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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99.12·1화

이병철

이병철 : 경영권 방어와 사회적 행보

2026.03.29~2026.04.10·1화

이병철 : 경영권 방어와 사회적 행보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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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 12일, 이병철은 경상남도 의령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안동 권씨 권재림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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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어린 시절 이병철은 할아버지 이홍석 훈장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 등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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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어린 시절 이병철은 형과 함께 문산당에 가서 가문의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재능은 생각보다 없었지만 꾸준하고 성실히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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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9세 때, 이병철은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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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1세 때, 이병철은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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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이병철은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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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4세 때, 이병철은 지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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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이병철은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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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7세 때, 이병철은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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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결혼식을 마친 후 이병철은 상경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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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 4학년 1학기 무렵 이병철은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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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 이병철은 부모로부터 일본 유학에 대해 반대받았으나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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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 이병철은 조홍제에게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고 조홍제가 흔쾌히 수락하여 그의 도움으로 일본에 유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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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20세 때, 이병철은 중동중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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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20세 때, 이병철은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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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유학 초기 이병철은 한동안 책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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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대학 시절부터 이병철은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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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학년 때 이병철은 건강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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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22세 때, 이병철은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와세다대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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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귀국 후 이병철은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건강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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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귀국 후 이병철은 고향에서 특별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며 친구들과 노름판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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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이병철은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스스로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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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어느 날 이병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3명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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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이병철은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우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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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이병철은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며칠 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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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이병철의 아버지는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의 재산을 나누어 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며 별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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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이병철은 장사를 할 곳으로 경성부터 부산, 대구 등지를 직접 물색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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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이병철은 마산이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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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7세 때, 이병철은 친구 2명과 힘을 합쳐서 동업으로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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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3월, 29세 때, 이병철은 30,000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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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32세 때, 이병철은 삼성상회를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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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33세 때, 이병철은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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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8세 때, 이병철은 광복 후 경성으로 상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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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39세 때, 이병철은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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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초, 41세 때, 이병철은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하여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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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이병철은 서울에서 한국 전쟁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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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전쟁 직후 이병철은 피난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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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2세 때, 이병철은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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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4세 때, 이병철은 제조업에도 투자하여 제일제당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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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45세 때, 이병철은 제일모직을 설립하여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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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이병철은 사업 영역을 확장해나가며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하여 경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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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이병철은 성균관대학교의 재단 이사로서 교육사업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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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이병철은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가며 중앙개발, 고려병원 등을 인수하여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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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부터 1987년까지, 이병철은 한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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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초, 55세 때,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인수하여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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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5월, 55세 때, 이병철은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에도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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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이병철은 대구대학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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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8월 13일, 이병철은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이사에 위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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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9월, 56세 때, 이병철은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에도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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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이후, 이병철은 중앙일보 등을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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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5월 24일, 이병철이 운영하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나는 사카린 밀수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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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6월, 부산세관은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이병철의 삼성에 부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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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1월, 이병철의 차남 창희가 한국비료의 상무로 있으면서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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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59세 때, 이병철은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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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60세 때, 이병철은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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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이병철은 와세다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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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월, 63세 때, 이병철은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어 제일합섬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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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65세 때, 이병철은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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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이병철은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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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이병철은 삼성정밀·용인자연농원 등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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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66세 때, 이병철은 특별히 제일합섬의 공장 시스템을 공개했다.
62
1976년, 67세 때, 이병철은 위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63
1977년 5월, 68세 때, 이병철은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하여 삼성전자로 단일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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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이병철은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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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이병철은 미술에 심취하여 많은 소장품을 수집하거나 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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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이병철은 정주영 등과 함께 울산에 공단을 조성하는 데에도 일정부분 투자하거나 기부를 하여 설립에 일익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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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까지, 이병철은 동양방송을 언론통폐합이 될 때까지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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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72세 때,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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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으로 다시 재위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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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부터, 이병철은 제일합섬을 새한그룹을 차려 분가한 차남 창희에게 서서히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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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73세 때,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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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70세 때, 이병철은 중앙일보 회장이 되었다.
73
1982년, 73세 때, 이병철은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했다.
74
1982년, 이병철은 보스턴대학교에서 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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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8월, 75세 때, 이병철은 삼성전자의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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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6세 때, 이병철은 폐암 판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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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이후, 이병철은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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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초,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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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19일, 78세의 나이로 이병철은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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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19일, 이병철은 사망하였고 국민�장 무궁화장이 특별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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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삼성전자는 이병철의 3남 건희에게 상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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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이병철의 장녀 인희는 한솔그룹을 창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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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이병철의 막내딸 명희는 신세계그룹의 회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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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계열에게 상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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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제일제당 등 제일제당그룹은 이병철의 장남 맹희에게 상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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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이병철의 차남 창희는 새한그룹을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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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이병철은 국악과 서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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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이병철은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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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이병철은 매일경제와 전경련이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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