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0화

이명박 : 13년 만의 침묵을 깬 쓴소리

2026.03.26~2026.04.12·1화

이명박 : 13년 만의 침묵을 깬 쓴소리

LIFE COUNT

1935~2009.08.28·1화

이명박

이명박

1
1941년 12월 19일, 0세 때, 이명박은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이충우(李忠雨)와 채태원 사이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2
1939년, [날짜불명], 이명박의 아버지 이충우(李忠雨)는 본명이었던 이덕쇠를 이충우로 개명하였다.
3
1940년, [날짜불명], 이명박의 조부 이종한(李鐘漢)이 쓰키야마 씨(月山氏)로 창씨하여 이명박의 창씨개명 이름은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가 되었다.
4
1945년, 4세 때, 이명박은 광복과 함께 가족과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읍 덕성리 덕실마을에 정착했다.
5
1947년경, 6세 때, 이명박은 가족과 함께 약 2년 거주 후 포항읍내로 이사했다.
6
1950년경, 9세 때, 이명박은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한국 전쟁이 터져 미군의 폭격으로 바로 위의 누나와 귀국후 태어난 막내 남동생을 잃었다.
7
1950년대, 10대 전반, 이명박은 전쟁통에 단칸방에서 모든 식구가 자며 하루 두 끼를 술지게미로 때우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8
1950년대, 10대 전반, 이명박은 친구들에게 술 냄새를 풍긴다며 구박받는 경험을 했다.
9
1950년대, 10대 전반, 이명박은 어렸지만 성냥, 김밥, 밀가루떡을 팔아 살림을 도왔다.
10
1950년대 중반, 10대 중반, 이명박은 포항중학교 시절에 전교 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수재 소리를 들었다.
11
1950년대 후반, 10대 후반, 이명박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3남으로서 도저히 고등학교를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지만 중학교 담임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장학금만으로 다니겠다는 전제 하에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12
1950년대 후반, 10대 후반, 이명박은 동지상고 재학 중 낮에는 수레를 끌고 다니며 뻥튀기, 과일 행상 등으로 생활비를 보태는 어려운 처지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3
1960년, 19세 때, 이명박은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합숙소에 들어가 일당노동자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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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9세 때, 이명박은 대학중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대입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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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9세 때, 이명박은 낮에는 일당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합숙소에서 '불 좀 끄라'는 원성을 들으며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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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0세 때, 이명박은 고려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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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0세 때, 이명박은 이웃들의 도움으로 이태원 시장에서 환경미화원 자리를 구해 학비를 벌면서 학교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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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21세 때, 이명박은 새벽 4시면 이태원 시장에 나가 쓰레기를 모아 리어카에 싣고 서너 번씩 반포대교 인근까지 오가는 힘든 생활을 반복했다.
19
1963년, 22세 때, 이명박은 힘겨운 현실을 탈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2학년 1학기 때 군 입대를 결심했다.
20
1963년, 22세 때, 이명박은 논산훈련소 건강검진에서 기관지확장증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아 쫓겨나왔다.
21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복학 후 3학년 때 상과대 학생회장에 선출됐다.
22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졸업을 앞두고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였다.
23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강행되자 6.3 시위 중 수배돼 계엄령 하에 도피 생활로 들어갔다.
24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수배 당시 이명백으로 잘못 필기한 오타로 순간 위기를 모면하였다.
25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신문에 수배 공고가 나고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자수하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나기까지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했다.
26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은 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박정희에게 부당한 취직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27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은 이낙선 청와대 민정담당 비서관의 조치로 현대건설에 이명박의 과거를 문제 삼지 말도록 하는 도움을 받았다.
28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면접에서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답했다.
29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경리과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30
1967년, 26세 때, 이명박은 입사 2년 차에 대리로 승진했다.
31
1970년, 29세 때, 이명박은 이사로 승진했다.
32
1970년 12월 19일, 29세 때, 이명박은 6살 연하의 김윤옥과 결혼했다.
33
1977년, 36세 때, 이명박은 입사 12년 만에 37세 나이로 현대건설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34
1988년, 47세 때, 이명박은 현대건설 회장에 올랐다.
35
1990년, 49세 때, 이명박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라크에서 건설공사를 대거 수주해놓았던 현대건설의 위기 상황에서 정주영의 지시로 유럽 각지로 자금 확보에 나섰다.
36
1992년 1월, 51세 때, 이명박은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현대를 떠났다.
37
1992년 3월 24일, 51세 때, 이명박은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38
1992년 초, 51세 때, 이명박이 현대를 그만둔 후 현대건설은 1차 부도 위기에 몰렸다.
39
1995년, 54세 때, 이명박은 대정부질문에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미국 로스앤젤레스 간의 해상운송비보다 비싸다고 지적하며 500km 길이의 경부운하 건설을 정부에 제안했다.
40
1995년, 54세 때, 이명박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경선에 나왔지만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했다.
41
1996년 4월 11일, 55세 때, 이명박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역구에 출마해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통합민주당 노무현, 자유민주연합 김을동 등을 제치고 당선됐다.
42
1996년, 55세 때, 이명박 진영의 6급비서였던 김유찬이 기자회견을 열어 이명박 캠프의 선거비용이 법정비용을 초과했다고 폭로했다.
43
1996년, 55세 때, 이명박은 김유찬이 말을 바꿔 폭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서신을 쓰고 해외로 도피하는 상황을 경험했다.
44
1997년 9월, 56세 때, 이명박은 1심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45
1998년 2월, 57세 때, 이명박은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한나라당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46
1998년 4월, 57세 때, 이명박은 항소심에서 벌금 400만원 형이 선고되어 대법원에 상고했다.
47
1998년, 57세 때, 이명박은 정치공세로 서울특별시장 경선출마를 포기하고 조지워싱턴 대학의 객원연구원으로 떠났다.
48
1999년 4월, 58세 때, 이명박은 대법원에서 벌금형이 확정되어 피선거권이 박탈됐다.
49
2000년 8월 15일, 59세 때, 이명박은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되면서 공직 선거 피선거권을 되찾았다.
50
2002년, 61세 때, 이명박은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해 새천년민주당 김민석 의원을 제치고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 됐다.
51
2005년 10월 1일, 64세 때, 이명박은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청계천 복원공사를 완료했다.
52
2005년 10월 26일, 64세 때, 이명박은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한 고대 동문 김정배 위원장의 권유에 따라 호를 원래 일송(一松)에서 청계(淸溪)로 바꿨다.
53
2006년 2월 21일, 65세 때, 이명박은 제33회 초교파 전국 목회자 부부 영성 세미나에서 "가난한 집안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을 통해 성공했다"고 간증했다.
54
2007년 12월 19일, 66세 때, 이명박은 제17대 대선에서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2위인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역대 최대 표차인 531만 여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55
2008년, 67세 때,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통해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통폐합안을 발표하고,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뼈대로 '경제살리기'의 기치를 내걸었다.
56
2008년, 67세 때,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쇠고기협상이 타결되자 MBC PD수첩을 비롯한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인간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하면서 광우병 사태가 발생하자 사과하고 30개월 이상 소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재협상을 약속했다.
57
2008년 9월, 67세 때,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발 글로벌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대내적으로는 미국, 일본, 중국 등과 통
58
1935년, [날짜불명], 이명박의 아버지 이충우(李忠雨)는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59
1950년경, 9세 때, 이명박은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전쟁통에 집안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다.
60
1964년, 23세 때, 이명박은 6.3 시위 관련 인사들 중 이재오 등은 후일 그와 같이 한나라당에서 정치활동을 하게 되었다.
61
1965년, 24세 때, 이명박이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의 주요 내용은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될 것이다."였다.
62
1965년, 24세 때, 정주영은 당시 이명박에 대해 "얼굴이 새카만 녀석이 눈은 살아 있었다"며 합격시킨 이유를 설명했다.
63
1977년, 36세 때,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나이가 35세일 때 현대건설 사장이 되었다는 점으로 수정되었다.
64
1989년, 48세 때,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KBS 2TV에서 《야망의 세월》이란 제목으로 드라마화 되었다.
65
1990년, 49세 때, 이명박은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빈 모하맛 총리, 중국의 장쩌민 주석, 구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CEO로서 국제적인 감각을 폭 넓게 익혔다.
66
1990년, 49세 때, 이명박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페낭대교(연륙교)를 건설했다.
67
1990년, 49세 때, 이명박은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투혼을 보였다.
68
2005년 10월 1일, 64세 때, 이명박은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청계천 복원공사를 완료했고,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업적을 남겼다.
69
2009년 8월 28일, 68세 때, 이명박은 나로우주센터 방문에서 "내가 젊었을 때 대한민국 자동차를 처음 개발했는데 부품이 2만3000개나 된다"는 발언으로 자동차 개발 참여 관련 논란을 일으켰다.

이명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