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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26.09.02·3화

이명박

이명박 : 2026년 10월 5일 업데이트

이명박 : 2026년 10월 5일 업데이트(2)

이재명 칭찬, 윤석열 비판

2026.03.26~2026.04.12·1화

이명박 : 13년 만의 인터뷰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0~2026.09.02·1화

이명박 : 노무현 죽음의 MB적 진실

이명박 : 2026년 10월 5일 업데이트(2)

1
1941년 12월 19일, 0세 때, 이명박은 흥해 덕실마을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이충우와 대구 반야월 출신 어머니 채태원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오사카시 히라노구의 조선인 빈민촌에서 태어났다.
2
1941년 12월 19일, 0세 때, 이명박은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뒤 형제들의 돌림자 '상(相)' 대신 '명박(明博)'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족보에는 돌림자에 맞춘 이상정(李相定)으로 올랐다.
3
1945년 11월 00일, 3세 때, 이명박은 광복 후 시모노세키항에서 정원을 훨씬 넘긴 목조 귀국선에 가족과 함께 올랐다가 대마도 앞바다에서 배가 좌초해 가라앉는 사고를 겪었고, 가족은 모두 살아남았으나 일본에서 10여 년간 모은 재산을 모두 잃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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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3~5세 때, 이명박은 귀국 후 아버지가 목축 기술을 살려 포항 동지상고 이사장 소유의 목장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포항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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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00월 00일, 5세 때, 이명박은 가족과 함께 포항읍내로 옮겨 살았고, 이 시기 아버지는 목장 일을, 어머니는 과일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6
1950년 06월 25일, 8세 때, 이명박은 6·25 전쟁이 터져 인민군이 점령한 흥해 큰집으로 피난했고, 이 무렵 둘째 누나 귀애와 막내 동생 상필이 미군 전투기 오폭으로 화상을 입어 두 달여 만에 숨지는 일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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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07월 18일, 8세 때, 이명박은 영일만에 상륙한 미군이 흥해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는 동안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마른 개울 고랑에 겹쳐 엎드린 채 총탄 속에서 밤을 버텼다.
8
0000년 00월 00일, 8~15세 때, 이명박은 전쟁 뒤 포항 덕산동 산기슭 절간의 방 한 칸을 다섯 세대 15명이 나눠 쓰는 처지에서 술지게미로 허기를 달랬고, 영양실조로 넉 달간 앓아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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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8~15세 때, 이명박은 서울대 상대에 들어간 작은형의 학비를 대려고 성냥과 김밥, 밀가루떡 등을 팔았고, 부대 철조망 너머 군인들에게 몰래 음식을 팔다 헌병대에 끌려가 매를 맞기도 했다.
10
1957년 00월 00일, 15세 때, 이명박은 포항중학교를 전교 2등으로 마쳤지만 형의 학비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국화빵을 팔던 중,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 여러 차례 어머니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낮에는 일하고 수석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들어갔다.
11
0000년 00월 00일, 15~18세 때, 이명박은 고교 시절 낮에는 거리에서 뻥튀기와 과일을 팔고 밤에 공부하면서 줄곧 전교 1등을 지켜 장학금으로 학비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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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15~18세 때, 이명박은 극장 앞에서 과일 손수레 장사를 하다 후진하던 지프에 수레를 받히고도 오히려 욕설을 듣자 가출을 결심했으나, 주변 상인들이 수레를 다시 세워 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렸고 자신을 위한 어머니의 긴 새벽 기도를 들은 뒤 뜻을 접었다.
13
0000년 00월 00일, 15~18세 때, 이명박은 부모가 작은형 뒷바라지를 위해 상경하면서 중학생 여동생과 단둘이 포항에 남았고, 부족한 생활비로 버티려고 한 달 치 쌀을 봉투 30개에 나눠 하루 한 봉지씩 죽을 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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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15~18세 때, 이명박은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찬송가 반주를 하던 포항의 부잣집 딸을 마음에 두었으나 형편 때문에 끝내 고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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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00월 00일, 18세 때, 이명박은 동지상고를 1등으로 마친 뒤 부모의 부름을 받고 상경해 이태원 빈민촌 벌집의 방 한 칸에서 가족과 지내며 청계천 6가 인력시장을 오가는 일용직 노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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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18~19세 때, 이명박은 대학 중퇴 학력이라도 얻을 생각으로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포항중 동창에게 수험서를 빌리러 갔다가 거절당했으나, 청계천 헌책방 주인에게서 걱정은 합격 뒤에 하라는 질책과 함께 입시 교재를 외상으로 받고 형 이상득의 격려 편지에 힘입어 친구 김창대의 보광동 자취방에서 밤마다 입시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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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03월 00일, 19세 때, 이명박은 시험 사흘 전 앓아누운 몸으로 치른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 입시에 합격했고, 함께 응시해 떨어진 친구 김창대에게서 합격 소식을 들었다.
18
1961년 03월 00일, 19세 때, 이명박은 한 학기 이상 다녀야 학적이 생긴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등록금 마련에 막막해하던 중, 어머니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입학금을 모아 주고 새벽 4시부터 시장 청소 일을 맡겨 주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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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19~22세 때, 이명박은 고려대 입학 후 포항 친구들을 통해 한양대 음대에 다니던 고교 시절의 첫사랑을 수소문해 서울에서 다시 만났으나, 고향 친구 이상의 마음은 없다는 작별 인사를 듣고 마지막 만남으로 끝냈다.
20
1963년 00월 00일, 21세 때, 이명박은 3학년 때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려고 상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나서 물량 공세를 펴던 유력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21
1963년 00월 00일, 21세 때, 이명박은 3학년 여름 잦은 기침과 열병을 치료받을 길이 없자 군 병원 치료를 기대하며 자원입대했으나, 논산훈련소에서 기관지 확장증과 악성 축농증 진단을 받고 불합격 처리돼 돌아왔다.
22
0000년 00월 00일, 21세 때, 이명박은 구청 추천으로 서울시립병원에 무료 환자로 입원했다가 비싼 약을 쓸 수 없다는 의사들의 대화를 듣고 스스로 퇴원했고, 이후 명동성모병원에서 수녀들의 간호를 받으며 고비를 넘겼다.
23
1964년 00월 00일, 22세 때, 이명박은 박정희 정부가 반대 여론 속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밀어붙이자 시위에 소극적이던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맡아 반대 운동에 나섰다.
24
1964년 06월 03일, 22세 때, 이명박은 6·3 항쟁에 맞서 정부가 계엄을 선포하자 시위 주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돼 수배됐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25
0000년 00월 00일, 22세 때, 이명박은 경찰의 추적이 좁혀오자 자수해 5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강력범들과 한 방에서 지냈다.
26
1964년 09월 00일, 22세 때, 이명박은 수감 중 단 한 번 면회 온 어머니에게서 성경과 기도, 공부를 하고 있는지만 질문받은 뒤 어머니가 바로 자리를 떴고, 나중에 어머니가 문밖에서 주저앉아 울었다는 이야기를 교도관에게서 들은 뒤 수감 기간 내내 책을 놓지 않았다.
27
0000년 00월 00일, 22세 때, 이명박은 대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뒤 복학해, 학교가 시위 학생들을 시험 없이 졸업시키려 하자 정당하게 학점을 받겠다며 교수 연구실에서 따로 시험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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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15일, 22세 때, 이명박은 졸업을 두 달여 앞두고 어머니 채태원이 병석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일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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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02월 00일, 23세 때, 이명박은 고려대를 졸업한 뒤 대기업 두 곳의 필기시험에 붙고도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면접에서 잇따라 떨어졌다.
30
0000년 00월 00일, 23세 때, 이명박은 직원 100명 남짓이던 현대건설의 대졸 공채에 지원해 필기를 통과했고, 면접에서 정주영 사장에게 건설을 '창조'라고 답해 사실상 합격 언질을 받았으나 며칠 뒤 함께 일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31
0000년 00월 00일, 23세 때, 이명박은 청와대 이낙선 비서관에게서 유학을 보내 주겠다는 회유를 받았으나 제 힘으로 일하겠다며 거절했고, 이어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젊은이의 자립을 나라가 막으면 그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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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23세 때, 이명박은 이낙선이 식사 자리에서 편지 이야기를 꺼내자 박정희 대통령이 차라리 그 회사에 취직시켜 관리하라고 했다는 뒷이야기를 훗날 동석 보좌진에게서 들었고, 그 직후 현대건설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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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05월 00일, 23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경리과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34
0000년 00월 00일, 23~29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이 입사 조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자신의 동태 보고서를 매주 제출했고 이 보고가 이사 승진 무렵에야 중단됐다는 사실을, 보고서를 작성한 전무에게서 그의 퇴직 무렵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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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23~26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의 첫 해외 수주 공사인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현장에서 3년 가까이 일하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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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03월 00일, 26세 때, 이명박은 태국에서 귀국한 뒤 대졸 직원들이 기피하던 서빙고동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발령받았고, 최신 장비 경험이 있는 자신을 경부고속도로 장비 관리의 적임자로 본 정주영 사장의 의도였음을 나중에 알게 됐다.
37
0000년 00월 00일, 26~28세 때, 이명박은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에 투입될 중장비의 정비와 공급을 책임졌다.
38
0000년 00월 00일, 26세 때, 이명박은 부품을 깎아 고치던 관행 대신 고장 부품을 바로 갈아 끼우는 방식을 도입하려고 대기 중이던 새 불도저 한 대를 볼트까지 분해해 부품 번호를 대조하게 했고, 정비반장의 고발로 달려온 정주영 사장을 설득해 이 방식을 정착시켰으며, 이 일로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39
0000년 00월 00일, 26~27세 때, 이명박은 이웃 공영사 레미콘 공장의 시멘트 분진이 정비 장비를 망가뜨리자 불도저로 그 공장의 유일한 출입로를 파헤쳤고,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의 위협에도 물러서지 않은 채 정주영 사장을 설득해 공영사로부터 창문 폐쇄 약속을 받아낸 뒤 길을 복구했다.
40
1969년 00월 00일, 27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부장으로 승진했다.
41
0000년 00월 00일, 27~29세 때, 이명박은 중기공장 부장으로 있으면서 직원들의 화투판을 다잡으려고 출근 시각을 오전 7시에서 6시로 당기고 맨손체조와 구보로 일과를 시작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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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년 00월 00일, 23~28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이 소개해 준 회사 여직원과 만나며 정주영에게서 그녀에게 줄 진주 목걸이까지 받았으나, 결혼하지 않은 형과 바쁜 업무를 이유로 깊은 인연으로 이어가지 않았다.
43
1970년 00월 00일, 28세 때, 이명박은 중매 제안이 쏟아지던 가운데 고교 시절 영어 선생님의 소개로 청렴한 공직자 집안의 딸 김윤옥을 만났다.
44
1970년 07월 07일, 28세 때, 이명박은 자신이 장비 정비를 맡았던 경부고속도로가 대전-대구 구간 개통으로 완공되는 결과를 맞았다.
45
1970년 12월 19일, 29세 때, 이명박은 결혼을 결심한 뒤 밤늦게 김윤옥과 퇴계원 교회 묘지에 임시로 모신 어머니 묘를 찾아 막내며느리 될 사람을 데려왔다고 고했고, 세례를 받은 김윤옥과 자신의 생일에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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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00월 00일, 29세 때, 이명박은 입사 5년 만에 현대건설 이사로 승진해 기사 딸린 승용차를 배정받았다.
47
0000년 00월 00일, 29세 때, 이명박은 이사 승진 뒤 현대건설 조선사업부로 발령받아 울산 미포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는 현장에 내려갔다.
48
0000년 00월 00일, 29~30세 때, 이명박은 조선소 투자로 자금난에 빠진 현대건설 본사로 불려 올라가 자금 업무를 맡았고, 돈이 떨어질 때마다 명동 사채시장을 돌며 자금을 구했다.
49
1972년 00월 00일, 30세 때, 이명박은 상무로 있던 중 중기사업소 관리부장 시절 지은 트럭 조립용 차고 7개 동이 무허가였다는 혐의로 검찰 소환장을 받았고, 정주영 회장이 보낸 링컨 콘티넨털을 타고 몇 달간 몸을 피했다.
50
1972년 06월 19일, 30세 때, 이명박은 본사 연락을 받고 검찰에 출석해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고, 이후 자동차사업부 책임자들이 나서면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51
1972년 08월 03일, 30세 때, 이명박은 박정희 대통령의 8·3 사채동결 조치로 고리 사채에 짓눌리던 현대건설의 자금 위기가 풀리는 상황을 맞았다.
52
1973년 00월 00일, 31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전무로 올라섰다.
53
1974년 00월 00일, 32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부사장에 올랐다.
54
1974년 00월 00일, 32세 때, 이명박은 오일쇼크로 건설업계가 흔들리자 정주영 회장과 함께 오일달러가 몰린 중동 진출을 택했고, 현대건설은 800만 달러 규모의 이란 반다르 아바스 조선소 훈련원 공사를 따내 첫 교두보를 마련했다.
55
1975년 00월 00일, 33세 때, 이명박은 1억5000만 달러 규모의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 입찰을 두고 정인영 해외담당 사장이 극력 반대하는 자리에서 정주영의 질문을 받자, 중동이 낯선 것은 서구 경쟁사도 마찬가지이고 울산 조선소 경험이 있다며 진출에 찬성했다.
56
0000년 00월 00일, 33세 때, 이명박은 정인영이 입찰을 강행하면 현대를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상황을 맞았고, 정주영은 입찰을 밀어붙여 서구 업체들을 제치고 수주했다.
57
1975년 10월 00일, 33세 때, 이명박은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 착공을 맞았다.
58
1976년 00월 00일, 34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이 다른 업체 최저가의 절반인 10억 달러로 당시 단일 토목공사 세계 최대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고 선수금 3억 달러를 받는 결과를 함께 이끌었다.
59
0000년 00월 00일, 34~37세 때, 이명박은 주베일 공사의 철골 구조물을 울산에서 만들어 바지선으로 실어 나르며 수천만 달러의 보험 대신 밀봉 뚜껑을 다는 정주영의 방식을 지켜봤고, 태풍에 가라앉았던 구조물들이 대만 해안으로 떠밀려온 것을 경비행기에서 확인한 뒤 대부분 회수했다.
60
1976년 00월 00일, 34세 때, 이명박은 정인영 사장과 그를 따르는 인사들이 현대건설을 떠나고 외부 영입 사장 조성근도 물러나면서 경영진 공백이 생기는 상황을 맞았다.
61
1977년 01월 00일, 35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 회장의 사장 제의에 선배 이춘림 부사장을 추천했으나 거듭된 요청에 공동대표를 조건으로 받아들여, 정초 이사회에서 입사 12년 만에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고 이춘림이 중동 주재로 나가면서 회사 관리·운영을 맡았다.
62
0000년 00월 00일, 35세 때, 이명박은 파격 인사를 두고 정주영의 약점을 쥐었다거나 박정희의 숨은 친척이라는 헛소문을 들었고,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 공사 당시 정주영에게 자신이 반골이라 노조를 만들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63
1977년 10월 00일, 35세 때, 이명박은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를 공기보다 앞당겨 완공했다.
64
0000년 00월 00일, 35~46세 때, 이명박은 사장 재임 중 이라크 공사 수주에 힘을 쏟았으나, 중동 전쟁으로 쌓인 공사 대금 가운데 이라크 정부에 물린 미수금 2억 달러를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65
0000년 00월 00일, 35~46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사장으로서 울산에 세울 현대그룹 부속병원 운영을 맡아 달라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요청했고, 병원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가 운영을 맡았다.
66
1979년 03월 11일, 37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이 지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개통식을 맞았다.
67
1979년 10월 00일, 37세 때, 이명박은 청와대 경호실 호출로 세종문화회관에 갔다가 6·3 시위 주동자 자격으로 부마사태 학생들을 깎아내리는 원고를 받았고,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는 답을 들은 채 청와대에 들어갔다.
68
0000년 00월 00일, 37세 때, 이명박은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자신의 바로 앞 순서였던 새마을 지도자가 원고를 잊어 말을 잇지 못하자 박정희가 그만하자며 자리를 뜨면서 원고를 읽지 않게 됐다.
69
1979년 10월 26일, 37세 때, 이명박은 며칠 전 만났던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숨지는 상황을 맞았다.
70
1980년 00월 00일, 38세 때, 이명박은 신군부가 현대자동차를 대우자동차에 넘기는 통폐합 서류에 날인하라고 요구하자 정주영 회장에게서 인감도장을 넘겨받아 국보위 취조실에 들어갔고, 이틀 밤낮 통폐합의 부당함을 따지며 버티다 도장을 서류 위에 올려놓고 직접은 못 찍겠으니 당신들이 찍으라고 밀어 상급 장교가 날인을 막는 상황을 만들어 도장을 찍지 않고 돌아왔다.
71
0000년 00월 00일, 38세 때, 이명박은 피눈물로 얼굴이 얼룩진 채 새벽에 정주영 회장에게 돌아와 끝까지 버티자고 건의했고, 이후 GM과 미국 정부의 반대가 겹치면서 자동차 통폐합은 무산됐다.
72
1980년 11월 00일, 38세 때, 이명박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 준공식에 참석했다.
73
0000년 00월 00일, 29~39세 때, 이명박은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 묘를 아버지가 운영하던 이천 목장 부지로 옮기고 비석에 시편 23편 구절을 새겼다가 아버지의 역정으로 글자를 메웠고, 말년에 개척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글자를 되살렸다.
74
1981년 00월 00일, 39세 때, 이명박은 아버지 이충우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 곁에 안장하는 일을 겪었고, 추도 예배는 아버지의 말년 친구였던 개척교회 젊은 목사에게 맡겼다.
75
1982년 04월 12일, 40세 때, 이명박은 페낭대교 기공식을 이틀 앞두고 말레이시아 총리실이 귀빈석 천막만 걷어 달라고 요구하자 일반석까지 모두 천막을 치기로 하고, 행사장을 네 구역으로 나눠 업체들을 동시에 투입해 기한 안에 설치를 마쳤다.
76
1985년 00월 00일, 43세 때, 이명박은 완공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다리였던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건설을 마무리했다.
77
1988년 00월 00일, 46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이 겸하던 현대건설 회장 자리를 넘겨받아 회장에 올랐다.
78
1988년 00월 00일, 46세 때, 이명박은 회장 승진 직후 기업인으로서 마지막 과제로 북방 진출을 택해 일본 닛쇼이와이 관계자를 통해 소련 초청을 주선한 뒤, 망설이던 정주영에게 한소 수교까지 앞당길 수 있다며 소련 방문을 설득했다.
79
1989년 01월 07일, 47세 때, 이명박은 안기부 반공 교육과 경제 활동만 하겠다는 서약을 거쳐 정주영과 함께 도쿄를 경유해 모스크바에 도착하며 한국 기업인 최초로 소련을 공식 방문했다.
80
1989년 01월 11일, 47세 때, 이명박은 소련 상공회의소와 한소경제협력위원회 설치 합의서에 서명해 한국과 소련 사이의 첫 공식 문서를 만들었다.
81
0000년 00월 00일, 47세 때, 이명박은 귀국길 도쿄와 김포공항에서 정보기관 요원들에게서 소련에서 한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았다.
82
0000년 00월 00일, 47~48세 때, 이명박은 일곱 차례 소련을 오가며 알루미늄 제련소, 임산업·석유화학 합작, 펄프 공장 건설 등에 합의했고, 야쿠티아 자치공화국과 가스전·석탄광 개발과 철도 부설 합의서를 모스크바강 선상에서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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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0월 00일, 48세 때, 이명박은 나연숙 작가와 배우 유인촌, KBS PD가 회장실로 찾아와 샐러리맨 출신인 자신을 주인공으로 현대를 다룬 드라마를 만들겠다며 자료를 요청하자 총수가 있는데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며 거절했다.
84
0000년 00월 00일, 48세 때, 이명박은 나연숙 작가가 정주영 회장을 찾아가 양해를 받았다며 다시 협조를 청했으나, 주인공이 자신인 줄 모른 정주영의 오해임을 알고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일절 협조하지 않았다.
85
1990년 10월 00일, 48세 때, 이명박은 자신을 모델로 한 주인공 박형섭을 유인촌이 연기한 KBS 2TV '야망의 세월'이 1년간 방영되며 40~50% 시청률을 기록하는 가운데 '샐러리맨 신화'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이 드라마는 정주영과 사이가 벌어지는 출발점이 됐다.
86
1990년 11월 05일, 48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과 함께 크렘린궁에서 한국 기업인 최초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나 야쿠티아 가스를 북한을 거쳐 들여오는 구상을 밝혔고, 북한은 소련이 설득하겠으니 통과료로 북한을 도와 달라는 답을 들었다.
87
1990년 11월 05일, 48세 때, 이명박은 고르바초프에게서 북한이 은퇴한 소련 핵물리학자들을 데려가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88
0000년 00월 00일, 48세 때, 이명박은 귀국 직후 고르바초프의 북핵 경고를 정부 관계자들에게 전했으나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반응과 함께 어디서도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89
0000년 00월 00일, 48~50세 때, 이명박은 이라크 재건 사업차 현지에 머물던 중 정주영에게서 전두환이 자신을 상공부 장관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정주영이 막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90
0000년 00월 00일, 48~49세 때, 이명박은 자신이 조연으로 그려진 데 분노한 정주영 회장에게서 방영을 중단시키라는 요구를 받고 나연숙 작가를 찾아가 호소했으나, 편성권은 방송국에 있다는 답을 듣고 돌아와 보고했다가 정주영의 질책을 받았다.
91
0000년 00월 00일, 48~49세 때, 이명박은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MBC 대학생 프로그램 조사에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함께 대학생이 좋아하는 기업인으로 꼽혔다.
92
1991년 09월 26일, 49세 때, 이명박은 방송위원회가 특정 기업인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며 '야망의 세월'을 방영한 KBS에 시청자 사과 명령을 통보하는 상황을 맞았다.
93
1991년 10월 20일, 49세 때, 이명박은 '야망의 세월'이 종영하는 것을 지켜봤고, 종영 뒤 나연숙 작가에게서 원래는 주인공이 여의도 광장의 100만 군중 앞에서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는 결말을 구상했다는 말을 들었다.
94
0000년 00월 00일, 49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의 정계 진출설이 퍼지던 무렵 정권 핵심 인사에게서 정주영의 정치 입문을 막지 못하거나 함께 신당으로 가면 현대를 공중분해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95
1991년 11월 00일, 49세 때, 이명박은 1361억 원 세금 추징에 격분한 정주영 회장에게서 세금 대신 그 돈으로 정치를 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받고, 재벌 총수의 정치 참여가 온당한지 모르겠다며 신중히 생각해 달라고 만류했다.
96
1991년 12월 00일, 49~50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 회장에게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이명박은 국무총리를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재벌 총수가 정치를 하면 정치와 경제가 한 몸이 되고 정치는 5년이지만 경제 공헌은 평생 할 수 있다며 정면으로 반대했다.
97
1991년 12월 00일, 49~50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 회장에게서 연말까지 함께 정치를 할지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이유는 재벌 총수가 정치 권력을 쥐면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해 신당에 합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98
1991년 12월 00일, 49~50세 때, 이명박은 숱한 고민 끝에 정주영 회장에게 현대를 떠나겠다고 통보한 뒤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99
1992년 01월 01일, 50세 때, 이명박은 서귀포 바닷가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본 뒤 가족에게 회사를 떠나겠다고 알렸고, 아내에게서 그 결정을 믿고 따르겠다는 답을 들었다.
100
1992년 01월 03일, 50세 때, 이명박은 현대그룹 사장단 신년 하례식에 마지막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정주영 회장이 자신과 이명박 회장, 이내흔 부사장이 정치에 참여하며 퇴사한다고 선언하는 상황을 맞았고, 이후 홀로 정주영의 사무실을 찾아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인사한 뒤 현대를 떠났다.
101
0000년 00월 00일, 50세 때, 이명박은 현대를 떠난 뒤 여러 기업의 영입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쉬려 했으나, 일 없는 일상을 견디기 어려워하던 무렵 김윤환 사무총장 등 민자당 실세들의 거듭된 영입 제안을 받았다.
102
0000년 00월 00일, 50세 때, 이명박은 14대 총선을 앞두고 플라자호텔에서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을 처음 만나 서울 강남을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확답을 미뤘다.
103
0000년 00월 00일, 50세 때, 이명박은 상도동 자택 조찬에서 김영삼이 강남을 대신 전국구 출마를 제안하자 며칠 고민한 끝에 기업에서 쌓은 경륜을 나라에 쓰겠다며 받아들였다.
104
1992년 03월 10일, 50세 때, 이명박은 민자당 전국구 후보 25번을 받아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서 공천장을 받았다.
105
1992년 03월 24일, 50세 때, 이명박은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들어섰고, 통일국민당을 만든 정주영과는 완전히 갈라섰다.
106
1992년 05월 00일, 50세 때, 이명박은 14대 국회의원 임기를 시작했으나 원 구성에만 125일이 걸렸고, 당 지도부의 배려로 여야 몸싸움 현장에서는 빠졌다.
107
1992년 12월 00일, 51세 때, 이명박은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 TV 찬조연설 마지막 주자로 정해졌으나 정주영의 사생활 폭로가 담긴 원고를 거부하고 재벌 총수의 정계 진출은 반대하되 정주영을 최고 기업인으로 평가하는 원고를 직접 써냈다가 연설이 취소됐고, 대신 이순재·이덕화 등과 전국 장외 유세를 다니면서 현대 계열사 가족이 많은 울산에서는 단상에 서지 않았다.
108
1992년 12월 00일, 50~51세 때, 이명박은 대선 승리 직후 대한상공회의소를 찾은 김영삼 당선인에게 과거 경부고속도로 건설 반대를 지금은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가 쓸데없는 소리라는 핀잔을 들었다.
109
1993년 00월 00일, 51세 때, 이명박은 대선 패배와 검찰 수사 끝에 몸져누운 정주영을 청운동 자택으로 찾아갔고, 소련에 한 번 더 가자는 그의 말에 건강을 되찾으면 모시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110
1993년 00월 00일, 51세 때, 이명박은 SBS 주병진쇼에 출연해 북한을 거쳐 야쿠티아 가스를 들여오는 구상을 설명했다.
111
1994년 07월 06일, 52세 때, 이명박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정경유착의 원인은 전경련이 아니라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며 전경련 해체에 반대하고, 대기업 계열사들이 개별 기업 단위로 경쟁하게 하는 해법과 중소기업의 공정 경쟁 여건 마련을 주장했다.
112
1994년 07월 06일, 52세 때, 이명박은 같은 대정부질문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경쟁력을 잃은 중소기업 500여 곳을 북한에 진출시키고 남북공동국토개발위원회를 설치하자는 남북경협 방안을 제안했다.
113
1995년 00월 00일, 53세 때, 이명박은 이종찬의 탈당으로 비어 있던 민자당 종로 지구당위원장을 전국구 의원 관례에 따라 맡았다.
114
1995년 00월 00일, 53세 때, 이명박은 첫 민선 서울시장 후보 경선 공고에 홀로 지원했고, 김영삼 대통령이 정원식 전 총리를 내정했다며 이원종 정무수석과 이세기 서울시지부 위원장이 사퇴를 요구하자 경선을 취소하든지 치르든지 하라며 거부했다.
115
1995년 00월 00일, 53세 때, 이명박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청와대 조찬 독대에서 경선을 접으면 정부에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대통령 임기 중에는 공직을 맡지 않겠다며 거절했고, 민주화 운동을 이끈 대통령답게 경선을 치르게 해 달라고 요구해 결국 경선을 관철했다.
116
1995년 00월 00일, 53세 때, 이명박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펴내며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내놓겠다는 뜻을 밝혔다.
117
0000년 00월 00일, 53세 때, 이명박은 책이 나온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읽고 싶어 한다며 20권가량을 보내 달라는 북한의 인편 요청을 받고 이를 들어줬다.
118
1995년 05월 12일, 53세 때, 이명박은 여론조사 없이 대의원 투표로 치러진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2884표(약 37%)를 얻어 4701표의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졌다.
119
1995년 06월 00일, 53세 때, 이명박은 자신을 꺾은 정원식이 서울시장 본선에서 20.67%로 3위에 그치며 낙선하는 결과를 지켜봤다.
120
1996년 02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직후 김영삼 대통령에게서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여당 체면은 세울 수 있으니 종로에 출마하라는 말을 듣고, 연고도 승산도 없다고 여기면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121
1996년 03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자신의 선거운동원들이 상대인 이종찬 후보에게 몰려가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300여 명을 모두 불러 다음은 없으니 이번 당선을 위해 뛸 생각이 없으면 떠나라고 못 박은 뒤, 핵심 운동원 10명으로 별도 조직을 꾸렸다.
122
1996년 03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통합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서 재벌회사 출신이 국회의원이 되겠냐는 비판을 받았으나 인신공격으로 맞서지 않았고, 유세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던 노무현의 부인 권양숙에게는 호감을 갖게 됐다.
123
1996년 03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시간 낭비라는 선배 의원의 만류에도 소방차가 들어가지 못할 만큼 골목이 좁은 창신동과 숭인동을 거의 매일 찾아 야유 속에서도 재개발 공약을 설명했다.
124
1996년 04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효제초등학교 합동연설회에서 이종찬 측 동원 청중이 일어서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듣고 가 달라며 붙잡은 뒤 창신·숭인동 재개발 구상을 밝혔고, 연설 후 대학로까지 걷는 동안 수백 명의 시민이 그를 따랐다.
125
0000년 00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선거사무소를 찾아온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에게서 북한 경유 가스관과 북한 내 공단 구상에 대한 질문과 함께 당선이 확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126
0000년 00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선거 막바지 주일 예배 직후 김영삼 대통령에게서 여론조사에서 이종찬을 앞섰다는 전화를 받았다.
127
1996년 04월 11일, 54세 때, 이명박은 제15대 총선 서울 종로 선거구에서 41%를 얻어 4선 현역 이종찬(33.55%)과 노무현(17.66%)을 누르고 당선됐고, 창신·숭인동에서는 50%에 가까운 표를 얻었다.
128
0000년 00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청와대 당선자 만찬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서 당신이 이길 줄 알았다며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129
1996년 07월 18일, 54세 때, 이명박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서울~부산 수송비가 부산~LA 해상 운송비보다 비싸다며, 강 540km를 준설하고 조령에 20.5km 터널을 뚫어 한강과 낙동강을 잇고 5000t 바지선이 부산과 인천을 오가게 하는 경부운하 건설을 처음 제안했다.
130
0000년 00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대정부질문을 들은 초선 이재오 의원이 찾아와 당파를 떠난 민생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와 인연을 맺었다.
131
1996년 08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여야 의원 47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경부운하건설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132
0000년 00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15대 총선을 치른 그해 여름 종로구의 한 삼계탕 식당에서 낙선한 노무현 전 의원과 우연히 마주쳤고, 식당 주인이 노무현에게 사무실 용도로 내준 방이 있던 그곳에서 거듭 만나며 친분을 쌓았다.
133
1996년 09월 10일, 54세 때, 이명박은 자신의 선거운동원이었던 김유찬이 새정치국민회의 기자실에서 법정 한도 9500만 원을 넘겨 쓰고도 7100만 원만 신고해 6억8000만 원을 누락했다고 폭로하는 상황을 맞았고, 김유찬은 이후 폭로를 뒤집는 서신을 남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134
0000년 00월 00일, 54세 때, 이명박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선관위가 대어를 제대로 잡았다고 공세에 나서고 국민회의가 자신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하는 상황을 맞았다.
135
1996년 10월 07일, 54세 때, 이명박은 15대 총선 선거비용 초과 지출 등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136
1996년 10월 09일, 54세 때, 이명박은 김영삼 대통령이 중남미 순방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검찰에 의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137
1997년 09월 00일, 55세 때, 이명박은 선거법 위반 1심에서 벌금 700만 원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138
1998년 00월 00일, 56세 때, 이명박은 한 신문사의 '대한민국 50년의 50대 인물' 조사에서 경제 분야 10인 가운데 유일한 전문경영인으로 꼽혔다.
139
1998년 02월 21일, 56세 때, 이명박은 다가오는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기 위해 국회의장에게 종로 지역구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140
0000년 00월 00일, 56세 때, 이명박은 사퇴서를 받은 김수한 국회의장에게서 대법원까지 재판을 끌면 임기를 거의 채울 수 있다는 만류를 들었으나, 정치에 책임을 지겠다며 처리를 요청해 2심 판결 전에 의원직을 내려놓았다.
141
1998년 04월 00일, 56세 때, 이명박은 항소심에서 벌금 400만 원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142
0000년 00월 00일, 56세 때, 이명박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명륜동 자택에 불려가 종로 보궐선거 출마를 상의받았고, 호남 출신이 많은 창신·숭인동에서 어떻게 이겼느냐는 질문에 재개발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143
1998년 07월 21일, 56세 때, 이명박은 자신의 사퇴로 치러진 7·21 종로 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되며 자신이 떠난 지역구 의석을 노무현이 이어받는 상황을 맞았다.
144
1998년 11월 00일, 56세 때,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도전의 길이 막히자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교수의 초청을 받아 아내와 함께 워싱턴으로 떠났고, 교외 주택 대신 이민자가 많이 사는 시내 작은 아파트를 얻어 종이상자를 밥상 삼아 지냈다.
145
0000년 00월 00일, 57세 때, 이명박은 워싱턴에서 손학규의 제안으로 매주 그와 만나 식사하며 시국을 토론했고, 일요일마다 한인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봤다.
146
1999년 00월 00일, 57세 때, 이명박은 미국 상원의 빌 클린턴 대통령 탄핵 심리를 방청하다 비속어를 쓴 의원이 의장의 5분 퇴장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모습을 보고, 다시 기회가 오면 정치 선진화에 힘쓰겠다고 마음먹었다.
147
0000년 00월 00일, 57세 때, 이명박은 국민회의 당무위원으로 연수 중이던 이인제가 운전기사 딸린 대형 세단을 타고 나타나 왜 형수님 고생을 시키느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148
1999년 04월 00일, 57세 때, 이명박은 대법원에서 벌금형이 확정돼 피선거권을 잃었다.
149
1999년 05월 00일, 57세 때, 이명박은 선거법 사건 변론을 맡았던 홍준표가 의원직을 잃고 미국에 오자 아내와 함께 덜레스 공항에 마중 나갔고, 이후 운전면허와 집, 차를 구하는 일을 도우며 가까워졌다.
150
2000년 02월 00일, 58세 때, 이명박은 지인이 소개한 노부부의 부탁으로 그 아들인 와튼스쿨 MBA 출신 김경준을 만난 뒤, 그와 함께 전산 개발을 맡을 LKe뱅크를 세워 공동대표가 됐고 인터넷 종합금융 포털 e-BANK 코리아의 회장을 맡았다.
151
2000년 08월 15일, 58세 때, 이명박은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됐다.
152
2000년 10월 00일, 58세 때, 이명박은 광운대 최고경영자 과정 특강에서 새 인터넷 금융 사업을 소개하던 중 자신이 세운 LKe뱅크를 김경준의 투자자문사 BBK로 잘못 말했다.
153
2001년 00월 00일, 59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이 85세로 세상을 떠나 그와의 소련 동행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
154
2001년 03월 00일, 59세 때, 이명박은 금융감독원이 BBK 조사에 들어가자 찾아온 김경준에게서 사태를 수습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155
2001년 04월 18일, 59세 때, 이명박은 e-BANK 코리아 회장과 LKe뱅크 대표에서 물러나며 김경준과의 동업을 모두 정리했다.
156
2001년 05월 10일, 59세 때, 이명박은 이회창 총재의 요청으로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 분과위원장을 맡아 처음 당직에 올랐다.
157
2001년 10월 00일, 59세 때, 이명박은 동대문구 을 재보궐선거에 나선 홍준표의 유세차에 올라 지원 연설을 했고, 홍준표는 당선됐다.
158
2001년 11월 00일, 59세 때, 이명박은 전경련회관에서 위기의 한국 경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한나라당이 경제 중심 정당이 돼야 한다며 법인세와 소득세를 함께 낮추고 세원을 넓히자고 주장했다.
159
0000년 00월 00일, 59~60세 때, 이명박은 경부운하를 대선 핵심 공약으로 내자고 이회창 총재에게 제안했으나 논란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60
2002년 00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젊은 시절 함께 일했던 이태원 시장 환경미화원 출신 원로들이 서울 각 구청 미화원들을 설득하며 자신을 지지하는 도움을 받았다.
161
0000년 00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서울시장 선거 유세에 동원한 아르바이트생들과 급여 문제로 소송을 겪은 뒤 급여를 지급했다.
162
0000년 00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시장 취임 직후 첫 공식 조찬에 시립병원 원장과 수간호사들을 불러 무료 환자를 차별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대신 의료 시설 교체와 의사 해외 연수를 약속했다.
163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시장 재임 중 장애인 콜택시를 도입하고 국내 첫 장애인 전문 치과병원인 서울시립장애인치과병원을 열었다.
164
2002년 01월 29일, 60세 때, 이명박은 63빌딩에서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출판기념회를 열어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165
0000년 00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홍사덕 의원을 영입한 이회창 총재가 서청원 서울시지부장과 형 이상득을 통해 경선 사퇴를 압박했으나 두 사람 모두 나서지 않으면서 경선을 이어갔다.
166
0000년 00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강남 대의원 합동유세에서 강남 개발 경험과 문화 도시 구상을 밝혔고, 이어진 대의원 오찬장에서 큰 환호를 받자 홍사덕이 서둘러 자리를 뜨는 장면을 지켜봤다.
167
2002년 03월 08일, 60세 때, 이명박은 중앙일보의 대의원 여론조사에서 53.1%로 홍사덕(36.5%)을 앞섰고, 홍사덕이 잠적한 끝에 후보 등록을 하지 않으면서 경쟁자가 사라졌다.
168
2002년 04월 04일, 60세 때, 이명박은 한나라당 서울시지부 대회에서 단독 출마해 만장일치로 서울시장 후보에 추대됐고, '서울의 신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169
2002년 05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고건 시장이 출입을 막자 시의원 현장 답사에 동행하는 방식으로 청계천 복개 구조물 아래에 들어가 악취와 가스 속에서 구간을 끝까지 돌았고, 그곳에서 자란 개똥참외 싹을 보고 복원을 다짐했다.
170
0000년 00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고건 시장을 만나 자신이 당선되면 청계고가를 철거할 것이니 보수 공사를 미뤄 달라고 요청해 착공을 후임 시장 취임 이후로 늦추는 답을 받았다.
171
2002년 05월 13일, 60세 때, 이명박은 KBS 첫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서 새천년민주당 김민석 후보의 공세에 맞받아치지 않고 정책 설명에 집중했다.
172
2002년 05월 14일, 60세 때, 이명박은 이중재 전 의원을 통해 이회창 총재에게서 토론을 너무 못해 대선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으나, 같은 날 박성범 전 의원과 가회동 노스님에게서 정책에 집중한 태도가 좋았다는 격려를 받았다.
173
0000년 00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김부겸·김영춘·오세훈·남경필 등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자진해 캠프에 합류하고 이재오가 선대위원장, 오세훈이 대변인을 맡는 지원을 받았다.
174
2002년 06월 13일, 60세 때, 이명박은 제3회 지방선거에서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 체계 개편을 내건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52.28%를 얻어 김민석 후보(43.02%)를 32만여 표 차로 꺾고 당선됐다.
175
2002년 06월 23일, 60세 때, 이명박은 월드컵 거리 응원으로 시청 앞 로터리를 시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당선인 신분으로 '시청 앞 시민광장' 조성 구상을 발표했다.
176
2002년 07월 01일, 60세 때, 이명박은 월드컵 4강으로 취임식이 하루 늦춰진 날 관악구 신림10동 수해 방재 현장을 찾아 청계천 복원과 하천 정비로 수해를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177
2002년 07월 02일, 60세 때, 이명박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장에 취임해 재선 없이 4년 안에 청계천 복원, 버스 체계 개편, 서울숲과 서울광장 조성을 마치겠다고 공무원들에게 밝혔고, 7년이 걸린다는 청계천 공사는 세 개 공구로 나눠 동시에 착공하겠다고 했다.
178
2002년 07월 03일, 60세 때, 이명박은 취임 다음 날 청계천복원추진본부 구성과 조직 체계를 발표했다.
179
0000년 00월 00일, 60세 때, 이명박은 한 고위 공무원이 상대 정당 편에서 일한 직원 명단을 내밀며 정리하라고 하자 보지 않겠다며 돌려보냈다.
180
2002년 07월 03일, 60세 때, 이명박은 시장 취임 직후 시청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명예 서울시민증을 주는 행사를 열었다가, 아들 이시형이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히딩크와 기념사진을 찍어 결례 논란을 빚었다.
181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공무원들을 삼성·LG 연수원에 보내 합숙 교육을 받게 하고, 사업별 태스크포스 회의로 결재 단계를 줄였으며, 민감한 문서에는 시장 지시임을 적게 해 실무자의 책임 부담을 덜었다.
182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감사원 감사로 공무원들이 수시로 불려가자 전윤철 감사원장에게 시청 안에 사무실을 내줄 테니 출장 감사를 하라고 제안해 성사시켰다.
183
0000년 00월 00일, 60~61세 때, 이명박은 시청 벽 한쪽을 통유리 민원실로 바꾸고 공무원 상인대책팀을 꾸려 청계천 상인들을 4700여 차례 찾아가 설득하게 했다.
184
0000년 00월 00일, 60~61세 때, 이명박은 박원순·김상희·최열 등 시민·환경단체 대표와 기업, 대학을 묶어 '서울환경회의21'을 만들고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 개혁 논의에 참여시켰다.
185
0000년 00월 00일, 60~61세 때, 이명박은 전임 시장 때 주거·상업 단지와 차이나타운 등으로 개발해 5조 원 수익을 기대하던 뚝섬 부지에 생태숲을 만들기로 하고, 반대하는 공무원과 2000여 명이 모인 주민 공청회, 환경단체를 차례로 설득했다.
186
0000년 00월 00일, 60~61세 때, 이명박은 시청 앞 광장 설계 공모에서 LCD 바닥의 '빛의 광장'안을 골랐으나 경찰의 교통대란 우려와 시의회의 예산 보류에 부딪히자, 교통 시뮬레이션과 시청 주변 교통량 18% 감소 결과로 경찰을 설득하고 비용이 적은 잔디광장으로 바꿔 2003년 말 예산을 통과시켰다.
187
0000년 00월 00일, 60~61세 때, 이명박은 혜화동 공관 앞에서 얇은 상복 차림으로 청계천 복원 반대 1인 시위를 하던 노점상에게 자신의 겨울 코트를 벗어 건넸고, 그는 다음 날부터 시위를 그만뒀다.
188
2003년 00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시장 취임 1년 무렵 WCG 2003 우승자 이용범과 스타크래프트 대결을 벌였으나 5분 만에 졌다.
189
2003년 00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버스 개혁에 앞서 업계와 얽혀 있던 서울시 교통국 공무원을 전원 교체하고 버스 회사 관계자를 혼자 만나지 못하게 했으며, 중앙일보 교통 전문기자 출신 음성직을 교통관리실장에 앉혔다.
190
2003년 01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버스를 지하철처럼 운영하는 브라질 쿠리치바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도로 한가운데를 버스에 내주는 중앙버스전용차로 도입을 결심했다.
191
0000년 00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차로를 넓히려 인도를 줄이자는 공무원들의 안을 두고 독일 교통 전문가에게서 오히려 인도를 넓혀 승용차 이용을 줄이라는 조언을 듣고 이를 따랐다.
192
0000년 00월 00일, 61~62세 때, 이명박은 버스 개혁에 반대하던 교통 전문가가 실패에 손가락을 걸자는 내기를 제안하자 교수님 손가락이 잘릴 게 분명해 못 하겠다며 거절했다.
193
0000년 00월 00일, 61~62세 때, 이명박은 승객 수가 아니라 운행 실적에 따라 수입을 나누는 버스 준공영제를 구상해 노선 이권을 없애고, 소송을 거론하며 반발하던 버스 회사 사주들을 직접 설득했다.
194
0000년 00월 00일, 61~62세 때, 이명박은 중앙차로 정류장 500여 곳을 광고 수익을 주는 조건으로 프랑스 옥외광고 업체 JC데코가 설치·관리하도록 공개 입찰해 시 예산 없이 만들었고, 이 업체의 조언으로 버스를 기능별 4색 체계로 바꿨다.
195
2003년 05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대통령과 문희상 비서실장, 유인태 정무수석에게 청계천 공사에 필요한 경찰 교통 통제 협조를 거듭 요청해 한 달 뒤 국무회의에서 공개 토론을 하자는 답을 받았다.
196
2003년 06월 04일, 61세 때, 이명박은 국무회의에 홀로 참석해 국무위원 대부분의 반대와 청계천 공사는 역대 왕이 했으니 중앙정부가 결정해야 한다는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의 주장에 맞서 실무는 한성판윤이 했어도 역사에는 임금의 업적으로 남는다고 반박했고,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한번 해보라는 결정과 경찰 협조 지시를 끌어냈다.
197
0000년 00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교통량 분석과 시뮬레이션으로 우회 대책을 세우고, 통·반장을 통해 청계천 통근 시민을 파악한 뒤 우회 도로와 교통편을 담은 신문 수만 부를 착공 6개월 전부터 집집마다 돌렸다.
198
2003년 07월 01일, 61세 때, 이명박은 대림산업·삼성물산, LG건설·현대산업개발, 현대건설·코오롱건설에 세 구간을 나눠 맡겨 청계천 복원 공사를 동시에 시작했고, 국무회의에서 유일하게 조건부 찬성을 한 한명숙 환경부 장관을 기공식에 초청해 함께 첫 삽을 떴다.
199
0000년 00월 00일, 61세 때, 이명박은 미국 보스턴 빅딕 프로젝트에서 본 물 분사식 정밀 절단 공법을 청계고가 철거에 도입해 소음과 분진 없이 구조물을 잘라냈다.
200
2003년 11월 30일, 61세 때, 이명박은 동대문 풍물시장 이전을 거부한 노점상과 전국노점상협회 조직원들이 폐타이어에 불을 지르고 가스통으로 위협하며 맞선 가운데 서울시와 경찰이 청계천 노점 철거를 강행하는 상황을 맞았다.
201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 중 서울시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발언으로 비기독교인, 특히 불교계의 거센 반발을 샀다.
202
2004년 00월 00일, 62세 때, 이명박은 서울 시내에 이베코-이리스버스의 시티클래스 굴절버스를 대량 도입했다.
203
2004년 01월 16일, 62세 때, 이명박은 비어 있던 동대문운동장을 구획해 만든 동대문 풍물시장으로 청계천 노점상들을 옮겼고, 공구상가 상인들을 위해서는 문정동 가든파이브 조성을 추진했다.
204
2004년 03월 02일, 62세 때, 이명박은 서울광장 조성 공사를 시작했다.
205
2004년 04월 06일, 62세 때, 이명박은 서울숲 조성 공사를 시작했고, 부지에서 떨어진 뚝섬 자투리 땅을 고밀도 개발 용지로 2998억 원에 팔아 조성비 2325억 원을 마련했다.
206
2004년 04월 20일, 62세 때, 이명박은 광장이 시위대에 독점되지 않도록 사용 60일 전부터 7일 전까지 허가를 받게 하는 서울광장 조례안을 시의회에 냈다.
207
2004년 05월 01일, 62세 때, 이명박은 교통 체증을 예상한 언론의 우려 속에 서울광장을 개장했고, 정체 없이 시민들이 잔디광장을 가득 메웠다.
208
2004년 07월 01일, 62세 때, 이명박은 1년여 준비 끝에 버스 중앙차로, 노선·번호 개편, 티머니 환승 할인을 담은 대중교통체계 개편을 시행했으나, 바뀐 노선과 카드 단말기 오류로 첫날부터 큰 혼란이 빚어졌다.
209
2004년 07월 04일, 62세 때, 이명박은 대시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으나 개편을 철회하지 않고 10년, 100년을 내다본 개혁이라며 밀고 나갔고, 매일 밤 11시 점검회의로 문제를 다음 날 첫차 전까지 고치게 해 2주 만에 새 체계를 정착시켰다.
210
0000년 00월 00일, 62~64세 때, 이명박은 버스 준공영제를 두고 일부 우파에게서 사회주의 정책을 쓴 좌파라는 공격을 받았다.
211
2004년 09월 00일, 62세 때,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제9회 베네치아 국제건축비엔날레 최우수 시행자 상을 받았다.
212
2004년 10월 21일, 62세 때, 이명박은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시 입장을 밝혔다.
213
2004년 12월 24일, 63세 때, 이명박은 우리은행 협찬으로 서울광장에 겨울 스케이트장을 열었다.
214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서울 시내 경유버스를 천연가스 버스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215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시장 재임 중 뉴타운 사업, 서울숲 조성, 숭례문 개방, 수돗물 '아리수' 브랜드화를 추진했다.
216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시장 초기 노무현 정부의 지원 속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행정수도 이전 논의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정부와 대립했다.
217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시장 재임 중 일정을 마친 영부인 권양숙이 시장 집무실을 찾아와 함께 차를 나눴다.
218
2005년 00월 00일, 63세 때, 이명박은 버스 개혁으로 메트로폴리스 상을 시작으로 국제 교통 관련 상을 잇따라 받았다.
219
2005년 01월 00일, 63세 때, 이명박은 금속노조에 가입한 단원들의 반발 속에 서울시향을 세종문화회관에서 떼어 재단법인으로 새로 출범시켰고, 단원 선발 전권과 외부 청탁 차단을 약속해 영입한 정명훈이 블라인드 오디션으로 단원을 뽑았다.
220
2005년 02월 00일, 63세 때, 이명박은 경찰의 반대를 시뮬레이션 결과로 설득해 지하보도뿐이던 광화문 사거리에 횡단보도를 설치했다.
221
2005년 03월 24일, 63세 때, 이명박은 서울시청 홈페이지에 공개 서한을 올려 노무현 대통령의 수도 분할 구상이 수도 이전보다 더 나쁘다며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노무현 자신의 부처 이전 반대 논리를 들어 재고를 촉구했고, 이를 계기로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222
0000년 00월 00일, 63세 때, 이명박은 여당이 수도 분할 반대 집회를 서울시가 배후에서 조직했다고 공격하고, 박근혜 대표 등 한나라당 주류가 행정도시 추진에 힘을 싣는 상황을 맞았다.
223
2005년 06월 18일, 63세 때, 이명박은 착공 1년 2개월 만에 서울숲을 완공했다.
224
2005년 08월 10일, 63세 때, 이명박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서울시청 본관을 대형 태극기와 소형 태극기 3600장으로 뒤덮었고, 노무현 정부는 방한한 북측 대표단을 시청 앞이 아닌 뒷길로 청와대에 안내했다.
225
2005년 08월 15일, 63세 때, 이명박은 서울광장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새 서울시향의 광복 60주년 기념음악회를 열어 2만5000여 명의 시민을 모았다.
226
2005년 09월 15일, 63세 때, 이명박은 한국수자원공사의 한강 물값 요구에 정수해 되돌려 보내는 공익 시설이라며 버틴 끝에 건설교통부 중앙하천관리위원회에서 물값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받았다.
227
2005년 10월 01일, 63세 때,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고 국내외 귀빈 4000여 명이 모인 '청계천 새물맞이' 준공식을 한복 차림으로 열었으며, 비가 그친 뒤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는 축사를 들었다.
228
0000년 00월 00일, 63세 때, 이명박은 미리 보낸 한복 옷감 견본이 전달되지 않아 양복 차림으로 온 노무현 대통령이 행사 뒤 의상 문제를 지적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229
0000년 00월 00일, 63세 때, 이명박은 청계천 공사에 참여한 공무원과 관계자 3000여 명의 이름을 직함 없이 가나다순으로 새긴 명판을 두물다리 근처에 세웠다.
230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짓는 계획을 세웠으나 임기 안에 마치지 못했고 후임 시장들이 이어가지 않았다.
231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강북 달동네에서 자녀들이 일 나간 사이 밖에서 자물쇠로 잠긴 방에 갇힌 치매 노인을 발견한 뒤 실태 조사로 방치된 치매 노인 1300세대를 확인했다.
232
0000년 00월 00일, 60~64세 때, 이명박은 시내버스 저상버스 도입과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설치로 장애인 이동권을 넓혔고, 재래시장을 전통시장으로 이름을 바꿔 아케이드 지붕과 화장실, 주차장을 갖추게 하고 훗날 온누리상품권으로 이어진 공동상품권을 만들었다.
233
2006년 00월 00일, 64세 때, 이명박은 시장에서 물러난 뒤 한동안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다.
234
2006년 00월 00일, 64세 때, 이명박은 주민 반발을 설득해 망우동에 첫 노인 전문병원인 서울시립 북부노인병원을 열었다.
235
2006년 05월 00일, 64세 때, 이명박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청계천 복원 등 서울시 환경정책을 '그린 드림' 커버스토리로 다루는 평가를 받았다.
236
2006년 06월 26일, 64세 때, 이명박은 퇴임을 며칠 앞두고 입주 기업과 북한 당국의 초청 형식으로 개성공단을 4시간가량 둘러본 것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방북이 됐고, 신원 등 공장 세 곳을 돌며 동행한 조동찬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총국장 등 북측 인사들이 『신화는 없다』의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37
2006년 06월 30일, 64세 때, 이명박은 4년 임기를 마치고 서울시청을 떠나며 경선 단계부터 지원한 같은 당 오세훈에게 시장직을 넘겼다.
238
2006년 07월 03일, 64세 때, 이명박은 여의도 대신 조계사 맞은편 종로구 견지동 서흥빌딩에 대선 준비 사무실 '안국포럼'을 열고 정두언 의원 등과 첫 출근했으며, 이곳 인력은 이후 대선 캠프와 청와대로 이어졌다.
239
0000년 00월 00일, 64세 때, 이명박은 안국포럼 이름을 사칭한 가짜 명함이 나돌자 참모의 제안을 받아 공식 명함에 'AF-0001' 형식의 일련번호를 새겨 넣고 실무형 소수 캠프를 유지했다.
240
2006년 07월 11일, 64세 때, 이명박은 시장 퇴임 뒤 처음 참석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자신과 가까운 이재오가 여론조사 우세에도 대의원 현장 투표에서 밀려 박근혜 측 지지를 받은 강재섭에게 당대표 자리를 내주는 결과를 보며 당심과 민심의 차이를 실감했다.
241
2006년 08월 00일, 64세 때, 이명박은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정책 탐사를 시작해 낙동강·금강·한강 유역과 충청·영남·호남의 산업 벨트를 돌고 유럽·일본·인도·두바이의 운하와 첨단산업 현장을 찾았다.
242
2006년 10월 00일, 64세 때, 이명박은 독일을 찾아 라인강과 마인-도나우 운하를 둘러봤다.
243
2006년 10월 23일, 64세 때, 이명박은 유럽 탐사 중 스위스 제네바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를 방문했고, 빠듯한 일정 탓에 다음 행선지로 가는 비행기를 일부 수행원과 기자들이 놓치는 일을 겪었다.
244
2007년 01월 02일, 65세 때, 이명박은 유력 대선주자로서 상도동 자택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 인사했다.
245
2007년 03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저서 『어머니』 출판기념회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이 자리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강재섭 대표, 한나라당 의원 63명, 지지자 2만 명이 모였다.
246
2007년 03월 05일, 65세 때, 이명박은 충북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손학규의 탈당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당에 남아도 나가도 시베리아라는 취지로 답했다가, 손학규에게서 나가라고 놀린다는 반발을 샀다.
247
2007년 03월 19일, 65세 때, 이명박은 경선 3파전의 한 축이던 손학규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박근혜와의 양자 대결 구도를 맞았다.
248
0000년 00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대선 준비 과정에서 다른 후보들이 유세를 다닐 때 유럽 운하 현장을 둘러보고 독일 전문가를 초청해 세미나를 여는 등 대운하 공약을 다듬었다.
249
2007년 05월 14일, 65세 때, 이명박은 대의원 비중을 높이자는 박근혜 측 요구로 경선 규칙 갈등이 분당 위기로 번지자 캠프의 반대를 누르고 상대 요구를 받아들인 뒤, 모두의 승리를 위한 양보라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250
2007년 05월 29일, 65세 때, 이명박은 한나라당 대선 경선 첫 TV 토론회에서 홍준표가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식수원 오염 등을 들어 비난하는 상황을 맞았고, 이를 지켜본 아내 김윤옥이 토론 직후 홍준표의 등을 치며 동생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서운함을 드러냈다.
251
0000년 00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정두언 등 참모들이 박근혜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자료를 들고 와 공세를 건의하자 진흙탕 싸움은 보수 전체를 무너뜨린다며 자료를 버리라고 지시했다.
252
0000년 00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경선 기간 신당동 자택으로 김종필 전 총리를 찾아가 중립만 기대했으나 대승을 바란다는 격려를 들었고, 박근혜의 사촌 언니인 부인 박영옥에게서도 꼭 대통령이 되라는 지지를 받았다.
253
0000년 00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박태준 전 총리와 따로 만나 대통령은 이 시장이 돼야 한다는 말과 함께 박근혜 측의 압박을 피하려고 경선 기간 해외에 머물겠다는 뜻을 들었고, 박태준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254
2007년 07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자신과 형 이상득이 배다른 형제이고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석 달을 미루던 끝에 울산 합동연설회 현장에서 검찰 수사관에게 구강 상피세포를 내줘 유전자 검사를 받았고, 결과로 친형제임이 확인됐으며 소문을 퍼뜨린 사람은 구속기소됐다.
255
2007년 08월 20일, 65세 때, 이명박은 잠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전당대회에서 개표 중 2000표 넘게 진다는 보고를 받고도 대회장에 가 자리를 지켰고, 현장 투표에서는 박근혜에게 432표 뒤졌으나 여론조사에서 2884표 앞서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뽑혔으며 박근혜는 승복 연설을 했다.
256
2007년 08월 21일, 65세 때, 이명박은 한나라당 대선후보로서 혜화동 주교관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예방했다.
257
2007년 08월 21일, 65세 때, 이명박은 경선 결과에 반발한 박사모 회원 수백 명이 당사를 점거하자 대선후보와 당 지도부의 첫 간담회를 국회에서 열었다.
258
2007년 08월 28일, 65세 때, 이명박은 경선 승리 뒤 인사차 잡은 이회창 전 총재 자택 방문 약속이 세 시간 전에 취소되는 일을 겪었다.
259
2007년 08월 29일, 65세 때, 이명박은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해 청계천 복원에 대한 칭찬과 함께 대통령이 되면 미국과 잘 지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260
2007년 08월 30일, 65세 때, 이명박은 대선후보로서 청구동 자택으로 김종필 전 총리를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
261
2007년 09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통합을 내세워 김학송을 전략기획본부장, 김재원을 정보위원장에 앉히고 진영·김성조·송광호 의원을 기용하는 등 친박 인사를 당 요직에 배치했다.
262
2007년 10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어렵게 이회창 전 총재를 만나 선대위 상임고문을 맡아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263
2007년 11월 07일, 65세 때, 이명박은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 선언 소식을 듣고 새벽에 서빙고동 신동아아파트로 세 번째 찾아갔으나 문이 열리지 않자 경비실에서 쓴 자필 편지를 문틈으로 넣었고, 이회창은 그날 오후 무소속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264
2007년 11월 11일, 65세 때, 이명박은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정권 창출과 이후 국정 현안을 함께 협의할 정치적 동반자로 삼고 당정 분리 원칙을 지키겠다고 약속했고, 다음 날 박근혜에게서 이회창 출마는 정도가 아니라는 지원 발언을 얻었다.
265
2007년 11월 20일, 65세 때, 이명박은 한나라당 대선후보로서 경기도 고양시 토당동에서 연탄 배달 봉사를 했다.
266
2007년 11월 24일, 65세 때, 이명박은 17대 대선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노무현 대통령이 총장 대행을 두는 관례 대신 임채진을 새 검찰총장으로 임명하는 상황을 맞았다.
267
2007년 12월 05일, 65세 때, 이명박은 검찰이 BBK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 무혐의를 발표하면서 30%대로 떨어졌던 지지율을 회복했다.
268
2007년 12월 06일, 65세 때, 이명박은 KBS에서 열린 첫 대선후보 TV 합동토론에서 검찰 수사 결과를 믿지 않는다며 공격을 이어가는 정동영 후보에게 그 검찰은 노무현 정부가 임명했다고 맞받으며 북조선 검찰이라도 와야 믿겠느냐고 반문했다.
269
2007년 12월 07일, 65세 때, 이명박은 KBS 대선후보 연설에서 부부가 살 집 한 채만 남기고 당락과 관계없이 나머지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270
0000년 00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대선 막판 혼외자가 있다는 흑색선전을 겪었고, 아내 김윤옥은 그런 아이가 있으면 데려오라며 일손이 부족하다고 받아넘겼다.
271
0000년 00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선거 며칠 전 정두언에게서 자신이 BBK를 설립했다고 말하는 영상을 가진 이들이 150억 원을 요구한다는 보고와 함께 돈을 주자는 건의를 받았으나, 협박에 돈으로 응하면 진짜 약점이 된다며 거절했고 이후 정두언과 거리를 뒀다.
272
2007년 12월 16일, 65세 때, 이명박은 대통합민주신당이 광운대 특강 영상을 공개하자 밤에 여의도 당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BBK 특검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273
2007년 12월 17일, 65세 때, 이명박은 자신이 수용한 BBK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결과를 맞았다.
274
2007년 12월 18일, 65세 때, 이명박은 선거 전날 아동양육시설 은평천사원을 찾은 뒤 아내 김윤옥과 함께 청계천 광장에서 마지막 거리 유세를 했다.
275
0000년 00월 00일, 65세 때, 이명박은 대선 지방 유세에서 청계천 복원 반대 시위를 이끌던 '가스통' 상인 대표 정석연이 자신의 당선 팻말을 들고 선거운동을 돕는 모습을 봤다.
276
2007년 12월 19일, 66세 때, 이명박은 자신의 66번째 생일이자 37번째 결혼기념일에 치러진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48.67%(1149만 표)를 얻어 정동영 후보를 531만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며 10년 만의 보수 정권 교체를 이뤘다.
277
2007년 12월 26일, 66세 때, 이명박은 당선 일주일 만에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함께한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182명 규모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출범시켰다.
278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대선 뒤 평양을 드나들던 한 목사에게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식 초청장을 받으면 취임식에 오겠다는 뜻을 전해 듣고 전례가 없다며 거절했고, 이어 대선 승리를 도운 데 대한 감사 친필 서한을 달라는 요구도 받았으나 북한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며 거부했다.
279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인수위 기간 정두언이 첫 내각 총리·장관 후보 명단이 적힌 수첩을 내밀자 펴보지도 않고 질책했고, 이후 그를 인선에서 배제했다.
280
2007년 12월 28일, 66세 때, 이명박은 당선인 신분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나 한미 FTA 합의를 용기 있는 일이라고 평가하고 남은 임기 안에 국회 비준까지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
281
2007년 12월 28일, 66세 때, 이명박은 당선 직후 전경련을 찾아 회장단에게 선거 자금을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았다며 총수 개별 면담 대신 정례 기업인 회의로 소통하겠다고 약속했다.
282
2007년 12월 29일, 66세 때, 이명박은 인수위 워크숍에서 '실용정부' 같은 별칭 대신 새 정부를 '이명박 정부'로 부르기로 정했다.
283
2008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옛 청와대 내부 업무망 이지원에서 200만 건의 자료가 빠져나간 사실을 확인해 조사하고 있다고 정부 차원에서 발표했다.
284
2008년 01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캠프 인사를 통해 쇠고기 협상 지연으로 한미 관계가 파탄 지경이라며 노무현 대통령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전해 들었다.
285
2008년 01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당선인 신분으로 삼청동 안가에서 임채진 검찰총장을 만나 새 정부가 들어서면 물러나겠다는 뜻을 들었으나, 사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임시키겠다고 답했다.
286
2008년 01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임채진 총장이 유임 이유를 묻자, 정권이 바뀌면 검찰이 전 정권을 겨냥할 것이니 그 자리에 남아 노무현 대통령을 보호해 달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287
2008년 01월 18일, 66세 때, 이명박은 여의도 국민중심당 당사를 찾아 심대평 대표와 만났다.
288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시·도지사협의회에서 지켜본 심대평 전 충남지사에게 초대 총리를 제안했으나, 이회창을 지지하며 신당 창당을 추진하던 그가 신의를 이유로 고사했다.
289
2008년 01월 20일, 66세 때, 이명박은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기관끼리 5년간 미뤄 온 전남 영암 대불산업단지의 전봇대 문제를 지적했고, 그 전봇대가 곧바로 뽑혀 나간 일을 계기로 규제개혁을 핵심 국정과제로 삼았다.
290
2008년 01월 28일, 66세 때, 이명박은 자원외교를 이끌 적임자로 본 한승수 유엔 기후변화특사를 초대 총리로 공식 지명했다.
291
2008년 02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타임 창간 60주년 기념 영웅 선정에서 고르바초프, 앨 고어 등과 함께 '환경 영웅'으로 뽑혔다.
292
2008년 02월 01일, 66세 때, 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와 국토 구상을 함께 다듬은 류우익 서울대 교수를 대통령실장으로 발탁했다.
293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탕평 인사로 친박 핵심 김무성 의원에게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박근혜 전 대표가 동의하지 않아 입각이 무산됐다.
294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아륀지' 발언이 희화화되면서 일부 교과를 영어로 가르치는 영어 몰입교육 구상을 접었고, 이후 원어민 보조교사 확대와 영어회화 전문강사 제도 도입, 농어촌 화상 영어 수업 확대로 방향을 바꿨다.
295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첫 내각이 '고소영'·'강부자'라는 비판을 받자 학교나 교회를 기준으로 인선하지 않았고 장관 15명 중 고려대 출신은 두 명뿐이라고 반박했다.
296
2008년 02월 18일, 66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두 번째 만찬 회동에서 임기 안에 쇠고기 협상을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자동차 재협상의 지렛대로 쓰는 게 낫다는 답을 들었다.
297
2008년 02월 21일, 66세 때, 이명박은 정호영 특검팀이 BBK 실소유와 주가조작·횡령 어디에도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최종 결과를 발표하는 결과를 맞았다.
298
2008년 02월 22일, 66세 때, 이명박은 정부 조직을 13부·2처로 줄이려 했으나 야권과 여성계의 반발로 통일부와 여성부를 남기면서 15부·2처 체제로 출범하게 하는 정부조직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299
2008년 02월 22일, 66세 때, 이명박은 인선 과정에서 눈여겨본 중앙인사위원회 김명식 인사정책국장을 청와대 인사비서관으로 발탁했다.
300
2008년 02월 25일, 66세 때, 이명박은 자정에 통의동 당선인 집무실에서 합참 지휘통제실 이형국 대령과 통화하며 국군통수권을 넘겨받고 대통령 직무를 시작했고, 오전에는 가회동 자택에서 재동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바이올린 연주로 이웃들의 배웅을 받은 뒤 국립현충원 참배를 거쳐 국회 취임식장으로 향했다.
301
2008년 02월 25일, 66세 때, 이명박은 제17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취임식이 끝난 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나란히 참석자들에게 인사했다.
302
2008년 02월 25일, 66세 때, 이명박은 국내외 6만여 명이 모인 취임식에서 2008년을 선진화 원년으로 선포했고, 서울시향의 '환희의 송가' 연주를 마친 정명훈 예술감독에게서 예정에 없던 지휘봉을 건네받았다.
303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취임 직후 대검찰청 강당을 찾아, 과거 자신을 수사한 검사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지난 일은 따지지 않겠지만 검찰이 더 이상 정치에 끌려다니지 말고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304
2008년 03월 07일, 66세 때, 이명박은 취임 전 민정수석 내정자였던 검찰 출신 이종찬 변호사와 의견을 나눠 정한 방침대로, 외청장 인사에서 임채진 검찰총장·어청수 경찰청장·한상률 국세청장의 유임을 확정했다. 이유는 법이 정한 임기를 지키는 것이 법치의 기본이며 전 정권을 겨냥한 사정에 국정 역량을 쓰지 않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05
2008년 03월 19일, 66세 때, 이명박은 법무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검사도 임관 때 정치적 중립과 사명을 스스로 다짐하는 선서를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306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검찰이 만든 선서 문안을 민정수석이 재가를 받겠다며 가져오자 문건을 열어보지 않고 돌려주며, 스스로 다짐하라는 뜻이었지 대통령 승인을 받을 일이 아니니 검찰이 자율로 정하라고 지시했다.
307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교육과정 개편으로 노무현 정부의 수능 등급제를 점수제로 되돌렸다.
308
2008년 04월 18일, 66세 때, 이명박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과 1박 2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309
2008년 04월 18일, 66세 때, 이명박은 취임 직후 재개한 한미 쇠고기 협상을 타결지었다.
310
2008년 04월 29일, 66세 때, 이명박은 MBC PD수첩이 동물 학대 영상을 광우병 의심 소 도살 장면으로 소개한 방송을 내보내면서 협상에 대한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311
2008년 05월 02일, 66세 때, 이명박은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허용 방침과 한미 FTA 등 정책에 반발한 대규모 촛불시위가 열리기 시작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312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광우병 사태가 정점에 이른 2008년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광화문에 사무실을 내고 싶다고 요청하자, 시위가 매일 열리는 곳이라 불편할 것이니 다른 장소가 낫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313
0000년 00월 00일, 66~71세 때, 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다 국회와 여당 일부의 반대로 접은 뒤 4대강 사업으로 방향을 바꿔 16개 보를 세우고 완공했다.
314
2008년 05월 20일, 66세 때, 이명박은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에서 17대 국회 임기 안에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쇠고기 재협상이 먼저라는 답을 들었고, 단둘이 남은 자리에서는 워싱턴 시절 스테이크를 사 달라던 일을 꺼내 반대만 하지 말라고 조언했으나 손학규는 회담 뒤 다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315
2008년 05월 22일, 66세 때, 이명박은 청와대 춘추관 대국민 담화에서 국민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사과하고, 위험 시 수입을 중단할 수 있는 주권 조치를 문서로 확보했다며 국회에 한미 FTA 비준을 호소했다.
316
2008년 05월 24일, 66세 때, 이명박은 촛불시위가 거리 행진으로 번지는 상황을 맞았다.
317
2008년 06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취임 초 50%대이던 국정수행 지지율이 16.9%까지 떨어지는 상황을 맞았다.
318
2008년 06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기록 사본을 무단으로 고향에 반출했다는 의혹이 청와대 쪽에서 나온 기사로 불거지는 상황을 맞았다.
319
2008년 06월 10일, 66세 때, 이명박은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뒤덮인 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시위 행렬과 '아침이슬' 노랫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돌아봤다.
320
2008년 06월 10일, 66세 때, 이명박은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시위대가 청와대 담을 넘더라도 인명 피해만은 절대 안 된다고 지시했고, 경찰은 세종로 사거리에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충돌을 막았다.
321
2008년 06월 14일, 66세 때, 이명박은 워싱턴포스트 사설에서 거센 반대 속에서도 옳은 일을 밀고 나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322
0000년 00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해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수출하도록 보장해 달라고 요청해 동의를 얻었고,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미국에 보내면서 국제 신뢰를 고려해 '재협상' 대신 '추가 협상'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323
2008년 06월 19일, 66세 때, 이명박은 대국민 특별기자회견에서 추가 협상을 택한 이유를 설명하고 청와대와 내각의 인적 쇄신을 약속했다.
324
2008년 06월 19일, 66세 때, 이명박은 같은 회견에서 국민이 반대한다면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25
2008년 06월 20일, 66세 때, 이명박은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류우익 대통령실장의 뜻을 받아들여 수석 5명과 함께 물러나게 하고, 6·3 시위 동지인 정정길 전 울산대 총장을 후임 실장으로 삼아 2기 참모진을 꾸렸다.
326
2008년 07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청와대를 떠나며 핵심 기록이 담긴 하드디스크와 e지원 시스템을 봉하마을로 옮겨간 사실이 드러나자, 청와대가 나서지 말고 소관 기관인 국가기록원이 절차에 따라 조용히 돌려받도록 하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327
2008년 07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기록물 문제로 연락했다가 닿지 못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회신 전화를 했고, 사본을 봉하로 옮긴 경위는 정상문 전 비서관을 통해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는 말을 들었다.
328
2008년 07월 00일, 66세 때, 이명박은 한상률 청장 체제의 국세청이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을 투입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에 특별세무조사를 시작하면서, 광우병 사태와 겹친 시점 때문에 보복성 조사를 지시했다는 의심을 받게 됐다.
329
2008년 07월 11일, 66세 때, 이명박은 금강산 관광객이 북한군 총격으로 숨지는 사건을 맞아 금강산 관광은 중단시켰으나 개성공단은 유지했다.
330
2008년 07월 16일, 66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기록 사본을 돌려보내겠으니 관련 비서관과 행정관 대신 자신에게 책임을 물어달라는 내용의 공개 서신을 받았다.
331
2008년 07월 16일, 66세 때, 이명박은 같은 서신에서 전직 대통령 예우의 전통을 세우겠다던 자신의 다짐이 이런 결말에 이른 데 대한 노무현의 불편한 심경을 전해 들었다.
332
2008년 07월 19일, 66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시스템 전체를 돌려주지 않고 기록물 하드디스크 14개와 백업본 14개 등 28개만 분리해 봉하 사저에서 차량 석 대에 나눠 싣고 성남 대통령기록관으로 직접 옮겼으며, 문제의 기록물이 새벽 1시 국가기록원에 입고되는 상황을 맞았다.
333
2008년 08월 26일, 66세 때, 이명박은 첫 국빈방문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요청으로 자신이 시장 시절 조성한 서울숲을 함께 찾아 기념식수를 했고, 헤어질 때 후진타오에게서 포옹을 받았다.
334
2008년 10월 30일, 66세 때, 이명박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회의에서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과정을 참석자들에게 설명했다.
335
0000년 00월 00일, 66~67세 때, 이명박은 세계 금융위기 대응을 위해 미국·중국과 각각 300억 달러 통화스와프를 맺었고, 일본이 처음 30억 달러를 제시하자 필요 없다며 사양해 결국 일본과도 300억 달러 규모로 합의를 끌어냈다.
336
2008년 10월 31일, 66세 때, 이명박은 자신의 제안을 계기로 검찰이 자체적으로 문구를 다듬은 '검사선서'가 대통령령으로 제정·시행되는 결과를 맞았고, 이 선서는 이후 서울중앙지검 로비 등 전국 검찰청에 걸렸다.
337
2008년 11월 26일, 66세 때, 이명박은 청와대에서 긴급 경제상황 점검회의를 주재했다.
338
0000년 00월 00일, 66~67세 때, 이명박은 금융위기 극복에 협조를 구하려고 민주노총·한국노총 위원장까지 청와대로 불러 설득했고, 전 부처 과장급 이상 공무원에게 부처마다 다른 내용의 문자를 직접 보냈으며, 은행에는 주말에도 기업 대출 신청을 받도록 했다.
339
0000년 00월 00일, 66~71세 때, 이명박은 신도시 대신 기반 시설이 갖춰진 지역에 집을 짓는 공급 정책을 펴고, 신혼부부용 보금자리주택을 저렴하게 장기 임대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340
0000년 00월 00일, 66~71세 때, 이명박은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소득세 최저세율을 8%에서 6%로 낮추는 감세 정책을 폈다.
341
2008년 12월 04일, 66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이 구속되고 이듬해 노무현의 아들과 조카사위, 권양숙 여사까지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이 사안을 본격적으로 주시하게 됐다.
342
2008년 12월 29일, 67세 때, 이명박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임채진 검찰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법무부·법제처·국민권익위원회의 2009년 업무보고를 받았다.
343
2009년 00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정부 핵심 인사 몇 명을 통해 수사가 불가피하더라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최대한 지키며 조용히 진행하라는 뜻을 검찰에 간접적으로 전했다.
344
2009년 00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세계 경제가 역성장한 가운데 한국 경제가 0.3% 플러스 성장을 기록하는 결과를 끌어냈다.
345
2009년 00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한식 세계화 사업을 시작했고, 재임 중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한글학당을 세웠다.
346
2009년 01월 20일, 67세 때, 이명박은 서울 용산 재개발 지역 농성 진압 과정에서 사상자가 난 용산참사를 맞았다.
347
2009년 03월 13일, 67세 때, 이명박은 소말리아 해적의 한국 선박 공격에 대응하려고 청해부대를 아덴만에 파견했다.
348
2009년 04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업무보고를 마친 원세훈 국정원장을 붙잡아, 권양숙 여사를 부산의 호텔에서 조사했듯 노무현 전 대통령도 소환하지 말고 봉하마을 인근에서 방문조사하는 것이 맞다며, 서울대 법대 1년 선배로서 임채진 총장에게 이 뜻을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349
2009년 04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서울고검장 출신인 김경한 법무부 장관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가 지나치니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대한 예우받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
350
2009년 04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정동기 민정수석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예우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351
2009년 04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검찰이 공개 소환 방침을 고수해 봉하마을 방문조사 요청이 무산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검 출석을 받아들이자, 상경길에 취재진을 피할 수 있도록 대통령 전용 KTX를 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정중히 사양하는 답을 들었다.
352
2009년 04월 30일, 67세 때, 이명박은 대신 청와대 경호 버스를 제공하겠다고 다시 제안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그 버스로 봉하마을에서 서초동 대검찰청까지 이동했다.
353
2009년 05월 23일, 67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른 아침 추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긴급 의료 대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했고, 서거 보고를 받은 뒤 믿기 어렵고 비통한 일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354
2009년 05월 24일, 67세 때, 이명박은 유족이 원한 국민장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유로 정부 일각에서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국민장을 의결했다.
355
2009년 05월 25일, 67세 때, 이명박은 청와대를 통해 봉하마을 조문 계획을 밝혔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현지의 격앙된 분위기를 이유로 만류하자 방문을 접었고, 대신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고인을 정중히 모시라고 지시했다.
356
2009년 05월 29일, 67세 때, 이명박은 경복궁 흥례문 앞 광장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 부부가 함께 참석해 헌화하고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357
2009년 05월 29일, 67세 때, 이명박은 헌화하는 순간 백원우 민주당 의원에게서 '살인자'라는 외침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사죄하라는 요구를 들었으나, 맞대응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358
2009년 08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대선 때 약속한 재산 사회 환원을 이행해 강남 건물 등 331억4200만 원 상당의 사재를 출연해 장학 재단인 청계재단을 세웠다.
359
2009년 08월 00일, 67세 때, 이명박은 개각을 앞두고 심대평에게 다시 총리직을 제안했으나, 이회창의 반대 끝에 자유선진당을 떠난 그가 탈당 직후 입각은 오해를 살 수 있다며 사양했다.
360
2009년 12월 00일, 67~68세 때, 이명박은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이 자신을 만나려고 일본 일정을 줄여 서울로 와 조찬을 함께했고, 그에게서 자신의 저서를 모두 읽었다는 말을 들었다.
361
2009년 12월 27일, 68세 때, 이명박은 프랑스로 기울던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사업을 직접 설득해 한국 첫 원전 수출 계약을 따냈다.
362
2010년 03월 00일, 68세 때, 이명박은 천안함 피격 사건을 맞았고, 성명에서 희생 장병을 잊지 않고 퇴임 후에도 매년 찾겠다고 유가족에게 약속했다.
363
2010년 03월 02일, 68세 때, 이명박은 대학에 가지 않고도 취업할 수 있는 학교로 만든 마이스터고의 개교식에 참석했다.
364
2010년 09월 21일, 68세 때, 이명박은 김윤옥 여사와 함께 KBS 1TV 아침마당 생방송에 출연했다.
365
2010년 11월 00일, 68세 때, 이명박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벌어진 교전 상황을 맞았다.
366
2010년 11월 11일, 68세 때, 이명박은 서울에서 제5차 G20 정상회의를 열었다.
367
2011년 01월 10일, 69세 때, 이명박은 무함마드 왕세제에게 특전사의 왕실 경비대 훈련을 제안해 아크부대 150여 명을 파병했고, 장병 급여를 아랍에미리트가 내겠다는 제안은 용병이 될 수 있다며 거절했다.
368
2011년 03월 00일, 69세 때,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의 제안을 받아 국내 비축기지에 UAE산 원유 600만 배럴을 공동 비축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369
2011년 03월 14일, 69세 때,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 바라카에서 열린 원전 기공식에 참석해 무함마드 왕세제와 악수했다.
370
0000년 00월 00일, 66~70세 때,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가 33년 만에 외국에 허용한 할리바 유전 개발 참여 제안을 무함마드 왕세제에게서 받았고, 매장량이 이미 확인됐다는 귓속말을 들은 뒤 망설이던 한국석유공사에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참여를 지시했다.
371
2011년 07월 00일, 69세 때, 이명박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확정 결과를 받아 들었다.
372
2011년 11월 00일, 69세 때, 이명박은 한미 FTA 비준을 둘러싼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373
2011년 11월 15일, 69세 때, 이명박은 국회를 찾아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와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한미 FTA 비준안의 원만한 처리를 부탁했다.
374
2011년 12월 01일, 69세 때, 이명박은 TV조선·채널A·JTBC 등 종합편성채널 3사가 개국하고 MBN이 보도채널에서 종편으로 바뀌는 방송 체제 개편을 맞았다.
375
2012년 03월 20일, 70세 때,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 유전 개발 관계자들을 불러 격려 오찬을 열었다.
376
2012년 03월 26일, 70세 때, 이명박은 서울에서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열었다.
377
2012년 07월 01일, 70세 때, 이명박은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을 맞았다.
378
2012년 08월 10일, 70세 때, 이명박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독도를 방문했다.
379
2012년 08월 13일, 70세 때, 이명박은 김명식을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에 임명했다.
380
2012년 08월 14일, 70세 때, 이명박은 일왕이 방한하려면 독립운동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말해 일본의 반발을 샀다.
381
2012년 09월 00일, 70세 때, 이명박은 프레데릭 덴마크 왕세자의 초청으로 국가 정상으로는 처음 그린란드를 방문해 지하자원 공동 개발에 합의했다.
382
2013년 01월 00일, 71세 때, 이명박은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택시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383
0000년 00월 00일, 75~76세 때, 이명박은 문재인 정부가 자신의 재임 시절 아랍에미리트와의 관계를 조사하자 이를 알게 된 무함마드 국왕이 크게 노여워하는 상황을 맞았다.
384
2018년 03월 14일, 76세 때, 이명박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한동훈 3차장 체제의 검찰 수사를 받으며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385
2020년 10월 29일, 78세 때, 이명박은 다스 자금 횡령과 뇌물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 원을 확정받았다.
386
2022년 00월 00일, 80세 때, 이명박은 수감 중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이 찾아와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수감자의 편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거절했으나, 거듭된 요청에 결국 관계 복원을 바라는 편지를 써 주었다.
387
2022년 06월 00일, 80세 때, 이명박은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풀려났다.
388
2022년 12월 28일, 81세 때, 이명박은 윤석열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남은 형기 약 15년과 벌금 82억 원을 면제받고 복권됐다.
389
2023년 01월 29일, 81세 때,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무함마드 국왕이 이명박 이야기만 절반 넘게 했다며 감사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390
2023년 03월 22일, 81세 때, 이명박은 특별사면 후 첫 공식 일정으로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참배했다.
391
2023년 08월 15일, 81세 때, 이명박은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 윤기중 명예교수 빈소를 찾아 윤석열과 처음 대면했고, 논현동 사저를 찾아뵙고 싶다는 윤석열의 말에 그럴 필요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392
2023년 10월 00일, 81세 때, 이명박은 재임 중 지은 4대강 16개 보 가운데 하나인 여주 강천보를 걸었다.
393
2024년 05월 29일, 82세 때, 이명박은 방한 중인 무함마드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이 논현동 자택을 찾아와 그를 맞이했다.
394
2024년 08월 12일, 82세 때, 이명박은 윤석열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남동 관저를 찾아 정진석 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만찬을 함께했다.
395
2024년 08월 12일, 82세 때, 이명박은 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 수사 때 생각이 달랐으나 아랫사람 때문이었다며 대립 중이던 인사를 탓하자, 그 사람을 앉힌 것은 대통령이니 사람을 잘못 쓴 것이라고 답했다.
396
0000년 00월 00일, 82~83세 때, 이명박은 미국의 제동으로 체코 원전 수주가 지연되던 무렵 주한 체코대사의 요청으로 만나 한국 기업과 정부를 믿으면 성공할 것이라고 조언했고, 한 달이 안 돼 체코가 한국과 정식 계약을 맺는 결과를 지켜봤다.
397
2025년 09월 17일, 83세 때, 이명박은 중앙일보 창간 60주년 기념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398
2025년 12월 10일, 83세 때, 이명박은 서울시립대에서 '서울시 버스개혁과 청계천 복원: 성과와 교훈'을 주제로 강연했다.
399
2026년 03월 26일, 84세 때, 이명박은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참배했다.
400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서초동 개인 사무실에서 퇴임 13년 만의 첫 언론 인터뷰를 중앙일보와 갖고, 이재명 정부가 탈원전 철회·북극항로 개발·자원외교 등 보수 정권 정책을 받아들인 것을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401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의회 3분의 2를 내준 보수가 참패를 인정하고 원인을 분석해야 하는데도 분열까지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이미 과거가 된 윤석열 문제는 법에 맡기고 미래를 보라고 주문했다.
402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재임 중 가장 잘한 일로 세계 금융위기 극복을, 아쉬운 일로 4대 그룹에 부지를 줘 기업도시로 만들려던 세종시 구상의 좌절을 꼽았다.
403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젊은 세대의 재평가 움직임을 왜곡된 진실이 드러난 결과로 보면서, 수감 중 1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젊은이들에게서 하루 70~80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404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자신의 수감이 문재인 정부의 강압 수사에 따른 누명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고, 검찰개혁은 구체적 방향을 평가하기 어렵지만 필요성에는 동의한다고 밝혔다.
405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삼성의 다스 미국 소송비 대납 혐의에 대해, 이학수 부회장을 만난 적이 없고 김석한 변호사를 청와대에서 만났다는 검찰 주장도 날짜와 출입 기록이 맞지 않는다며 반박했다.
406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4대강·자원외교·방산 수사에서 자신의 참모 가운데 구속된 사람이 없었고, 다스는 앞선 검찰·특검 수사에서 두 차례 무혐의가 났는데도 문재인 정부 검찰이 비자금을 자신의 것으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407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4대강 보 해체 주장은 말이 안 되며 오히려 준설이 필요하다면서, 실용을 내세운 이재명 정부가 보를 헐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408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자원외교를 이끈 공기업 사장들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는데도 문재인 정부가 확보한 자원을 헐값에 팔았다고 비판했다.
409
2026년 03월 30일, 84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에 국정 책임자로서 책임을 느끼지만 강압 수사를 지시한 적은 없고, 검찰 강경파의 구속 주장에도 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반대했다며 자신을 '살인자'로 부르는 데 대한 억울함을 드러냈다.
410
2026년 06월 01일, 84세 때, 이명박은 서울숲을 찾아 시민들과 인사를 나눴다.
411
2026년 08월 31일, 84세 때, 이명박은 중앙일보에 연재 중인 회고록 '나는 더 큰 대한민국을 꿈꿨다' 제38회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관한 입장을 17년 만에 처음 공개하며, 국세청 세무조사와 검찰 수사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했고 과잉 수사를 막으려 꾸준히 제동을 걸었다고 주장했다.
412
2026년 08월 31일, 84세 때, 이명박은 수사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거세게 비판해 정치적으로 고립시킨 쪽은 민주당과 좌파 언론이었는데, 서거 이후 그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겼다고 주장했다.
413
2026년 08월 31일, 84세 때, 이명박은 그동안 반박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고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414
2026년 08월 31일, 84세 때, 이명박은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지시한 적이 없으며, 한상률 청장의 독대 보고를 받고 크게 칭찬했다는 보도는 사실 확인 없이 퍼진 오보라고 반박했다.
415
2026년 08월 31일, 84세 때, 이명박은 검찰이 1996년 종로 당선 직후 무리한 이유로 자신을 기소해 의원직에서 물러나게 했고 서울시장 시절과 대선후보 시절에도 자신을 압박했다며, 정치 권력에 종속된 검찰에 실망했다고 비판했다.
416
2026년 08월 31일, 84세 때, 이명박은 자신이 '통치'가 아닌 '국가 경영'을 하려고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처음부터 검찰을 정권의 도구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417
2026년 09월 02일, 84세 때, 이명박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개인 특혜가 아니라 국정 경험과 국제 인맥이라는 국가 자산을 지키는 일이라며, 노무현을 개인적 호감이 아닌 전직 대통령으로서 배려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418
2026년 09월 02일, 84세 때, 이명박은 수사를 이끈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을 자신이 발탁했다는 의혹을 부인하며, 워싱턴에서 만났다는 이인규의 서술은 기억나지 않고 검찰 인사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419
2026년 09월 02일, 84세 때, 이명박은 이른바 '논두렁 시계' 사안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언론 보도로 논란이 된 뒤에야 알았다며, 국정원을 동원한 공작이라는 주장을 부인했다.
420
2026년 09월 02일, 84세 때, 이명박은 검찰이 소환 조사 후 20여 일 동안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고 사실상 불구속 수사로 방향을 잡은 것은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421
2026년 09월 02일, 84세 때, 이명박은 당시 참모진과 여당 일부 강경파가 좌파 정권 10년간의 수모를 갚자고 했지만, 자신에게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복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422
2026년 09월 02일, 84세 때, 이명박은 노무현의 변호인이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서거 직후에는 정치 보복에 의한 타살로까지 보지 않는다고 했다가 몇 년 뒤 사실상 정치적 타살이라고 입장을 바꿨다고 비판했다.
423
2026년 09월 02일, 84세 때, 이명박은 좌파 진영이 수사 당시 노무현을 외면했다가 서거 뒤 태도를 뒤집고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면서도, 재임 중 일어난 비극에 대해서는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명박 : 2026년 10월 5일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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