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0화LIFE COUNT
1959.01.25~2001.07·1화김연자
김연자
1
1959년 01월 25일, 0세 때, 김연자는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145-21에서 할머니가 한 집에서 두 명이 태어나면 안 된다고 하여 마당에서 출산되었다.
2
1973년, 14세 때, 김연자는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 열흘 정도 공연장을 따라다니느라 학교에 결석했다.
3
1973년, 14세 때, 김연자는 수업 미달로 인해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는 실패를 겪었다.
4
1973년, 14세 때, 김연자는 [학교 생활을 계속하는 것]보다 [서울로 가서 가수가 되는 것]을 제안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홀로 상경했다.
5
1974년, 15세 때, 김연자는 의상을 입고 노래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여 TBC <가요 신인 스타> 출전을 결심했다.
6
1974년, 15세 때, 김연자는 1차 도전에서 패티김의 노래를 불렀으나 이미자와 똑같다는 심사평을 듣고 탈락하는 실패를 겪었다.
7
1974년, 15세 때, 김연자는 [트로트]를 부르면 떨어진다는 광주에서의 경험 때문에 [발라드(패티김 노래)]를 선택하여 재도전했고, PD의 권유로 다시 출전하여 합격했다.
8
1974년 08월 30일, 15세 때, 김연자는 손진석 사장을 통해 민정일과 함께 수록된 데뷔 앨범을 발매하고 곡 <말을 해줘요>를 선보였다.
9
1974년, 15세 때, 김연자는 신곡을 내면서 기존에 하던 공장 일을 그만두었다.
10
1974년 10월 03일, 15세 때, 김연자는 TBC <가요 신인 스타>에서 패티김의 <살짜기 옵서예>를 불러 우승하며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11
1974년, 15세 때, 김연자는 이미자의 창법과 비슷해 개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오히려 이미자로부터 드레스를 선물 받을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12
1974년, 15세 때, 김연자는 우승 후 임하룡, 한무랑의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나 밤무대 행사로 인해 목소리가 상한 탓에 금방 잘리는 실패를 겪었다.
13
1975년, 16세 때, 김연자는 송대관의 <해뜰날> 코러스 녹음에 참여했다. 이는 작곡가와 송대관이 비용 문제로 값싼 김연자를 썼기 때문이었다.
14
1976년, 17세 때, 김연자는 MBC 신인가수 선발대회에 출전했으나 김란영에게 대상을 뺏기고 탈락하는 실패를 경험했다.
15
1976년, 17세 때, 김연자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엄마의 노래 / 나를 보고 있네요>를 발표했다.
16
1976년 12월 03일, 17세 때, 김연자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독집 <봄비가 / 낯선 얼굴들>을 제작했다.
17
1977년, 18세 때, 김연자는 TBC <전국남녀가요신인 콩쿨>에서 우승했다.
18
1977년, 18세 때, 김연자는 일본 토리오레코드사의 오디션에 합격했다.
19
1977년, 18세 때, 김연자는 [일본행을 반대한 아버지]의 뜻보다 [찬성한 어머니]의 의견과 가난을 벗어나려는 본인의 의지를 따라 일본행을 선택했다.
20
1977년 08월, 18세 때, 김연자는 비자가 나오지 않아 10개월을 기다린 끝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21
1977년, 18세 때, 김연자는 일본 초기 정착 과정에서 극심한 향수병으로 매일 울며 어머니에게 전화했고, 이로 인해 전화세가 30만 엔(월급 12만 엔 초과)이 나와 회사에 혼나는 일을 겪었다.
22
1977년, 18세 때, 김연자는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일본어로 리메이크한 《女の一生》을 발표하며 일본에 데뷔했다.
23
1977년, 18세 때, 김연자는 토리오 레코드사가 아사쿠사 공회당에 2만 엔을 지불하여 마련한 첫 무대를 가졌다.
24
1977년, 18세 때, 김연자는 3년 전속 계약을 맺고 월급과 의식주를 제공받았으나, 히트곡이 없어 스케줄이 적은 무명 시기를 보냈다.
25
1977년~1978년, 18~19세 때, 김연자는 1년 만에 일본어와 일본어 글쓰기에 능숙해졌다.
26
1978년, 19세 때, 김연자는 방송 출연 중 재일교포 2세이자 지휘자인 김호식을 처음 만났으며 서로에게 끌림을 느꼈다.
27
1978년, 19세 때, 김연자는 엔카에 트로트 창법을 접목한 독창적인 목소리를 찾아내려 노력했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28
1979년 02월 19일, 20세 때, 김연자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독집 <두 손을 잡아요 / 먼 훗날>을 발표했다.
29
1979년, 20세 때, 김연자는 일본 소속사에서 받은 월급 25만 엔 중 20만 엔을 어머니에게 보냈고, 어머니는 이 돈으로 빚을 갚고 연립주택을 구입했다.
30
1980년, 21세 때, 김연자는 일본 진출 3년 만에 "히트도 못 하고 월급만 나가는 가수"라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 실패를 경험했다.
31
1980년, 21세 때, 김연자는 일본 활동 당시 체중 증가로 인한 카리스마 부족, 일본 풍습(허리 굽혀 인사하기)에 대한 거부감, 밤의 캠페인(술집 음반 판매)에 대한 혐오 등으로 매니저와 갈등을 겪었다.
32
1980년, 21세 때, 김연자는 이성애 선배로부터 "로마에선 로마식으로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자신의 고집을 반성했다.
33
1980년, 21세 때, 김연자는 일본에서 귀국 후 1년간 활동 없이 쉬었으며, 연인 김호식으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34
1980년 11월 10일, 21세 때, 김연자는 앨범 <알잖아요 내 마음 / 둘이서>를 발표했다.
35
1980년, 21세 때, 김연자는 작곡가 김영광의 제안으로 생소했던 '메들리' 방식의 노래를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36
1980년 12월 20일(또는 1981년 05월 08일), 21~22세 때, 김연자는 힛트 레코드에서 트로트 메들리 앨범 <노래 꽃다발 1집>을 제작 발매했다.
37
1981년 03월 13일, 22세 때, 김연자는 <노래 꽃다발 3집>을 발매하여 약 360만 장(추산)의 판매고를 올리며 한국에 메들리 열풍을 일으켰다.
38
1981년, 22세 때, 김연자는 <힛트레코드 어디쯤 가고 있을까 / 서울행 완행열차>를 발표했다.
39
1981년 08월 31일~09월 01일, 22세 때, 김연자는 <노래 실은 관광열차 제1집>을 발표했다.
40
1982년 04월, 23세 때, 김연자는 18세 연상의 재일교포 2세 김호식과 결혼했다.
41
1982년 04월, 23세 때, 김연자는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매번 새로 받아야 하는 [비자 문제 해결]이라는 실리를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
42
1982년, 23세 때, 김연자는 결혼 비자가 나오기까지 6개월을 기다리는 동안 음반 제작자 유수태 대표를 만나 취입한 음반이 대박이 나는 경험을 했다.
43
1982년 06월, 23세 때, 김연자는 일본 NHK 생방송에 출연했다.
44
1982년 07월 09일, 23세 때, 김연자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갈길을 못가네 / 남의 속도 모르고>를 발매했다.
45
1982년, 23세 때, 김연자는 <노래 꽃다발 3집>의 성공으로 지구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으며 한국 음악사상 최초로 계약금 1억 원을 받았다.
46
1982년 08월 15일, 23세 때, 김연자는 <노래 올림픽 제1집>과 <제2집>을 제작했다.
47
1982년 08월 25일, 23세 때, 김연자는 <노래 올림픽 제3집>을 제작했으며, 이 시기 1~3집의 백여 곡을 하루 만에 녹음했다.
48
1982년 09월 20일, 23세 때, 김연자는 지구레코드에서 <신곡 1집>을 제작하고, 정통 트로트 <진정인가요>로 첫 히트를 기록했다.
49
1983년 06월 25일, 24세 때, 김연자는 <2집 망각>을 발표하고 <그런거야>라는 곡을 히트시켰다.
50
1983년, 24세 때, 김연자는 MBC 10대 가수 상을 수상했다.
51
1984년경, 25세 때, 김연자는 지구레코드 계약금을 활용해 어머니에게 50평 집을 선물했다.
52
1984년 09월 15일, 25세 때, 김연자는 3집 <타인의 얼굴 / 가면의 사랑>을 발매했고, 수록곡 <수은등>이 대히트를 쳤다.
53
1984년 10월 19일, 25세 때, 김연자는 조용필에 이어 한국인 두 번째로 NHK홀 리사이트를 개최하고 라이브 레코드를 한일 동시 발매했다.
54
1984년, 25세 때, 김연자는 MBC 10대 가수 상을 수상했다.
55
1985년 07월 15일, 26세 때, 김연자는 4집 <당신은>을 제작했다.
56
1986년 05월 20일, 27세 때, 김연자는 4집에 2곡을 추가한 <4.5집>을 재발매했다.
57
1986년, 27세 때, 김연자는 4.5집에 수록된 <천하장사> 앨범에 당시 무명이었던 강호동의 사진이 실리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58
1986년 봄, 27세 때, 김연자는 길옥윤이 작곡한 <아침의 나라에서>를 노래하여 시청자 투표 결과 1986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주제가로 선정되었다.
59
1986년, 27세 때, 김연자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서 공식 주제가 <아침의 나라에서>를 합창했다.
60
1988년 06월 21일, 29세 때, 김연자는 올림픽 주제가가 <손에 손 잡고>로 교체되었다는 발표를 듣고 주제가 자격을 상실하여 크게 상심했다.
61
1988년, 29세 때, 김연자는 <아침의 나라에서>가 올림픽 주제가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일본 재진출을 결심했다.
62
1988년 05월, 29세 때, 김연자는 VAP 레코드사를 통해 <아침의 나라에서>의 일본어 버전(朝の国から)을 발매했다.
63
1988년 05월 25일, 29세 때, 김연자는 도쿄에서 열린 "우리는 하나" 88 서울 올림픽 공식 가요 발표회에 참석했다.
64
1988년, 29세 때, 김연자는 88 올림픽 폐막식 주 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관중 앞에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다.
65
1988년 10월 03일, 29세 때, 김연자는 88체육관에서 열린 '88 영광 서울 코리아' 행사에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다.
66
1988년, 29세 때, 김연자는 남편 김호식을 일본 내 기획사 대표로 세워 모든 스케줄과 수입 관리를 맡겼다.
67
1984년 10월 19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조용필에 이어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일본 NHK홀에서 리사이트를 개최하고 라이브 레코드를 한일 동시 발매했다.
68
1984년,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MBC 10대 가수 상을 수상했다.
69
1985년 07월 15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4집 <당신은>을 제작했다.
70
1986년 05월 20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전년도 4집에 2곡(<아침의 나라에서>, <천하장사>)을 추가하여 4.5집을 재발매했다.
71
1986년 봄,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길옥윤이 작곡한 <아침의 나라에서>로 시청자 투표를 거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가에 선정되었다.
72
1986년,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 후반부에서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뒤에 <아침의 나라에서>를 합창하며 공식 주제가로 사용하게 했다.
73
1988년 05월,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요시오카 오사무가 작사하고 1절은 한국어, 2절은 일본어로 취입한 <朝の国から(아침의 나라에서)> 싱글을 일본 VAP 레코드사에서 발매했다.
74
1988년 05월 25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도쿄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88 서울 올림픽 공식 가요 발표회를 가졌다.
75
1988년 06월, [나이불명] 때, 서울 올림픽 주제가가 <손에 손 잡고>로 교체되면서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는 주제가 자격을 상실했다.
76
1988년 06월 21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갑작스러운 올림픽 주제가 변경 발표로 인해 주제가 자격을 상실하고 크게 상심했다.
77
1988년 09월,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88올림픽 폐막식 당시 주 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관중 앞에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으나, 이는 공식 기록이나 KBS 중계 영상에는 남지 않았다.
78
1988년 10월 03일(추정),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88체육관(KBS아레나)에서 열린 '88 영광 서울 코리아' 행사에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다.
79
1989년,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으며, 이는 당시 HD 하이비전으로 방영되었다.
80
1989년 06월,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앙콜 공연을 진행했다.
81
1989년 10월 05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미야코 하루미가 프로듀스한 신곡 <암야항로>를 발매했다.
82
1990년,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엔카 가수 최초로 일본 산토리홀에서 공연했다.
83
1990년 08월 15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소련 사할린에서 동포 1만 명을 대상으로 야외 자선공연 <눈물의 아리랑>을 개최하고 사할린 거주 노인 10명을 한국에 초대했다.
84
1992년 09월 15일~25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3회째 브라질 공연을 진행했다.
85
1992년 09월,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한국인 최초로 사회 공헌자에게 수여하는 상파울로시 의회의 ‘안셰타장’을 수상하고, 시내에 ‘김연자 거리’를 창설하는 명예를 얻었다.
86
1994년,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흐르는 강물처럼>을 노래했다.
87
1995년 10월 27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싱글 <눈물의 사슬>을 발매하여 엔카 부문 테이프 및 CD 판매량 1위를 기록하며 한국인 최초로 일본 가요계를 평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88
1997년 02월 23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쿠바 아바나 국립극장에서 쿠바국립교향악단과 협연하며 한국인 최초로 쿠바 공연을 성사시켰다.
89
1997년 02월 23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클래식 위주의 아바나 국립극장에서 한국인 최초로 팝송, 스페인계 노래,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다.
90
2001년,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북한 공연을 준비하며 배운 <림진강>으로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91
2001년 07월,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1988년부터 매년 한두 차례씩 진행해 온 일본 내 교도소 위문 공연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법무성 대상을 수상했다.
92
2001년 04월,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악단 포함 30여 명과 함께 <제19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참가차 북한을 방문했다.
93
2001년 04월 07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평양 청년중앙회관(또는 청년문화회관)에서 2,000명 수용 규모의 첫 콘서트를 개최했다.
94
2001년 04월 09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평양 국제영화제회관 콘서트홀에서 2,500명 수용 규모의 콘서트를 개최했다(단, 문헌에 따라 여부는 불분명).
95
2001년 04월 09일 밤 12시,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북한 간부들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따라 짐을 챙겨 김정일 전용 열차를 타고 함흥으로 이동했다.
96
2001년 04월 10일 오전 08시 30분경,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함흥에 도착하여 해변가 집 앞에서 김정일을 대면했고, 김정일로부터 20년 동안 좋아했던 가수를 만나 기쁘다는 환대를 받았다.
97
2001년 04월 11일 오후 3시,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함경남도 함흥의 한 군부대 접견실에서 김정일을 만났다.
98
2001년 04월 11일 오후 5시,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함흥 대회의장의 임시 무대에서 당 간부 500명과 김정일 앞에서 90분간 자유분방한 형식의 공연을 했다.
99
2001년 04월 11일,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환갑인 김정일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100
2001년 04월 11일 저녁 7시, [나이불명] 때, 김연자는 김정일의 오른쪽에 앉아 2시간 동안 함께 저녁 식사를 했으며, 김정일로부터 음식을 하나하나 놓아주는 배려를 받았다.

김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