을 느꼈다.
168
2004년 3월 12일 금요일, 41세 때, 노무현 청와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국무조정실장 한덕수의 지시를 묵살했다.
169
2004년 3월 12일 금요일 오후 5시, 41세 때, 노무현 청와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대통령 노무현에게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는 기간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 고건에게는 중요 안보 이슈에 관해 서면으로 보고하겠다고 보고했다.
170
2004년 4월 19일 월요일, 41세 때,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은은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서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과 후진타오와 연쇄 회담을 했다.
171
2004년 4월 19일 월요일, 41세 때,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는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은에게 핵개발을 포기할 경우 북중 경제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172
2004년 04월 20일, 41세 때, 박선원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으로서 한미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 장비 거래를 한국 대통령이 탄핵당해 직무가 정지된 상황에서 미국이 새삼스럽게 공개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173
2004년 6월,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국가안보보좌관 권진호와 함께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서 한미 NSC 협력을 뜻하는 N2N 협력과 청와대와 백악관의 협력을 뜻하는 H2H 협력을 강화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174
2004년 6월 21일 월요일,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6자 회담 실무그룹회의에 참석했다.
175
2004년 06월 21일, 41세 때, 박선원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으로서 미국 6자 회담 차석 대표 조셉 디트라니가 회담을 진전시킬 의지가 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176
2004년 6월 21일 월요일,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조셉 디트라니에게 베이징의 주중미국대사관에서 한미협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177
2004년 6월 21일 월요일,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의 재가를 받고 미국 6자 회담 차석 대표 조셉 디트라니에게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과 협력할 뜻이 없으면 한국은 한미협력 대신 남북협력을 통해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다고 통보했다.
178
2004년 6월 23일 수요일,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베이징에서 열린 3차 6자 회담을 국내 정치적으로 강해진 노무현 한국 정부가 주도하면서 남북미일중러 6개국이 거의 합의문 작성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경험했다.
179
2004년 6월 24일 목요일,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여러 문장들을 대안으로 제시한 끝에 “and difference”라는 두 단어만 추가하는 대안을 북미 양측에 제안했지만 미국 부통령 딕 체니는 최종 거부했다.
180
2004년 6월 25일 금요일, 41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 부통령 딕 체니의 몽니 때문에 한국이 주도권을 쥐었던 3차 6자 회담도 합의문 없이 끝나는 좌절을 경험했다.
181
2005년,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백악관과의 협의를 통해 대전 지질자원 연구원이 북한이 핵실험을 할 경우 함북 길주 인근에서 지진파를 탐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시작했다.
182
2005년 3월 5일 토요일,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이 공군사관학교에서 할 예정인 동북아균형자론을 담은 연설문의 요지를 2시간 전에 미국측에 사전 설명해줬다.
183
2005년 4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보수 언론의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는데 앞장섰다.
184
2005년 4월 4일 42세 때, 월요일, 조선일보 기자 류근일은 “동북아 균형자론은 과대망상이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미국이나 김정일이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 남한 외톨이 정권의 훈수를 따를 것인가”라고 썼다.
185
2005년 5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개념계획 5029의 중단과 관련해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븐 해들리로부터 해명을 요구 받았다.
186
2005년 5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함께 개념계획 5029와 관련해서 보수 언론에 의해 한미동맹을 흔들려고 한다고 비판 받았다.
187
2005년 5월 말,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NSC 사무차장 이종석과 미국 백악관에서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븐 해들리를 만나서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시키려면 한국의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노무현의 재가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188
2005년 6월, 42세 때, 대통령 노무현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에게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미스터 김정일이라는 발언을 해줄 것과 북한과의 외교 관계 정상화라는 표현을 쓰도록 미국측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
189
2005년 6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한미정상회담 사후 협의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에게 한미정상회담에서 끼어들려고 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질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190
2005년 6월, 42세 때, 대통령 노무현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에게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과는 대통령과 상의하듯이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191
2005년 6월 3일 금요일,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 스티브 해들리와 2005년 6월 10일 금요일 열릴 한미정상회담에 관해 사전 조율을 했다.
192
2005년 6월 9일 목요일 밤,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 대통령 노무현을 매복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193
2005년 6월 10일 금요일 오전 7시,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에게 미국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한미정상회담에서 매복 공격 질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4
2005년 6월 10일 금요일 오전 8시 30분, 42세 때, 대통령 노무현은 외교안보비서관 권진호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에게 만일 미국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한미정상회담에서 입을 열 경우 당장 한미정상회담을 깨고 일어날 것이라고 백악관 안보보좌관 스티브 해들리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195
2005년 6월 10일 금요일 오전 9시,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외교안보비서관 권진호와 함께 백악관 안보보좌관 스티브 해들리에게 한미정상회담에서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실제로 매복 질문 공격을 하면 대통령 노무현은 곧바로 차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라고 통보했다.
196
2005년 6월 17일 금요일,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이 집권 이후 초지일관 북한 체제 보장을 통한 한반도 평화를 주장해왔던 것이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이유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197
2005년 7월, 42세 때, 대통령 노무현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과 비무장지대에 경수로를 지어서 전력은 북한으로 보내고 폐연료봉은 남한으로 빼내는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실제로 DMZ에서 지질 조사까지 진행했다.
198
2005년 7월, 42세 때, 대통령 노무현은 9.19 공동성명의 초안이 완성되자 이종석과 박선원 등을 청와대로 불러서 만찬을 열었다.
199
2005년 9월 초,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 강경파가 곧 발표된 9.19 공동성명에 불만을 갖고 북한에 대한 모종의 압박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낌새를 챘다.
200
2005년 9월 14일 수요일, 42세 때, 대통령 노무현은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에게 미국의 강경파가 9.19 공동성명의 판을 깨려고 할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도 합의문에 추가하라고 지시했지만 박선원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201
2005년 9월 20일 화요일,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9.19 공동성명 합의문 작성에만 집중하다가 위약 문제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약속을 먼저 깬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202
2005년 10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백악관을 찾아가서 2일 동안 설득해서 미국이 다시 6자 회담에 나오게 만들었다.
203
2005년 10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미국 백악관의 빅터 차와 윌리엄 토비와 북핵 문제를 다룰 6자 회담에 위해 매일 통화를 하면서 조율했다.
204
2005년 10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북한으로부터 비핵화 합의를 하고 금융 제제를 하는 미국에게 따지기 위해서 6자 회담에 나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205
2005년 11월 초, 42세 때,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 담당 국장 빅터 차는 국가안전보장회의 대량확산방지전략 담당 선임국장 윌리엄 토비와 함께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행정관 박선원에게 6자 회담을 보이콧하겠다고 밝혔다.
206
2005년 11월 초, 42세 때, 빅터 차는 박선원에게 9.19 공동성명은 무용지물이며 북한을 실질적으로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7
2005년 11월 초, 42세 때, 박선원은 직접 비행기를 타고 백악관에 가서 3시간 동안 빅터 차와 윌리엄 토비를 설득했고 결국 6자 회담에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냈다.
208
2005년 11월 초,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대량확산방지전략 담당 선임국장 윌리엄 토비로부터 1985년 8월 미국 문화원을 점거했던 사건에 관해 직설적인 질문을 받았다.
209
2005년 11월 초,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윌리엄 토비에게 1985년 5월 미국 문화원을 점거했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당시 주한미국대사 딕시 워커가 끝까지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켰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210
2005년 11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부산 APEC 정상회담 사전 조율 작업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방한을 앞두고 한국을 더 잘 알고 싶어한다는 말을 들었다.
211
2005년 11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방한 중에 대통령 노무현과 사진을 찍어서 백악관에 걸어두고 싶어한다는 말을 들었다.
212
2005년 11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 백악관과 한미 정상이 함께 경주에서 불국사를 함께 거닐면서 한미 정상 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
213
2005년 11월, 42세 때, 한국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미국 NSC 아시아 담당 국장 빅터 차와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을 작성했다.
214
2005년 11월 9일 수요일,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핵 관련 6자 회담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이 계속 참석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215
2005년 11월 9일 수요일,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베이징에서 열린 제5차 6자 회담 1단계 회의를 통해 미국과 북한의 신뢰가 손상됐다는 부분을 파악했다.
216
2005년 11월 10일 목요일,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BDA 제제로 미북의 신뢰가 회복 정도로 훼손됐다고 보고했지만 서울의 NSC 사무차장 이종석은 과민 반응이라고 여겼다.
217
2005년 11월 16일 수요일,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백악관 안보보좌관 스티븐 해들리로부터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미주국가회의에서 시달리고 와서 기분이 언잖다는 얘기를 들었다.
218
2005년 11월 16일 수요일, 42세 때, 백악관 안보보좌관 스티브 해들리는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에게 다음날인 2005년 11월 17일 목요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선 덕담 위주로 부드럽게 가자고 주문했다.
219
2006년, 43세 때,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이 김대중의 햇볕정책이나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처럼 노무현 독트린을 만들자는 보좌진의 제안에 질색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220
2006년 00월 00일, 43세 때, 박선원은 노무현 정부 국정원장 김승규에게 “충분히 숙성되게 제 능력을 개발해서 만개 상태에서 대통령을 보좌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선배들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정도로 안보전략비서관이라는 막중한 자리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있다는 자체가 죄스럽기도 하고 또 늘 부담이 된다. 만약 내가 기득권층이라든가 주류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여서 사회적 관계까지 다 동원해서 대통령을 보좌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저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221
2006년 1월 42세 때, NSC 사무처 전략기획국장 박선원은 노무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으로 임명됐다.
222
2006년 01월 00일, 42세 때, 박선원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으로서 대통령 노무현과 독대하는 과정에서 9.19 공동성명이 흔들리고 BDA 문제가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 동북아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는 한국도 핵을 갖는 공포의 균형일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223
2006년 1월, 42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청와대를 찾은 미국 재무부의 위폐 조사단과 감시국과 국제금융거라 감시팀으로부터 북한의 위폐를 찍은 증거 사진들을 기반으로 한 브리핑을 받았다.
224
2006년 4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미국 샌디에이고 대학이 도쿄에서 주최하는 트랙2 동북아 다자안보대화인 동북아협력대화에서 미국 6자 회담 수석 대표 크리스토퍼 힐과 북한 6자 회담 수석 대표 김계관이 만나서 달러 위조지폐 유통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는 작전을 기획했다.
225
2006년 4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도쿄에서 동북아협력대화에서 북중미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226
2006년 4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일부러 북한 대표한이 머무는 호텔에 투숙해서 우연히 한북미가 모이는 자리를 만드는 블라인드 데이트 작전을 실행했다.
227
2006년 4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끝내 크리스토퍼 힐이 나오지 않자 김계관이 화를 내면서 “크리스토퍼 힐과 곤돌라자 라이스가 평양에 오겠다고 하고 연막을 치더니 결국 금융제재로 우리 경제를 괴사시키려고 하고 있다. 원숭이 꽁지에 불을 붙여서 깜짝 놀라게 하는 꼴을 반드시 보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을 직접 들었다.
228
2006년 5월 10일 수요일,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이 평양에서 함북 길주 풍계리로 이동하고 있다고 대통령 노무현에게 보고했다.
229
2006년 5월 10일 수요일,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에게 오차 범위 40cm 수준의 핀포인트 저격이 가능한 1000km급 중장거리 순항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고 보고했다.
230
2006년 7월 2일 화요일,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서 북한이 미사일에 연료 주입을 시작했고 수일 이내에 발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31
2006년 7월 5일 수요일 새벽(미국 시각으로 2006년 7월 4일),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미국 워싱턴에서 미국의 6자 회담 수석 대표 크리스토퍼 힐과 함께 북한의 미사일 발사 상황을 체크하면서 대응 전략을 논의했다.
232
2006년 8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북한 미사일 실험 이후에도 6자 회담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크기 주고 크게 받자는 빅포빅 접근법을 들고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갔다.
233
2006년 8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미국이 설득되지 않자 중국을 먼저 설득하려고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은 한미간 협의 없이 중국과 북한과 먼저 논의하려고 하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34
2006년 8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미국 외교안보보좌관 스티브 해들리와 NSC 아시아태평양양 담당 빅터 차에게 이대로 가다간 북한이 미사일 실험에 이어 핵 실험까지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데 판을 깨고 있는 건 미국과 북한이라고 비판했다.
235
2006년 9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외교부 장관과 안보보좌관의 2: 2 담판을 통해 북한의 핵실험을 막기 위해 보조를 맞추는 과감한 접근법을 기획했다.
236
2006년 9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북한의 핵실험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강경파인 NSC 아시아태평양 담당 빅터 차의 방해로 미국의 입장을 바꾸지 못했다.
237
2006년 9월 14일 목요일,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한미정상회담에 배석해서 1985년 5월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당시 주한미국대사 리처드 루이스 “딕시” 워커가 대학생들의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이 끝났는데도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자유민주주의에 진전을 이루고자 하는 한국 국민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말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238
2006년 10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북한이 핵실험을 할 경우 탐지하기 위해 24시간 대기하기 시작했다.
239
2006년 10월,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총리 공관에서 국무총리 한명숙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김근태와 함께 PSI 참여를 주장하는 안보실장 송민순 등 강경파와 토론한 끝에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에 부분 참가만 하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240
2006년 10월 9일 월요일 오후 12시 10분,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대전 지질연구원으로부터 지하 핵실험에 의한 인공 지진파를 감지했다고 보고 받았다.
241
2006년 10월 14일, 43세 때, 외교통상부 장관 반기문은 UN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242
2006년 11월 20일, 43세 때, 박선원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으로서 대통령 노무현으로부터 “박 비서관이 이 모든 것들을 기록으로 역사에 남겨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243
2006년 12월 18일 월요일,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중국 베에징에서 열린 제5차 2단계 6자 회담에 참석했지만 풍계리 북핵 실험 이후 북미가 만났다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244
2007년,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대통령 비서실장 문재인과 청와대 외교안보실장 백종천과 국가정보원장 김만복과 함께 매주 목요일마다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안골모임에 참석했다.
245
2007년,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국가정보원 대북 라인인 3차장 서훈과 협력했다.
246
2007년 1월 말,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미국 크리스토퍼 힐과 북한 김계관 사이의 2.13 합의 초안을 미리 확보해서 파악했고 외교부가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을 따돌리기 있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247
2007년 2월 초,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미국 크리스토퍼 힐이 2.13 합의 초안을 보여주려고 하자 거절했다.
248
2007년 2월 8일 수요일, 43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베이징에서 미국 크리스토퍼 힐과 북한 김계관과 BDA 해제를 위한 실무 협상에 들어갔다.
249
2007년 3월 19일 월요일,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제6차 6차 회담 1단계 회의에 참석했다.
250
2007년 7월 25일 수요일, 44세 때, 분당샘물교회 목사 배형규는 탈레반에 의해 살해됐다.
251
2007년 7월 26일 목요일,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청와대 안보실장 백종천과 대통령 노무현의 특사단으로서 아프카니스탄에 파견돼 수도 카불에서 아프카니스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와 분당샘물교회 피납자 구출 협상을 벌였다.
252
2007년 7월 26일 목요일,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청와대 안보실장 백종천과 아프카니스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에게 한국인 인질 구출에 협조해주면 병원과 학교를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실질적 효과는 없었다.
253
2007년 7월 26일 목요일,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아프카니스탄의 국방장관 압둘 라힘 와르닥과 국가안보보좌관 랑긴 다드파르 스판타와 비선 협상을 벌였지만 대부분 돈만 요구할 뿐 실효성이 떨어졌다.
254
2007년 7월 31일 화요일, 44세 때, 분당샘물교회 교인 심성민은 탈레반에 의해 살해됐다.
255
2007년 8월, 44세 때, 특전사령관 준장 전인범은 육해공군의 정보와 군수 병과로 이뤄진 총 5명의 팀을 꾸려서 아프카니스탄으로 급파됐다.
256
2007년 8월, 44세 때, 특전사령관 전인범은 아프가니스탄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전략기획실장을 맡고 있던 미국 육군 대학원 시절 동기인 독일군 유스의 도움으로 아프가니스탄 현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257
2007년 8월, 44세 때, 특전사령관 전인범은 아프가니스탄 현지 상황을 파악할 결과 한국군의 인질구출작전이 필요할 수 있다고 한국에 보고했고 그에 따라 707 특임대가 격리지역활동에 들어갔다.
258
2007년 8월, 44세 때, 특전사령관 전인범은 한국에서 아프카니스탄으로 급파된 707 특임대에 대한 작전통제를 시작했다.
259
2007년 8월, 44세 때, 특전사령관 전인범은 나토를 중심으로 한 아프가니스탄 다국적 평화유지군으로부터 SCIF 출입허가와 위성사진 등 전방위 지원을 받았다.
260
2007년 8월, 44세 때, 특전사령관 전인범은 억류된 인질 23명 중 생존한 21명이 7군데 이상의 가옥에 분산돼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261
2007년 8월, 44세 때, 특전사령관 전인범은 한국군 특수부대를 중심으로 독일군과 터키군 특수부대 1000여 명으로 이뤄진 인질구출부대를 구성하고 작전을 지휘했다.
262
2007년 8월, 44세 때, 특전사령관 전인범은 인질구출작전을 위한 진입을 할 때 한국군이 한국인 인질들에게 한국어로 엎드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실패 확률이 크기 때문에 책임도 한국군이 져야 한다는 논리로 지휘권을 확보했다.
263
2007년 8월, 44세 때, 특전사령관 전인범은 야간에 인질 이송으로 의심되는 차량 7대를 발견하고 명령 계통에 따라 서울로 보고했지만 지령이 늦어지자 자제 판단으로 덮쳤고 결국 인질이 아니라 통나무였다.
264
2007년 8월,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국정원 대테러요원 신동일과 헬기를 타고 탈레반이 있는 가즈니로 가려고 했지만 백악관이 나쁜 선례가 생길 수 있다며 작전을 반대해서 최종 무산됐다.
265
2007년 8월,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탈레반 납치범들과 만나러 가즈니로 가려던 헬기를 돌려서 돌아왔고 박선원은 당시 국정원 대테러요원 신동일의 아쉬워하는 표정을 봤다.
266
2007년 8월 1일 44세 때, 수요일, 고 분당샘물교회 목사 배형규의 시신이 인도됐다.
267
2007년 8월 3일 44세 때, 금요일, 고 분당샘물교회 교인 심성민의 시신이 인도됐다.
268
2007년 8월 10일 금요일,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국정원 대테러 요원 신동일과 함께 아프카니스탄 가즈니의 적신월사 사무실에서 탈레반과 분당샘물교회 피납자들에 대한 첫 대면 협상을 벌였다.
269
2007년 8월 11일 토요일 낮 12시 정오,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청와대 안보실장 백종천과 서울에서 분당샘물교회 피납자 가족들과 면담했다.
270
2007년 9월,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미국측이 제시한 사진 증거를 통해 6자 회담에도 나온 적이 있는 북한 핵기술자가 시리아 핵시설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271
2007년 9월,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북한이 시리아와 같은 핵기술을 수출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미국이 또 다시 협상에서 제재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봤다.
272
2007년 9월,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미국이 협상에서 제재로 방향을 바꾸지 못한 건 협상파인 곤돌라자 라이스와 크리스토퍼 힐의 역할과 대통령 노무현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이 변수가 됐다고 분석했다.
273
2007년 09월 00일, 44세 때, 박선원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으로서 북한 외무성 부상 김계관으로부터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이 양보하고 있다는 입장을 들었다.
274
2008년, 45세 때, 박선원은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국부무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리차드 롤리스를 만났다.
275
2008년, 45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미국 국무부 차관보 리차드 롤리스로부터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이후부터 전세계 미군의 재배치하는 계획을 세웠고 주한미군 감축도 그 연장선상이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 전후에는 외교전술적으로 일부러 한국측에 그 사실을 숨겼다는 뒷설명을 들었다.
276
2008년 1월 말,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선임비서관 회의에서 차기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 노무현의 외교안보정책과 조직을 모두 폐기하려고 한다고 보고했다.
277
2008년 1월 말,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대통령 노무현에게 “우리는 진보정권으로서 하나의 틀을 만들어 놓은 거고 그들은 다 무시하고 새롭게 뭔가 해보겠다는 것이니 우리가 테제를 쓰고 다음 정권이 안티테제로 나오면 역사 속에서 새로운 정반합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78
2008년 1월, 44세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브루킹스 연구소의 초빙연구원에 지원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279
2008년 3월, 45세 때,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박선원은 연세대학교에서 국제 협상론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280
2008년 3월, 45세 때, 연세대학교 국제협상론 교수 박선원은 20대 대학생들이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며 보수화됐다고 느꼈다.
281
2008년 8월, 45세 때, 연세대학교 국제협상론 교수 박선원은 브루킹스 연구소의 초청으로 초빙연구원으로 가족 모두와 함께 떠나기로 결정했다.
282
2008년 8월, 45세 때, 박선원은 아내와 아들 둘과 전 대통령 노무현을 만나기 위해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283
2008년 10월, 45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 10.4 남북공동성명 1주년 기념행사에서 전 대통령 노무현과 잠깐 만나서 인사를 했고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284
2008년 10월, 45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2008년 10월 4일 열릴 10.4 남북공동성명 1주년 기념행사를 위한 전 대통령 노무현의 연설문 초안을 작성했다.
285
2008년 10월 4일 토요일, 45세 때, 노무현 정부 주중대사로 이명박 정부 통일부 장관인 김하중은 10.4 남북공동성명 1주년 기념행사에 불참했다.
286
2009년 겨울, 46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봉하마을에서 전 대통령 노무현의 미망인 권양숙을 만났다.
287
2009년 1월, 45세 때,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브루킹스 연구소 출신 수전 라이스를 주유엔대표부 대사에 임명했다.
288
2009년 1월, 45세 때,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브루킹스 연구소 출신 제프리 베이더를 백악관 아시아 담당 보좌관에 임명했다.
289
2009년 4월, 46세 때, 박선원은 브루킹스 연구소 보고서를 통해 북한을 비판했다는 사실이 조선일보를 의해 알려지면서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외교 안보 라인 선배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290
2009년 4월 5일 일요일 새벽 4시 30분, 46세 때,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체코 프라하 방문 중에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대포동 2호 로켓 발사 소식을 보고 받았고 1시간 만에 “지금이야말로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내놓아야 하는 시점”이라는 강경 대북 성명을 발표하면서 유엔 안보리를 소집했다.
291
2009년 4월 6일 월요일, 46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Pyongyang Fails Again: North Korea’s Third Missile Launch and Kim Jong-il’s Miscalculation”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On April, 5, 2009, despite the international community’s repeated warnings and attempts to persuade it to do otherwise, North Korea chose the path of a rogue state and launched a long rangd ballistic missile. Contrary to Pyongyang’s calculations, this incident dose not demonstrate North Korea’s strength or self-reliance, but should be perceived as an utter failure by North Korea in both tactics and strategy”라고 썼다.
292
2009년 8월, 46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전 대통령 노무현과 김대중이 차례로 서거하자 미국 워싱턴 외교가에서 한국에 진보정권이 수립될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는 분위기를 파악했다.
293
2009년 8월, 46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워싱턴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이 이명박 정권을 쉬운 정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294
2009년 10월, 46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한국에 새로운 진보 정권이 재집권하기 위해서는 노무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이 나서야 한다는 보고서를 영어로 썼다.
295
2010년,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재인에게 영어로 쓴 문재인 집권 플랜 보고서를 들이밀면서 출마를 권했다.
296
2010년 3월,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1970년대 중반 한국 해군이 백령도 앞바다에 설치했다가 이후에 미쳐 제거하지 못한 MK-6 폭뢰 중 하나가 천안함 침몰의 원인일 수 있다고 의심했다.
297
2010년 3월 26일 금요일,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해서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실종됐다는 뉴스 보도를 접했다.
298
2010년 3월 29일 47세 때, 월요일, 미국 국무부 차관보 필립 크롤리는 정례브리핑에서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서 “선체 자체 이외의 다른 원인을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299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47세 때, 미국 국무부 부장관 제임스 스타인버그는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면서 “천안함 사고에 그 어떤 나라도 개입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 북한이 침몰의 원인이라고 믿거나 우려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300
2010년 4월, 47세 때,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미국 해군 준장 토마스 에클리스를 단장으로 하는 전문가 8명을 천안함 침몰 원인 조사를 위해 한국에 파견했다.
301
2010년 4월 1일 목요일, 47세 때,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 이재명에게 전화해서 20분 동안 통화하면서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에 미국이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302
2010년 4월 22일 목요일,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전화 연결로 출연해서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서 “미국 측이 선체의 결함 이외에 다른 침몰 원인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는 어뢰 피습이라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거기에 맞는 물증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303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서 “천안함이 지나치게 해안 가까이 접근하는 과정에서 스크루가 그물을 감고 그 그물이 철근이 들어있는 통바를 끌어당기면서 과거 우리 측이 연화리 앞바다에 깔아놓은 기뢰를 격발시킨 게 아닌가 생각한다. 기뢰냐, 어뢰냐, 이런 게 있지만 여전히 저는 배가 좌초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존자나 희생자들의 상태나 이런 것을 보면 좌초일 가능성도 우리가 배제할 수 없다. 안보태세 상으로 봐도 우리가 북한에게 당했다기보다는 우리의 사고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304
2010년 5월 6일,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서 국방부 장관 김태영으로부터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고소당했다.
305
2010년 8월,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북한이 발간한 천안호 침몰 사건의 진상 책자에서 “미국 싱크탱크 부르킹스 연구소 연구원의 발언”으로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의해 폭침 당했다는 한국 당국의 발표 내용을 부정하는 근거로 인용됐다.
306
2010년 10월 5일 화요일,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서울중앙지검 공안 1부 부장검사 이진한의 의해 천안함 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에 대해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다.
307
2010년 10월 5일 47세 때, 화요일,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 부장검사 이진한은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서 "박 전 비서관의 발언 당시는 정부 조사결과가 발표되지 않았고 북한의 소행임을 단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 라디오 전화 인터뷰에서 사회자의 질문에 소극적·수동적으로 답변하고 해당 발언이 1회에 그친 점 등도 고려했다”고 밝혔다.
308
2010년 10월 10일 일요일,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존스홉킨스 대학교 교수 서재정과 버지니아 대학교 교수 이승헌과 함께 워싱턴DC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천안함의 침몰 원인은 어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뢰에 의한 비접촉 폭발 탓이라고 주장했다.
309
2010년 10월 10일 일요일,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천안함 민관합동조사단의 보고서에는 11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천안함 절단 원인은 어뢰의 폭발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310
2010년 12월 초,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브루킹스 연구소 소장 스트로브 탤벗과 존 앨런과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대권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던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재인과 눈에 덜 띄는 양산 통도사에서 만났다.
311
2010년 12월 초, 47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박선원은 문재인과 브루킹스 연구소 소장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사전 답변지를 준비했고 통역을 했다.
312
2011년, 48세 때, 박선원은 노무현재단 전남지역위원회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313
2012년 1월 20일 금요일, 48세 때, 박선원은 인천시장 송영길에 의해 인천광역시 국제협력 투자 유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됐다.
314
2012년 2월 22일 수요일, 48세 때, 인천광역시 국제협력 투자 유치 특별보좌관 박선원은 유엔 녹색기후기금 후보도시로 인천이 지명되는데 실무 역할을 했다.
315
2012년 3월, 49세 때, 박선원은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배기운 국회의원 후보의 상임선대위원장으로 뛰었다.
316
2012년 3월 12일 월요일, 49세 때, 박선원은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317
2012년 3월 14일 수요일, 49세 때, 박선원은 나주 화순 선거구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84표 차이로 배기운 예비후보에게 졌다.
318
2012년 4월 11일 수요일, 49세 때,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후보 배기운은 나무 화순 선거구에서 52.7%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319
2012년 9월 16일 일요일, 49세 때, 박선원은 워싱턴D.C에서 열린 유엔 녹색기후기금 유치국 평가위원회에서 유엔사무총장 반기문과 연결하고 미중의 지지를 얻어서 인천이 유엔 녹색기후기금의 임시 사무국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독일 베를린을 이기고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320
2012년 10월 20일 토요일, 49세 때, 인천광역시 국제협력 투자 유치 특별보좌관 박선원은 유엔 녹색기후기금 2차 이사회에서 인천 송도 유치가 확정되는데 기여했다.
321
2012년 11월, 49세 때, 박선원은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남 나주시화순군 지역구 국회의원 예비후보로 출마를 준비했다.
322
2017년, 54세 때, 박선원은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선대위 안보상황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323
2017년, 54세 때, 문재인 선대위 안보상황단 부단장 박선원은 단장 서훈과 문재인 정부의 대북 외교 안보 정책의 밑그림을 그렸다.
324
2017년 3월, 54세 때, 박근혜 정부 기무사령관 조현천은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기각될 경우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는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 방안을 수립했다.
325
2017년 3월 10일 금요일, 54세 때, 대통령 박근혜는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 당했다.
326
2017년 12월, 54세 때, 박근혜 정부 기무사령관 조현천은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출국한 뒤 귀국하지 않았다.
327
2018년 1월, 54세 때, 박선원은 상하이 외교가에서 대통령 문재인과 가까운 실세 총영사로 인식됐다.
328
2018년 1월 10일 수요일, 54세 때, 박선원은 주 상하이 대한민국 영사관 총영사로 임명됐다.
329
2018년 7월, 55세 때, 상하이 총영사 박선원은 6개월 만에 상하이 외교정보라인을 업그레이드했다.
330
2018년 7월, 55세 때, 박선원은 문재인 선대위에서 안보상황단 단장과 부단장으로 호흡을 맞췄던 서훈 국가정보원장 외교안보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됐다.
331
2018년 7월 5일 목요일, 55세 때,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철희는 박근혜 정부 기무사령관 조현천이 수립한 계엄 문건의 일부를 공개했다.
332
2018년 7월 6일 금요일, 55세 때, 군인권센터 센터장 임태훈은 박근혜 정부 기무사령관 조현천이 수립한 계엄 문건을 전부 공개했다.
333
2020년 6월 16일 화요일, 57세 때,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은 개성공단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334
2020년 8월 4일 화요일, 57세 때, 박선원은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으로 임명됐다.
335
2021년 11월 29일 일요일, 58세 때, 박선원은 국가정보원 제1차장으로 임명됐다.
336
2021년 11월 29일 58세 때, 일요일, 대통령 문재인은 임기 5개월 남기고 국가정보원 제1차장을 한미 공조를 중시해온 윤형중 대신 대북 관계에 경험이 많은 박선원으로 교체해서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마지막 포석을 뒀다.
337
2023년 1월, 59세 때, 박선원은 김진표 국회의장 직속 경제외교자문위원회 정부위원으로 임명됐다.
338
2023년 3월, 60세 때, 박선원은 대통령 윤석열의 최측근인 경호처장 김용현의 육사 38기 동기인 전 기무사령관 조현천이 자진 귀국한 것을 보면서 윤석열 정부가 계엄을 준비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을 했다.
339
2023년 7월 31일 월요일, 60세 때, 박선원은 군 비상계엄 전문가인 임기훈이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으로 임명된 것을 보고 비상 계엄 준비를 의심했다.
340
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60세 때, 박선원은 이재명 대표에 의해 더불어민주당 4호 영입 인재로 재입당했다.
341
2024년 3월, 61세 때, 행정안전부 장관 이상민은 국가수사본부장 우종수와 방첩사를 방문해서 방첩사령관 여인형과 만났다.
342
2024년 3월 9일 토요일, 61세 때, 박선원은 22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21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이동주를 상대로 승리해서 부평구 을 선거구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됐다.
343
2024년 3월 12일 화요일, 61세 때, 더불어민주당 부평구 을 국회의원 후보 박선원은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박성현과 인터뷰에서 “미국의 동맹정책은 기본적으로 자국 우선주의, 일방주의이다. 이건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동등하게 협력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 양보한다고 해서 미국이 고맙다며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하나를 주면 하나 더 달라고 하는 게 제국의 본성이며. 그래야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법이다. 일각에는 용미론이라고 미국을 이용하자는 시각도 있다. 저는 미국을 이용할 생각을 아예 말라고 한다. 우리가 협력하는 척하면서 말로 때우고 비용은 안 대는 걸 미국이 눈감아 줄까? 그런 건 없다. 미국은 우리가 협력을 통해 좋은 결과를 얻고자 노력해야 하는 나라이지, 의무 이행을 면제해주는 나라는 아니다. 동맹에서는 냉철한 현실주의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344
2024년 3월 12일 화요일, 61세 때, 더불어민주당 부평구 을 국회의원 후보 박선원은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박성현과 인터뷰에서 “군사공동체인 동맹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각국의 전략적 중대 결정과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자국의 이익 수호와 안전 보장이라고 하는 가장 높은 국가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동맹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미국과 협력하면 되는 것인데, 그걸 잘못하면 국익에 피해가 올 수 있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입지가 있기에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요구가 들어와도 버티고 지키면 국익은 지켜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345
2024년 3월 21일 목요일, 61세 때, 22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부평구 을 후보 박선원은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서 “2012년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돌아와서 다시 점검해봤다. 정부에서 일관되게 유지하는 입장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가 없다. 희생되신 분 뿐 아니라 천안함에서 근무했던 장병들의 일관된 진술로 봐서 정부의 발표가 맞다. 그건 북에 의한 어뢰 공격이다 이렇게 수긍을 했다. 그래서 문재인 캠프에서도 우리는 이 입장을 견지해야 된다라고 했다”고 말했다.
346
2024년 3월 26일 화요일, 61세 때, 22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부평구 을 후보 박선원은 천안함 46용사 유족회장 이성우로부터 천안함 피격 14주기 추모식이 끝난 뒤 천안함 망언 5적 중 하나로 지목됐다.
347
2024년 4월, 61세 때, 국회의원 당선인 박선원은 보좌관으로 국가정보원 대테러국 출신으로 2007년 8월 분당샘물교회 피납사건 당시 함께 일했던 신동일을 기용했다.
348
2024년 4월, 61세 때, 국회의원 당선인 박선원은 보좌관으로 감청부대인 777 부대 출신인 강화수를 기용했다.
349
2024년 4월 10일 수요일, 61세 때, 박선원은 22대 총선에서 득표율 51.26%로 현역 의원인 새로운 미래 홍영표 의원을 누르고 당선됐다.
350
2024년 7월,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대통령 윤석열과 경호처장 김용현이 대통령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긴 것은 전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 과정에서 군이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반성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351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오후 2시 30분 경,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방송 4법 지연을 위해 필리버스터를 시작했다.
352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10시간 4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방송 장악 과정이 박근혜 정부의 계엄 문건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353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방송 4법 지연을 위해 10시간 4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여기에서 보니까 여당이 좌익이다. 뭐 하는 거예요. 이자들이. 이 새끼들이”라고 말했다.
354
2024년 9월 말, 61세 때, 국회 정보위원회 야당간사 박선원은 네팔에서 북한 주민의 탈북 루트를 개척하기 위한 공작관을 경호하던 육군 특수전사령부 707 특임대 부사관 2명이 22년 기록적인 폭우와 산사태에 휩쓸려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355
2024년 9월 2일 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방부 장관 후보 김용현의 인사청문회에서 윤석열 정부의 계엄령 준비 의혹을 주장했다.
356
2024년 9월 2일 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방부 장관 후보 김용현의 인사청문회에서 대통령 경호처장 김용현이 방첩사령관 여인형과 수방사령관 이진우와 특전사령관 곽종근을 서울 한남동 대통령경호처장 공관으로 호출해서 계엄 논의를 했다고 폭로했다.
357
2024년 9월 2일 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방부 장관 후보 김용현에게 대통령 윤석열의 충암고 1년 선배인 김용현이 충암고 선후배를 통해 군 내부에 제2의 하나회를 구축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358
2024년 9월 2일 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방부 장관 후보 김용현에게 “출입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공관 입구에서 경호처 직원의 안내로 불러들여서 무슨 얘기했느냐. 계엄 이야기 안 했느냐. 내란 예비 음모로 비춰질 수 있음을 명심하라”고 말했다.
359
2024년 9월 2일 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김민석은 국방부 장관 후보 김용현에게 "김용현 후보자를 국방장관에 갑자기 임명하려는 것과 윤석열 대통령의 반국가세력 발언은 김건희 여사의 감옥행을 막기 위한 계엄 준비작전이다”라고 말했다.
360
2024년 10월 00일, 61세 때, 박선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야당간사로서 경기도 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진 육군 특수전사령부 707 특임대 부사관 2명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361
2024년 10월,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회의원 김민석과 추미애와 함께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 계엄을 선포할 경우 더불어민주당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행동 메뉴얼을 준비했다.
362
2024년 10월 8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 정보위원회 야당간사 박선원은 국가정보원 1차장 홍장원으로부터 2시간 뒤 북한이 11군단 폭풍군단을 러시아 해군 수송함을 통해 러우 전쟁 전선으로 파병한다는 첩보를 보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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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8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 정보위원회 야당간사 박선원은 국가정보원 1차장 홍장원으로부터 한국 국가정보원이 미국과 나토에 북한군의 러우 전쟁 파병 사실을 먼저 파악하고 알려줬다고 보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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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회의원 김민석과 함께 국방장관 김용현의 탄핵소추안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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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말,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방장관 김용현이 사주한 것으로 보이는 기자들로부터 취재를 빌미로 국방장관 탄핵을 언제 할지 물어보는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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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말,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대통령 윤석열과 국방장관 김용현이 비상 계엄을 선포하면 707 특임대를 동원해서 국회부터 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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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2일 금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정보사령관 문상호로부터 “그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충성”이라는 내용의 갑작스런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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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오전 10시, 61세 때, 국회의원 김민석은 전 수도방위사령관 김도균과 대통령 윤석열을 상대로 비상 계엄에 대해 경고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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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회에서 퇴근하는 길에 경찰버스가 차벽을 만들어서 국회를 포위한 것을 보고 여의도에 시위가 있는지 보좌관에게 확인하면서 비상 사태를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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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군부의 수상한 움직임과 대통령 윤석열의 저녁 특별 담화 첩보를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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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707 특임대가 당일 훈련을 받지 않고 비상 대기에 들어갔다는 제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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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김민석 의원과 의논해서 만일의 계엄령 선포에 대비했고 국회의장 우원식에게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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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김민석은 몸살 기운 때문에 감기 약을 먹고 잠들었고 결국 밤새 벌어진 대통령 윤석열의 비상 계엄 선포와 국회의 비상 계엄 해제 요구 표결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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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오후 8시,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707 특임대가 헬기를 타고 북한 상황에 투입될 것이라는 제보를 받았고 북한 상황에 헬기를 타는 건 앞뒤가 안 맞기 때문에 비상 계엄일 가능성이 있다고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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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오후 9시 30분 경,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대통령 윤석열과 국방장관 김용현이 707 특임대를 헬기에 태워서 출동시킬 것이라는 제보를 받았고 설마 할 것인지에 대해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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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부평에서 국회로 자가용인 제네시스를 직접 몰고 오면서 텔레그램으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에게 상황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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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광주에 계신 홀어머니를 걱정하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리면서 용기를 내면서 국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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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회 인근에서 경찰에 붙잡혀서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제네시스 승용차의 시동을 켜놓고 빠져나간 뒤 국회 본회의장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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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4일 수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정보사령관 문상호에게 “내가 많이 허탈하다”라는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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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5일 목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서 대통령 윤석열의 비상 계엄 선포는 국방부 장관 김용현과 서울중앙지검장 이창수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탄핵소추 시도 때문에 일주일 정도 앞당겨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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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6일 금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4성 장군 출신인 국회의원 김병주와 함께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특전사령관 곽종근을 인터뷰해서 국방장관 김용현이 국회의원을 본회의장에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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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말,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대통령 윤석열과 국방장관 김용현이 비상 계엄을 미국 정권 교체기인 2024년 12월 10일 화요일부터 2024년 12월 15일 일요일 사이에 선포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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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0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회 국방위에서 정보사령관 문상호와 전 정보사령관 노상원이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한 사이이며 비상 계엄을 모의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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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0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정보사령관 문상호와 전 정보사령관 노상원이 2024년 11월 7일 목요일 오후 3시 안산 햄버거집에서 비상 계엄을 모의하면서 부정 선거를 명분으로 국회 의원들을 체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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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30일 목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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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3일 월요일 오후,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김민석과 대화하면서 “트럼프 노벨평화상 추천서 제출과 접수 완료. 미측 통보”라고 쓰인 수첩의 메모를 언론 카메라에 노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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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4일 화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제45대 대통령 재임 중 한반도 평화 증진과 비핵화, 그리고 한미동맹 강화를 통해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20일 미합중국 제4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북한과의 관계 회복을 강조하며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국제적 기대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노벨평화상의 이상과 가치에 충분히 부합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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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1일 금요일, 61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의 4차 청문회에서 국정원 간부 5명의 실명을 공개하면서 이들에게 국정원이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자신을 엮어서 내란 공작을 하려는 긴급 공작 지시가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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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4일 화요일, 62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국무총리 후보자 김민석의 인사청문회에서 마태복음 6장 34절의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를 낭독하면서 “김 후보자는 제가 알기로는 성가대 합창단도 하시고 아주 신실한 기독교 믿음이 있는 분이다. 성경 말씀을 붙잡고 어려운 그 힘든 시간 10여 년, 20여 년을 정말 잘 단단하게 뚫고 오신 것에 대해서 존경을 표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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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4일 목요일, 62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서울고등검찰청 내란 특검 사무실에 출석해서 2024년 11월 말 있었던 몽골 공작 의혹을 중심으로 전 대통령 윤석열의 외환죄에 관해 집중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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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0일 수요일, 62세 때, 국방대학교 총장 임기훈은 윤석열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으로 일하던 시절 채해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서 수사 외합을 행사한 의혹으로 직무가 정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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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8일 목요일 오전 10시, 62세 때, 국회의원 박선원은 서울고검에 있는 내란 특검 사무실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서 전 국정원장 조태용이 전 대통령 윤석열의 비상 계엄 선포 사실을 미리 알고도 지체 없이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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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00세 때, 박선원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목격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신들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민낯을 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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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0월 00일, 45세 때, 박선원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으로서 청와대 안골모임에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분리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박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